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fff {{{+1 자오위안런}}}[br]趙元任[br]Yuen Ren Chao[br]ㄓㄠˋ ㄩㄢˊㄖㄣˋ[* [[주음부호]] 표기][br]Zhào Yuánrèn[* [[한어병음]] 표기]}}}''' || ||<-2>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external/photocdn.sohu.com/Img335861709.gif|width=100%]]}}} || ||<|2> '''{{{#fff 출생}}}''' ||[[1892년]] [[11월 3일]] || ||[[청나라]] [[톈진시|톈진]] || ||<|2> '''{{{#fff 사망}}}''' ||[[1982년]] [[2월 25일]] (향년 89세)|| ||[[미국]] [[매사추세츠|매사추세츠 주]] [[케임브리지(미국)|케임브리지]] || || '''{{{#fff 국적}}}''' ||[[청나라|[[파일:청나라 국기.svg|width=20]] 청나라]] → [[중화민국|[[파일:대만 국기.svg|width=20]] 중화민국]], [[미국|[[파일:미국 국기.svg|width=20]] 미국]](복수국적) || || '''{{{#fff 학력}}}''' ||[[코넬 대학교]] {{{-2 (B.A.)}}}[br][[하버드 대학교]] {{{-2 (Ph.d)}}}|| || '''{{{#fff 직업}}}''' ||[[언어학|언어학자]], [[수학자]], [[물리학|물리학자]], 작곡가 || [목차] [clearfix] == 개요 == [[중국]]의 [[언어학|언어학자]]이자, [[수학자]]로 [[중국어]] 표음화의 기틀을 닦은 인물 중의 한 사람이다. 비록 현재도 중국어는 그대로 [[한자]]로 표기하고 있으므로 그의 꿈은 사실상 실패한 셈이지만, 그래도 후술할 그의 업적인 [[국어라마자]]를 이어 [[주음부호]]와 [[한어병음]] 표기가 등장하여 현재까지 한자의 발음 기호로나마 쓰이고는 있으므로 어느 정도의 성공은 거둔 셈이었다. == 생애 == [[청나라]] 말기인 [[1892년]]에 [[톈진]]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상은 [[장쑤성]] 출신이었다가 톈진에 정착한 사람이었다. 자오위안런은 [[1910년]]에 강자북관장학금[* [[의화단 운동]]을 계기로 창설된 장학금이었다.]의 장학생으로 선정되어 [[미국]]의 [[코넬 대학교]]로 유학을 갔고, 그곳에서 [[물리학]]과 [[수학]]을 전공하였다. 이 무렵에 그는 [[철학]]에 심취하기도 하여 [[하버드 대학교]]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수여받았다. 그 이후, [[언어학]]과 [[음악]]에 관심을 보이기도 했는데, 이때 그는 모국어인 [[중국어]] 이외에도 [[영어]]와 [[프랑스어]], [[독일어]]와 약간의 [[일본어]]는 물론, [[고대 그리스어]]까지 능숙한 그야말로 당대의 먼치킨이었다. [[1920년]]에는 [[중국]]으로 돌아가서 [[칭화대학]]에서 [[수학]]을 강의하다가 1년만에 돌아갔는데, [[1925년]]에 다시 [[중국]]에 되돌아왔고 이때 [[생활의 발견]]의 저자로 유명한 [[린위탕]]과 함께 [[국어라마자]]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유명한 언어유희 시인 [[시씨식사사]]도 이때 처음 발표했다. 당시에 [[중국어]]의 구어와 문어를 일치시키자는 운동인 [[백화문]] 운동이 일어났는데 [[중국어]] 백화문은 [[로마자]]로 표기해도 괜찮지만, 전통 [[한문]]은 로마자로 표기하기에 불합리하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서 일부러 성조만 다른 shi 음만으로 된 시를 지은 것이다. 덕분에 현대의 [[표준중국어]]는 이 백화문을 중심으로 문어를 정리했다. [[1920년]]에 물리학자인 양부웨이와 결혼하였고, 그 이후 [[중국]]에 정착해 살면서 이른바 [[신문화운동]][* [[신해혁명]] 이후 중국의 구습들을 타파하려는 계몽 운동이었다. [[브나로드 운동]]의 중국 버전인 셈이었다.]에 열을 올렸다. [[1938년]]에는 다시 [[미국]]으로 갔는데, 이때 하필이면 [[중일전쟁]]이 발발한 바람에 [[1945년]]까지 미국에서 돌아오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 사이 자오위안런은 미국 언어학회의 학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45년 이후로 중국으로 돌아가려고 하였으나 [[국공내전]]이 일어나 못 돌아가고 있다가 [[1949년]]에 [[마오쩌둥]]에 의해 중국이 공산화되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지자, [[중화민국]]의 지지자였던 자오위안런은 귀국을 단념하고 [[1954년]]에 정식으로 미국에 귀화했다[* 1950년대부터 [[타이완 섬]]으로 들어간 중화민국은 [[이중국적]]을 허용했기 때문에 중화민국 국적도 유지하였다.]. [[1966년]]에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캠퍼스]]의 교수로 임용되자 이곳에서 [[언어학]] 연구에 매진하였고, 모국인 [[중국]]은 잠깐 동안 몇 번 방문하기만 했을 뿐, 끝내 중국으로 되돌아가지 않다가 [[1982년]]에 [[매사추세츠]] 주의 케임브리지에서 사망하였다. == 기타 == 자오위안런은 언어학자로 유명하지만, 다른 분야에서도 비상한 재능을 보였다. 예를 들면, [[철학]]과 [[수학]]에 관심이 많아 [[버트런드 러셀]]의 저서들을 [[중국어]]로 번역하기도 했고, [[칭화대학]]의 강사로 재직하던 시절에는 [[물리학]]을 연구하고 있었다. 거기에다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몇몇 곡을 스스로 작곡하기도 했고, [[예일 대학교]]와 [[하버드 대학교]], [[하와이 대학교]] 등을 돌면서 음악학을 강의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문과]], [[이과]], [[예체능]]을 모두 섭렵한 후덜덜한 천재였다. [youtube(UceaEkSnAGk)] 그가 멜로디를 붙이고 직접 부른 教我如何不想他(내가 어찌 그녀를 그리지 않을 수 있는지 알려 주오). [[분류:청말의 인물]][[분류:중국의 언어학자]][[분류:중국의 수학자]][[분류:미국의 언어학자]][[분류:미국의 수학자]][[분류:중국의 물리학자]][[분류:미국의 물리학자]][[분류:중국계 미국인]][[분류:미국으로 귀화한 인물]][[분류:복수국적자]][[분류:1892년 출생]][[분류:1982년 사망]][[분류:톈진시 출신 인물]][[분류:코넬 대학교 출신]][[분류:외성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