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송나라/인물]][[분류:허쩌시 출신 인물]] [include(틀:송사)] [목차] == 개요 == 任中正 [[북송]]의 관료로 자는 경지(慶之). == 생애 == 조주(曹州) 제음현(濟陰縣) 출신으로, 임중정의 아버지 임재(任載)는 우습유(右拾遺)를 지냈다. 임중정은 진사에 급제하여 지주(池州) 추관(推官)을 지냈고 대리평사(大理評事), 소주통판(邵州通判)을 역임하였으며, 태부시승(太府寺丞), 복주통판(濮州通判)으로 전임되었다. 뒤에 한림학사 전약수가 임중정을 천거하여 비서성 저작좌랑, 대명부통판(大名府通判)으로 옮겼다. 전운사(轉運使) 진위(陳緯)가 섬서(陝西)로 부임하면서 임중정을 자신의 대임으로 천거하자, [[태종(송)|태종]]은 >짐은 당연히 임중정을 알고 있소. 라고 말하고 임중정을 불러들여 비서승, 강남전운부사(江南轉運副使)로 삼았다. 임중정은 몸이 늘씬해서 태종이 직접 임중정에게 큰 홀을 하사했고 길쭉한 붉은 옷을 골라 임중정에게 내렸다. 임중정이 강남에 부임할 때는 마침 풍년이라서 세금과 양식이 모두 풍족했다. 발운사(發運使) 왕자여가 이를 수도로 조달하려고 하자, 임중정은 >동남쪽은 해마다 500만 석에 달하는 식량을 수송하는데 강남에서 과반을 내고 있습니다. 금년은 식량이 남지만 혹여 작황이 흉작이고 수확도 좋지 못하면 우리 백성들에게 해가 갈 것입니다. 라고 말하여 왕자여는 결국 수도로 조달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뒤에 임중정은 감찰어사, 양절전운사(兩浙轉運使)로 전임되었다. 백성들이 기근에 빠지자, 임중정은 조칙을 기다리지 않고 창고를 열어서 백성들을 진휼하였으며, 진주(晉州)에서 성량(盛梁)의 사건을 심판하였다. 임중정은 뒤에 전중시어사, 판삼사빙유사(判三司憑由司)로 옮겼지만 성량과 친한 어떤 이가 몰래 임중정을 중상하여 형호전운사(荊湖轉運使)로 전출되었다. 이후 좌사간(左司諫), 직사관(直史館), 지자주(知梓州)로 옮겼으며, 추밀직학사(樞密直學士)로 발탁되고 [[장영(북송)|장영]]을 대신하여 지익주(知益州)가 되었다. 임중정은 5년 동안 익주에게 있으면서 전임자인 장영의 법령을 따랐다. 뒤에 지심형원(知審刑院)을 맡고 지병주(知幷州)로 전출되었으며, 급사중(給事中), 권지개봉부(權知開封府)로 옮겼다. 1016년, 상서공부시랑(尙書工部侍郞)·추밀부사(樞密副使)로 임명되었다. 1017년 마지절(馬知節)이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로 임명되자, 임중정은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 전임되었다. 1020년, 조이용이 추밀사로 임명된 뒤 임중정은 다시 추밀부사가 되었고 같은 해 병부시랑(兵部侍郞),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진위되었다. [[진종(송)|진종]]의 아들 조정이 태자로 책봉된 뒤 임중정은 상서우승(尙書右丞)의 신분으로 태자빈객(太子賓客)을 겸임하였고, 1021년 공부상서(工部尙書)로 옮겼다. 1022년 진종의 태자 조정이 즉위하니 이가 제4대 황제 [[인종(송)|인종]]이었다. 인종이 즉위한 뒤 임중정은 병부상서(兵部尙書)로 임명되었다. 임중정은 본래 [[정위(송)|정위]]와 친분이 있었는데, 정위가 좌천될 때 임중정은 홀로 정위를 비호하여 태자빈객, 지운주(知鄆州)로 좌천되었다. 또한 임중정의 아우인 상서병부원외랑(尙書兵部員外郞)·판삼사염철구원(判三司鹽鐵勾院) 임중행(任中行)과 우정언(右正言) 임중사(任中師)도 모두 여기에 연루되어 좌천되었다. 모친이 연로하자 임중정은 자신의 고향인 조주(曹州)로 옮겼고 예부상서(禮部尙書)로 전임되었다.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로 추증되었고 강의(康懿)라는 시호를 받았지만 언제 죽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처음 임중정의 모친이 궁중으로 들어가 진종을 알현할 때 진팽년, 왕증, 장지백의 아내와 함께 진종을 알현했는데, 진종은 임중정의 모친을 앞에 앉히고 자리를 내주었다. 임중정은 부모에게 극진히 효도했고 소박하게 생활했지만 음식은 매우 풍부하게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