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대한제국의 국권피탈과정)] ||<-3> {{{+1 '''갑오왜란'''}}}[* 가장 많이 사용되는 명칭이지만 교과서에 채택된 용어는 아니다.][br]甲午倭亂[br]Battle of Gyeongbokgung Palace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일본 경복궁.jpg|width=100%]]}}} || ||<-3>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을 묘사한 [[우키요에]] 판화 || ||<-3> '''날짜''' || ||<-3> [[1894년]] [[7월 23일]] 오전 0시 30분 ~ 오후 2시경[* 실질적인 궁궐 내의 저항은 오전 7시경 대부분 중단] || ||<-3> '''장소''' || ||<-3> [[한성부]] [[경복궁]] 일대 || ||<-3> '''원인''' || ||<-3> 일본의 청일전쟁 이전 조선 수뇌부 장악 의도 || ||<-3> '''교전국''' || ||<^|1><-2>[[조선|[[파일:조선 국기(1893).svg|width=23]]]] [[조선]] ||[[일본 제국|[[파일:일본 제국 국기.svg|width=23]]]] [[일본 제국]] || ||<-3> '''지휘관''' || ||<^|1><-2>[[조선|[[파일:조선 국기(1893).svg|width=23]]]] [[고종(대한제국)|고종]] [br] [[조선|[[파일:조선 국기(1893).svg|width=23]]]] [[홍계훈]] ||<^|1>[[일본제국|[[파일:일본 제국 국기.svg|width=23]]]] [[오토리 게이스케]][* 주조선 일본 공사] [br] [[일본 제국|[[파일:일본 제국 국기.svg|width=23]]]] [[오시마 요시마사]][*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의 고조부]|| ||<-3> '''병력''' || ||<^|1><-2>장위영 2천, 통위영 2천, 평양기영 5백, 경리청 5백, 도합 5,000여명 ||<^|1> 오시마 혼성 여단 8,000명[* 그중 직접 전투에 동원된 이는 1천여명] || ||<-3> '''결과''' || ||<-3> [[조선군]]의 무장해제, [[일본군]]의 [[경복궁]] 장악 || ||<-3> '''영향''' || ||<-3> [[흥선대원군]]과 [[김홍집]] 친일 내각 하의 [[갑오개혁]] 실시, 조일동맹조약 체결[* 속방지위를 폐기하고 청일전쟁 시에 조선은 일본에 협력한다는 동맹 협정. 조선은 기존에 청국의 속방이었기 때문에, 청의 주선으로 각국과 수교를 맺었으나 동맹을 맺을 수는 없었다.], [[청일전쟁]] 개전 || ||<-3> '''피해 규모''' || ||<-2> 30여명 사상 || 10여명 사상 || ||
[youtube(hbfeJSu6qu0)]|| || KBS 다큐1에서 재구성한 갑오사변 || [[파일:일본군 경복궁 습격.jpg]] 일본군의 경복궁 공격 전개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4/05/06/2004050670292.html|출처]] [목차] == 개요 == [[한자]] 景福宮占領事件 / 甲午倭亂 / 甲午事變 [*국역 경복궁점령사건 / 갑오왜란 / 갑오사변] [[영어]] Japanese Occupation of Gyeongbokgung Palace / Battle of Gyeongbokgung Palace 1894년 7월, [[청일전쟁]]을 앞두고 [[일본군]]이 경복궁을 기습 점령한 과정에서 있었던 [[조선군]]과의 전투. 갑오년에 벌어진 변고라 하여 당시에는 갑오사변 혹은 갑오왜란 등으로 통칭되었다. 조선 역사상 4번째이자[* [[임진왜란]], [[정묘호란]], [[병자호란]]에 이어 4번째] [[병자호란]] 이후 약 250여년 만에 왕궁이 외적에게 점령당한 대사건이었으나, 이듬해의 [[을미사변]](그 역시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이 수반되었다)의 여파에 의해 상대적으로 대중의 인식에 덜 각인이 된 상태로 남아있다.[* 교과서에서도 언급이 돼 봤자 그냥 '일본군에 의해 경복궁이 점령당하는 사건이 있었다.'정도만 언급되어 있지 조선군과 일본군 사이에 교전이 있었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대다수다.] 경복궁을 점령하고 고종을 포로로 잡은 일본은 [[김홍집]] 내각을 세워 [[갑오개혁]]을 추진하였고, 조선 내에서 일본군의 자유로운 이동을 확보하며 전쟁을 준비하였다. 일본의 경복궁 점령은 [[고종]]과 [[명성황후]]를 비롯한 조선 지도부가 친러 방향으로 노선을 바꾸는 결정적인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하였다. == 배경 == 1894년 [[동학 농민 혁명]]이 벌어진다. 농민 운동의 기세가 거세져 조선의 자체적인 군대로는 막지 못하게 되자 조선은 청나라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청나라는 아산만을 통해 2,800명의 병사를 파병하고 톈진 조약에 따라 일본에게 파병 사실을 알렸으며, 일본은 일본 거류민과 공사관을 보호하기 위해 일정 정도의 병력을 주둔시킬 수 있다는 제물포 조약 조항에 의거하여 8,000명의 병력을 인천만으로 파병했다. 정작 양국의 파병 명분으로 쓰였던 농민군은 외국 군대가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외세에 빌미를 주게 될 것과 그로 인한 궐기 목적의 변질을 두려워해 1894년 6월 6일에 전주 화약을 맺고 해산해버렸다. 이로써 원칙대로면 청나라와 일본 양측 군대 모두 그대로 회군해야 했다. 따라서 조선 조정은 일본과 청나라에게 "동학농민운동은 이제 다 끝났으니 본국으로 돌아가라"고 요구했으나 6월 12일 일본군 혼성 제9여단 선발대[* 제9 혼성여단장은 오시마 요시마사(大島義昌) 소장으로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의 외고조부다.], 6월 16일 혼성 제9여단 4,000명이 제물포에 상륙했다. 이들은 6월 23일 [[한양]]으로 진군해 일부는 [[용산구|용산]]에 주둔하고 일부는 한양 시내를 진군하였다. == 전개 == [[파일:일본군 경복궁.jpg|width=500]] 당시 조선군 경군(京軍) 중 상당수가 [[동학농민전쟁]] 진압을 위해 한양을 비웠던터라 경복궁을 경비하던 병력은 장위영(壯衛營)과 통위영(統衛營) 병력 일부, 평양기영(平壤箕營)[* 장위영(壯衛營)은 [[임오군란]] 이후 조선 중앙군이였던 [[친군영]] 중 전영과 좌영을 통합한 부대로 한양의 방위를 맡았고, 통위영(統衛營)은 친군후영과 우영, 그리고 기연해방영을 통합한 부대로 한양 및 수도권을 위수지역으로 하였으며, 경리청(經理廳)은 통위영에서 구 총융청 병력이 분리되어 창설된 부대로 북한산성 일대에 주둔하였다. 기영(箕營)은 평안감영을 지칭하는 것인데,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경군이 이동하자 정예인 평양 군대가 임시로 한양으로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병력 일부에 불과하였다. 한편 인근 [[북한산성]]에는 경리청(經理廳)이 주둔하고 있었으나, [[경복궁]]까지 거리가 있는터라 일본군이 고종을 사로잡을 즈음에서야 경복궁 주변 지역에 전개된 상태였다.[* 결국 경리청(經理廳) 병사들은 일본군과 교전도 하지 못하고 무장해제 당한다.] 경복궁 기습 점령에 대해 당시 일본은 '경복궁과 그 주변에 있던 조선 군대가 먼저 발포하여' 일본군이 할 수 없이 응전하고 왕궁에 진입했다며 조선 책임설을 주장하였다. 침략의 의도가 아니었다는 해당 주장은 현재까지도 일본의 공식 입장이다. [[https://www.donga.com/news/Culture/article/all/20140207/60639676/1|#]] 하지만 딱 한세기 후인 1994년 일본 후쿠시마 현립 도서관에서 발견된 일청전사 (日淸戰史)[* 당시 일본군 육군참모부 제작]에 의하면 당시 청일전쟁의 구실을 찾던 일본은 조선 정부에 청군 축출을 지시하라며 압박하였다. 그리고 조선이 응하지 않자, 주한 일본 공사 오토리 게이스케는 7월 20일 용산에 주둔 중이던 일본군에게 경복궁 포위를 제안하였고, 그의 주도로 23일 경복궁 습격이 추진되었다. 정리해보면, 갑오사변은 조선군의 자극으로 벌어진 우발적인 충돌이 아니라 치밀하게 짜여진 일본의 조선 수뇌부 장악 계획이었던 것이다. 당시 서울에 주둔한 오시마 혼성 [[여단]]의 병력은 8천 원정군의 절반인 4천 명이었고, 이 중 1천여 명이 경복궁 전투에 동원되었다. === [[영추문]] 전투 === 7월 23일 0시30분, 전날부터 용산에서 밤을 새우며 대기하던 일본군 제5사단 혼성여단장 오시마 요시마사에게 “계획대로 실행하라”는 [[오오토리 케이스케]] 공사의 전보가 도착하면서 경복궁 점령 작전이 실행된다. 새벽 04시경 경복궁을 포위한 일본군은 [[경복궁 영추문|영추문]]을 통해 궐내로 진입하려 하였으나[* 정문인 광화문에서 진입이 시도되었다면 경복궁의 배치도상 약간 북쪽에 위치하는 침전의 왕이 도망갈 시간을 줄 가능성도 있었을 것이다.], 일본군 공병대가 영추문 폭파에 실패하고 돌파가 지연되면서 영추문을 경비하던 평양 기영병(箕營兵)과 일본군 간 교전이 발생하였다. 일본군이 확보하고 있던 첩보에 의하면 한양의 조선군은 대부분 동학농민운동 진압을 위해 내려가 있어 경복궁을 지키는 병력은 얼마되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으나 실제로는 장위영 및 평양에서 온 기영병 군사들이 궁내에서 일부 야영하고 있었고 상당수가 서울 각지에 주둔해 있었다. === [[건춘문]] 전투 === 같은 시간 반대편인 [[경복궁 건춘문|건춘문]]에서도 전투가 벌어졌다. 또한 장위영(壯衛營)이 지키는 광화문 일대에서도 일본군과 장위영(壯衛營) 군사들 사이 치열한 교전이 전개되었다. 새벽 5시가 되자 영추문 인근 평양 기영병(箕營兵)이 제압당하고 일본군이 영추문을 도끼로 부수고[* 혹은 폭파시키고] 궐내로 진입하기 시작하였다. 광화문에 있던 장위영(壯衛營) 병사들 역시 일본군에게 돌파당하고 만다. 이 때 첩자를 투입해 조선군을 속이는 등 공작을 통해 진입한 [[일본군]] 병력이 [[경복궁]] 안에서 함성을 지르면서 조선군이 겁을 먹어 스스로 붕괴되었다고 잘못 알려지기도 했으나, '''실제 조선군은 경복궁 안팎에서 아침까지 만만찮게 저항했다.'''[* 애초에 일본 쪽 기록에서 조선군을 '''그냥 쫓아냈다'''고 기록된 문서가 있는 것을 보면 일본 측에서 [[프로파간다]] 목적으로 거짓 기록한 것이 대중들에게 알려진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격전 끝에 오전 7식 경, 야마구치 케이조 소좌가 지휘하는 일본군 2대대 병력 일부가 [[고종(대한제국)|고종]]의 신병을 확보하였다. 일본 공사 오오토리 케이스케(大鳥圭介)와 함께 입궁한 2대대장 야마구치 케이조 소좌는 칼을 빼들고 고종을 위협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 위조된 칙령과 무장해제 === 고종이 붙잡히고도 전투가 끊이질 않고 오히려 외곽에 있던 경리청과 기영병 군사들은 야포까지 끌고와 궁궐을 포위하려고 했다. 이에 [[김가진]]과 [[안경수]]가 고종의 가짜 명령서를 만들고 홍계훈을 협박해서 조선군을 무장해제시킨다. ‘일청전사 초안’은 그때 조선군의 발포가 “오후 2시에 이르러서도 그치지 않아 국왕이 사자(使者)를 보내 조선군의 사격을 저지시키자 비로소 총성이 완전히 끊어졌다”면서 조선군의 격렬했던 저항을 기록하고 있다.[[https://www.google.co.kr/amp/s/mnews.joins.com/amparticle/3695868|#]] '무기를 버리라.'는 김가진의 가짜 왕명이 전달되자 이들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통곡하며 해산하였다. 일부 병사들은 스스로 자신의 소총을 파괴하고 군복을 찢을 정도였다. 평양 기영병(箕營兵)들은 일본의 압박에 [[평양부]]로 돌아갔고, 한양에 있던 장위영(壯衛營), 통위영(統衛營), 경리청(經理廳) 병력은 모두 무장해제당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은 소총 3천 정과 야포 20문, [[개틀링 기관총|회선포]] 8정을 압수했다. === [[흥선대원군|대원군]]의 귀환 === 경복궁에서 전투가 이어지던 23일 새벽 2시, 일단의 일본군이 [[운현궁]]으로 몰려들었다. 그중 일본 공사관의 오카모토와 흥선대원군의 심복 정운봉은 7년여간 은둔하던 대원군에게 '구국'에 나설 것을 청하였다. 고민하던 대원군은 구면인 일본 공사관의 서기관 스기무라 후카시에게 오토리 공사를 대신하여 조선 영토를 요구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받아낸 후, 재집권에 동의하였다. 날이 밝고, 총성이 잦아들자 대원군은 일본군의 호위 하에 경복궁에 입궁하였다. 하지만 약 20여년 만에 재집권한 대원군은 일본이 민심을 통제하기 위한 얼굴마담에 불과하였고, 그를 국정에서 배제하였다. 이에 대원군은 청군과 동학농민군에 밀서를 보내어 항일 연대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결국 다시 실각하였다.[* 그후 이듬해 [[을미사변]] 때에 대원군은 재차 일본군의 얼굴마담으로써 형식적으로 재집권했으나 역시나 곧 밀려났고, 이것이 그의 4번째이자 마지막 집권이었다.] == 영향 == >우리는 총소리에 잠이 깼다. 그리고 대궐이 일본군에 점령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외국인들, 조선 사람들 모두 크게 흥분했다. (중략) 신분의 높낮이를 가릴 것 없이 조선 사람들은 엄청난 공포에 빠졌다. 많은 양반들이 자기 집에서 도망쳐 나와 온갖 구실을 붙여 외국 공사관이나 시골로 피난을 떠났다. 평민들은 ‘떼를 지어서 시골로’ 떠났다. 가게란 가계는 모두 문을 닫았고, 도시는 마치 돌림병이 번진 것처럼 보였다. 입을 꾹 다물고 잔뜩 두려움에 질린 표정으로 급히 발걸음을 옮기는 남자, 여자와 가마, 조랑말의 무거운 행렬이 중앙통을 지나 성문 밖으로 끊임 없이 흘러 나갔다. 어린애들의 애처러운 모습도 숱하게 보였다. 부모들이 매정하게 버렸거나 사람들 속에서 부모를 잃어버린 아이들이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하고 혼자서 종종걸음을 치고 있었다. >ㅡ 당시 서울에 있던 릴리어스 호튼 (Lillias Horton)[* 미국인 선교사 [[호러스 언더우드]]의 부인]의 ‘언더우드 부인의 조선견문록’ 中 [*출처 [[http://www.atla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708]]] 언더우드 부인의 회고록에 의하면 당시 한양은 충격과 공포에 휩쌓였고, 유사 전쟁 분위기 그 자체였다. == 그 후 == [[파일:청일전쟁 일본군 성환 전투.jpg|width=800]] 사건 얼마 후 중국에서 발간된 삽화. 고종[* 좌측 하단에 묘사됨]을 사로잡는 일본군과 성환 전투 일본군은 효창원 일대(효창공원)를 숙영지로 삼아 기지를 두고, 만리창에 임시사령부를 둔 뒤 [[김홍집]]의 친일 내각을 구성하고 청나라로부터의 독립 선언을 하라는 등 [[갑오개혁]]을 하도록 요구하였다.[*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는 조선을 자신들의 속방으로 규정했다. 이는 나중에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나온 조선의 독립국 문제에 대한 명시에서의 목적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게다가 독립을 한 이유도 조선에서의 청나라의 종주권을 박탈하기 위한 것일 뿐, 실제로 '''조선을 독립국으로 만들 생각 따위는 전혀 없었다'''. [[독립협회|독립 협회]]를 비롯한 많은 수의 조선의 지식인들이 이 말에 속아 [[러일전쟁]] 때까지 일본을 응원했고, 1905년 11월에는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 그리고 8월 26일 조선의 [[김홍집]] 내각을 통하여 서양의 내정 간섭 및 청나라의 무력 개입을 막는다는 명분과 동시에 조선은 일본에 협력한다는 조일 양국 맹약을 맺게 된다. 이는 조선 내 일본군의 활동이 매우 자유로울 수 있었던 기반으로 작용한다. 한편 조선군은 무장해제당하기 전 (일본에게 넘겨주지 않기 위해) 일부 무기를 스스로 파괴하하였고, 일본군은 압수한 조선군 무기는 연못에 던져버려 고장나게 하였다. 이후 경복궁 수비를 맡게 된 시위대는 이 총기를 건져다가 다시 무장했는데, 이 때문에 다음해 [[을미사변]] 때 또 경복궁에 처들어온 일본군과 전투할 때 궁궐을 호위하던 상당수의 시위대의 무기가 격발이 안되는 등 전투력 저하의 원인이 된다. 전투 이후 [[일본군]]은 '병사를 잡입시켜 궁궐 내에서 함성을 질렀더니 이에 겁을 먹은 조선군이 항복했다.'나 '우리 군이 왕궁에서 조선군을 쫒아냈다' 같은 식의 [[프로파간다]]를 퍼트렸다. 이 프로파간다는 상당히 잘 먹혔는지 상단의 청나라에서 그려진 삽화도 단지 도망치는 고종과 관리들만이 표현되어 있고 조선군과 일본군의 전투는 일절 묘사되어 있지 않으며 현대 한국의 교과서에도 해당 사건이 고작 '청일전쟁 직전에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했다' 정도로 언급되어 있는 것의 원인으로도 보인다. 1888년에 설치되었던 일종의 사관학교인 연무공원이 일제의 경복궁 점령 때 총기를 폐기당하여 사실상 폐지되었다. == 명칭 문제 == 이 사건에 대해서는 흥미롭게도 [[을미사변]]이나 다른 것들과 달리 분명한 명칭이 없어서 "경복궁 전투", "경복궁 쿠데타"나 "경복궁의 변"과 같은 불명확한 용어를 쓰고 있다. [[민영환]]은 1900년에 세운 장충단비에 ''''갑오사변''''(甲午事變)이라 하였고,[[https://ko.wikipedia.org/wiki/%EC%9E%A5%EC%B6%A9%EB%8B%A8%EB%B9%84|#]] 1983년 김경창은 '甲午倭亂 : 甲午,こ未,こ巳,경성의 궁중왜란'이란 책에서 ''''갑오왜란''''(甲午倭亂)을 [[https://library.yonsei.ac.kr/search/detail/CATTOT000000999405|#]][* "こ未,こ巳"는 아마도 "乙未(을미), 乙巳(을사)"가 [[OCR]] 과정에서 잘못 인식되어 등재된 제목으로 보인다.] 1988년 김상기는 〈甲午義兵의 歷史的 展開와 性格〉이란 논문에서 ''''갑오변란''''(甲午變亂)이라 칭하였다.[[http://db.history.go.kr/download.do?levelId=kn_036_0030&fileName=kn_036_0030.pdf|#]] 황태연은 2017년 '갑오왜란과 아관망명'에서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으로 ''''갑오왜란''''이 벌어졌고 이에 반발해 일어난 2차 동학농민운동도 포함한 항일운동이라 저술하였다.[[http://www.yes24.com/Product/Goods/35081339|#]] 중앙일보는 2017년 기사에서 일본군의 경복궁 침공으로 '갑오왜란'이 시작되었다고 하였다.[[https://news.joins.com/article/21839161|#]] 다만 ~[[왜란]]이라는 명칭이 중립성이 결여되어 있는 명칭이다 보니 거부감을 갖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이들은 갑오사변, 경복궁 전투등의 명칭을 병행하기도 한다. == 기타 == 위키백과에서 해당 사건이 문서화 되어있는 버전은 [[https://en.wikipedia.org/wiki/Japanese_occupation_of_Gyeongbokgung_Palace|영어판]] 밖에 없으며 한국어판에서는 청일전쟁 문서에 잠깐 언급되는 것이 전부이다. 워낙 당시 [[일본군]]의 거짓 선전으로 왜곡된 사건이기도 하고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워낙 알려지지 않는 사건이다. 보니 어느 매체에서나 그냥 전투가 있었다는 언급도 없이 그저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했다.' 정도만 언급되어 있는 것이 전부다. == 대중 매체 == 잘 알려지지 않은 사건인데다 뚜렷한 명칭도 만들어지지 않은 사건이다 보니,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을 다루는 매체는 많지 않다. 다만 사극으로 다루기에 매우 좋은 소재이기에, 향후 직접적으로 다루어질 여지가 많다. 가장 최근 매체로는 [[동학농민운동]]을 다루는 드라마인 [[녹두꽃]]이 있는데 조선군의 일제사격 도중에 선두에서 뜬금 폼을 잡듯이 서있는 조선군 지휘관의 모습이나, 한성에 있을 리가 없는 [[전봉준]]을 포함한 동학군이 궁내로 침입한 일본군을 상대로 [[무쌍]]을 찍는다거나, 싸우는 도중에 정말 뜬금없이 '''[[주걱]]과 [[몽둥이]]를 들고 전투에 난입하는 [[궁녀]]들과 [[신하]]''' 등 격렬하게 싸우는 조선군과 일본군이 아닌 괴상한 영웅놀이 무쌍물로 연출했다는 비판이 많다.[* 또한 작중에서 백성들이 일본군에게 항의하거나 통곡하는 장면과 그대로 의병을 일으켜서 전투에 난입하는 장면도 현실성 제로, 상술한 미 선교사의 증언 부분에도 나와있듯이 당시 한양 전체가 전시 상황급이였으므로 한성에 거주하던 백성들은 일본군에게 항의는 커녕 짐싸들고 지방으로 피난떠나기 바빴다. 즉 앞서 말한 주걱과 몽둥이들 들고 난입하는 궁녀와 관리들 처럼 '애국적이거나 용감한 조선 백성들'을 보여주기 위한 [[애국 마케팅]]성 왜곡 연출이다. 다만 이러한 '일제에게 항의하는 민중' 연출은 타 사극 매체에서도 출기차게 써온 연출이라 그나마 쉴드는 된다.] 다만 그 외의 연출과 처절하게 싸우는 조선군의 모습은 잘 표현했고 무엇보다 해당 사건을 다룬 몇 안되는 사극이기에 더욱 주목받았다.[[https://youtu.be/3TgEBW4GE7o|#1]], [[https://youtu.be/7Ho0-3AHR5k|#2]], [[https://youtu.be/3PqkfJ6e7JM|#3]], [[https://youtu.be/1UmkEDg_6_E|#4]] [[대체역사소설]] 조선에는 쿠데타가 필요해요가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 참고 자료 == * 저서 * <1894년,경복궁을 점령하라> (나카츠카 아키라, 박맹수 역, 2002) * 논문 * <1894년 일본군의 조선왕궁(경복궁) 점령에 대한 재검토> (조재곤, 2016) * 기고문 *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4/05/06/2004050670292.html|조선일보 칼럼]] * [[https://h21.hani.co.kr/arti/special/special_general/14637.html|한겨레 칼럼]] == 관련 문서 == * [[청일전쟁]] * [[갑오개혁]] * [[을미사변]] [[분류:조선(19세기)]][[분류:고종 시대/사건 사고]][[분류:1894년 전투]][[분류:조선/전쟁 및 전투]][[분류:조일관계]][[분류:한일관계]][[분류:일본사/전투]][[분류:시가전]][[분류:경복궁]] [각주][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청일전쟁, version=8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