[목차] == 소개 == 日東壯遊歌 김인겸(金仁謙)이 [[1763년]](영조 39년)에 일본 통신사로 갔을 때 지은 시다. [[연행가]]와 함께 대표적인 기행 가사로 꼽히며 일본의 문물을 수용하는 태도를 보이는 한편, 일본인에 대한 적대감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당연히 이 기준은 수능 국어 영역 출제 빈도에 근거한 것이며 인용된 부분의 마지막 여섯 줄을 보면 아주 강하게 드러난다. 또한, 한문이 아닌 국문본이라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2019 수능]]에 나왔다. 2017 수능 연행가 이후 2년만에 기행가사가 돌아온 셈이다. 그리고 [[2024 수능]]에도 출제되었다. 일동장유가 원본의 경우 [[국립중앙도서관]]본, 가람본([[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 등이 있으나 가람본이 가장 많이 영인, 보급되어 있는 상태다. == 내용 == > 이십칠 일 사상(使相)들이 관소(館所)에 잠깐 내려 > 숙공(宿供)[* 사신에게 제공하는 저녁식사를 말한다.] 받고 잠깐 쉬어 저물도록 행선(行船)하여 > 정포(淀浦)[* 요도우라. 현재의 [[교토부]]에 있었던 옛 포구. 가람본 원문에는 '쳥포'로 되어 있는데 해당 지명은 확인되지 않아 '졍포'의 오기인 것으로 보인다. 조선으로 돌아갈 때는 '졍포'라고 잘 표기되어 있다.]로 올라오니, 여염도 즐비하며 > 물가에 성을 쌓고 경개(景槪)가 기이하다. > 물속에 수기(水機) 놓아 강물을 자아다가 > 홈으로 인수(引水)하여 성안으로 들어가니, > 제작(製作)이 기묘하여 법 받음직 하고나야. > 그 수기(水機) 자세히 보니 물레를 만들어서 > 좌우에 박은 살이 각각 스물여덟이오, > 살마다 끝에다가 널 하나씩 가로 매어 > 물속에 세웠으니 강물이 널을 밀면 > 물레가 절로 도니 살 끝에 작은 통을 > 노끈으로 매었으니 그 통이 물을 떠서 > 돌아갈 때 올라가면 통 아래 말뚝 박아 > 공중에 나무 매어 말뚝이 걸리면 > 그 물이 쏟아져서 홈 속으로 드는구나. > 물레가 빙빙 도니 빈 통이 내려와서 > 또 떠서 순환(循環)하여 주야로 불식(不息)하니, > 인력(人力)을 아니 들게 하여 성가퀴 높은 위에 > 물이 절로 넘어가서 온 성안 거민(居民)들이 > 이 물을 받아 먹어 부족들 아니 하니, > 진실로 기특하고 묘함도 묘할시고. > 지명은 하내주(河內州)[* 가와치국. 지금의 [[오사카부]]에 있던 일본의 옛 지명이다.]요 사십 리 와 있구나. > 이십팔 일 발행(發行)할 새 수백 필 금안준마(金鞍駿馬) > 중하관(中下官)을 다 태우니 기구(器具)도 장할시고. > 각 방 노자(奴子)들도 호사(豪奢)가 참람(僭濫)하다. > 좌우에 쌍견마(雙肩馬)요, 한 놈은 우산 받고 > 두 놈은 부축하고 담배 기구 한 놈 들고 > 한 놈은 등불 들고 한 놈은 그릇 메어, > 한 사람이 거느린 수 여덟씩 들었구나. > 나하고 삼문사(三文士)도 가마 타고 먼저 가니, > 금안(金鞍)진 재고[* 빠르고] 큰 말 거듭말로 앞에 섰다. > 여염도 왕왕 있고 흔할손 죽전(竹田)이다. > 토지가 고유(膏)하여 전답(田畓)이 매우 좋이. > 이십 리 실상사(實相寺)가 삼사상(三使相) 조복(朝服)할 제, > 나는 내리잖고 왜성(倭城)으로 바로 가니, > 인민(人民)이 부려(富麗)하기 대판(大阪)[* 오사카를 가리킨다.]만은 못하여도, > 서에서 동에 가기 삼십 리라 하는구나. > 관사(館舍)는 본국사[* 혼코쿠지를 말한다. 원문에는 봉등사라 되어 있으나 교차 검증하였을 때, 이는 본국사의 오기이다.]요 오층 문루(門樓) 위에 > 여남은 구리 기둥 운소에 닿았구나. > 수석(水石)도 기절(奇絶)하고 죽수(竹樹)도 유취(幽趣) 있네. > 왜황(倭皇)이 사는 데라 사치(奢侈)가 측량없다. > 산형(山形)이 웅장하고 수세(水勢)도 환포(環抱)하여 > 옥야천리(沃野千里) 생겼으니, 아깝고 애달플손 > 이리 좋은 천부(天賦) 금탕(金湯) 왜놈의 기물(器物) 되어, > 칭제(稱帝) 칭황(稱皇)하고 전자(傳子) 전손(傳孫)하니, > 개돼지 같은 비린 유(類)를 모두 다[* 원문에는 "다몰쇽"이라 되어 있는데, 이는 '몽땅 다'를 의미하며 몰속(沒屬)의 뜻은 아니다. 일동장유가에서 자주 쓰이는 표현이다.] 소탕(掃蕩)하고, > 사천 리 육십 주를 조선(朝鮮) 땅 만들어서, > 왕화(王化)에 목욕(沐浴) 감겨 예의국(禮儀國) 만들고져. 일동장유가에서 가장 유명한 부분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시를 ~~ 국어 문제집에서.~~ 접하고 나서 이 시가 전문인 줄 아는데 일동장유가는 총 7158행, 3,500여구에 달하는 장편 기행 기사이다.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여기에 전문을 올려두고 싶지만 여백이 부족하므로 적지 않는다.]] 이 부분은 '''왜황(倭皇)이 사는 데라 사치(奢侈)가 측량없다.''' 라는 시구가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천황]]이 살고 있었던 [[교토]]에서 화자가 본 것들을 서술한 것으로 보인다. 전문을 살펴보면 화자가 간 경로에 있는 율령국들의 이름이 나온다. 본작에서는 율령국의 이름 뒤에 州를 붙여 나타냈으며, 물론 읽을 때는 그 한자의 한국어 독음으로 읽었다. == 여담 == 당대 문헌이 대체로 그렇듯 일본 지명을 일본어 그대로 옮겨적지 않고, 그 한자를 한국어식 독음대로 표기하고 있다. 예를 들면 오사카(大阪)를 '대판' 이라 적었다.[* 도착한 도시나 마을마다 '여기는 우리가 ~(이)라고 부르는 곳인데 왜음(倭音)으로는 ~(이)라 부른다' 라고 [[http://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1394A_0010_070_0010|꼬박꼬박 기록]]한 [[남용익]]이 특이 케이스.] 2000년대부터 일부 왜곡된 번역이 [[인조이재팬]] 등을 통해 일본에도 퍼져 조선이 일본보다 열등했다는 증거랍시고 활용되고 있다.[[https://www.dogdrip.net/dogdrip/84443147|#]] 인조이재팬 이후의 한일 번역사이트들을 보면 한 번쯤은 일동장유가를 인용하는 넷우익의 게시글을 볼 수 있다.[* 물론 현대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일제강점기|약 150여년 뒤 조선이 어떻게 되는지 생각해본다면]] 조금 우스울 수는 있으나, 이 작품이 창작되는 시기를 고려해 보았을 때, 조선이 일본보다 열등하다는 증거가 되기에는 당연히 무리가 있다. 하지만 의견이 분분하기에 논란이 있음 ] [[분류:가사]][[분류:조선의 도서]][[분류:훈민정음]][[분류:100대 한글 문화 유산]][[분류:조선통신사에 관한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