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Les_Clayes_sous_Bois_Monument_Jean_Moulin.jpg|wid=250&height=300]] 레클레스부아에 세워진 그의 추모 비석|| '''Jean Moulin''' (장 물랭) [[1899년]] [[6월 20일]] ~[[1943년]] [[7월 8일]] [목차] == 개요 ==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프랑스]] 내부의 [[레지스탕스]]를 상징하는 전설적인 지도자. [[드골]]의 정치적인 은인이기도 하다.[* 좌우를 통합하여 이루어진 레지스탕스의 회합에서 드골을 [[자유 프랑스]]의 지도자로 추대하기로 이끈 것이 바로 물랭] == 생애 == === 초기 === 1899년 프랑스 남부의 베지예에서 지질학자의 아들로 태어난다. 그가 평생토록 유지한 정치적 신념인 [[공화주의]]는 바로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라고 한다. [[1918년]] 막바지에는 [[공병]]으로 입대하였지만 그가 기초 훈련을 받는 사이에 이미 [[제1차 세계 대전]]은 종결되었다. 종전 후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는 한편으로 지방에서 행정경험을 쌓기도 했는데 1925년에는 당시 역대 최연소의 나이로 [[군수]]에 임명되는 기록을 쌓기도 했다. 게다가 미적으로도 꽤나 재능이 충만했는데[* 특히나 에칭같은 [[판화]]는 거의 전문가 수준이었다.] 이 소질을 잘 살려서 신문에 정치적인 [[풍자]] [[만화]]들을 연재하기도 했다. === 2차 대전: 레지스탕스의 상징 ===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이후로 물랭은 기갑부대에 입대신청을 했지만 시력과 공직자라는 그의 신분이 문제시되어 불합격한다. [[1940년]] [[6월]] 프랑스가 단 6주만에 나치 독일에게 점령당했을 당시 그는 에르-외-루아르의 시장으로 재직중이었다. 1940년 7월에 [[게슈타포]]는 그를 체포하여 구금하는데, 그가 [[세네갈]]에서 온 [[프랑스 외인부대|외인부대]]가 [[민간인]]들을 학살했다[* 당연히 실제로는 독일군이 행한 짓.]라는 거짓된 문서에 서명하기를 거부했다는 것이 그 이유. 감옥에서 그는 부러진 유리 조각으로 자신의 목을 찔러 자살 기도를 하는데, 이 때 생긴 흉터를 감추기 위해 늘 목에 두르고 다녔던 스카프는 그와 [[레지스탕스]]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한다. 이후 [[비시 프랑스]] 정부에 의하여 해임[* 정확히 표현하자면 비시 프랑스가 모든 좌익 계열의 시장들로 하여금 사임할 것을 요구하자 물랭이 이를 거부했다. 그리고 비시 정부는 쿨하게 그를 짤랐다.]된 물랭은 낙향하여 레지스탕스에 가입한다. [[1941년]] 9월 몰래 [[런던]]으로 잠입한 물랭은 그 곳에서 [[샤를 드 골]]을 만나고 정치적 이념에 따라 사분오열되어있던 레지스탕스를 하나의 조직으로 통합하라는 임무를 수여받는다. [[1943년]] [[5월 27일]] 모든 정치 계파가 참여한 가운데 파리에서 열린 전국저항평의회로 물랭의 노력은 마침내 결실을 맺는다. 레지스탕스의 통합과정과 배경 및 결과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75&contents_id=11755|해당 링크]]를 참조하자. === 죽음 === 하지만 이러한 노력이 결실을 거둔지 불과 한 달 정도가 지난 1943년 6월 21일에 그는 리옹 교외의 어느 집에서 비밀 회의를 열다가 다른 레지스탕스 지도자들과 함께 게슈타포에게 체포된다. 리옹 내 게슈타포의 총 책임자였던 [[클라우스 바르비]]에 의하여 가혹한 고문[* 두들겨패는 건 당연히 기본이고 손톱 밑에 못을 쑤셔넣는다던지 손을 문 틈에다 끼워넣고 관절이 으스러질때까지 계속 찧는 행위도 자행됐다.]을 받은 그는, 추가 심문을 위해[* 여담으로 그토록 가혹한 고문을 받던 와중에도 레지스탕스와 관련된 어떠한 정보도 발설하지 않았다고 한다. 정말 대단한 정신력의 소유자.] 독일로 이송되던 중 고문의 후유증으로 사망하고 만다.[* 후일 체포된 클라우스 바르비는 자기의 고문 탓이 아니라 전에 행했던 자살로 인한 상처가 악화되어 사망했다고 주장했지만, 당연히 사람들의 반응은 '헛소리네' 정도.] 그의 시신은 끝내 찾지 못했지만 그의 가묘가 1964년 [[팡테옹]]으로 이장된다. == 배신자는 누구인가? == 그 날 게슈타포의 습격을 가능하게 했던 레지스탕스 내부의 배신자가 누구였는지는 아직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 날 물랭과 함께 [[게슈타포]]에 체포되었다가 곧 석방된 르네 하디가 배신자로 지목되었지만 본인이 부인하였고 재판에서도 그는 무혐의를 선고받았다. 또한 레지스탕스 내에서 드 골의 대변자 역할을 맡았던 물랭과 자주 갈등을 빚은 공산주의 계열을 배신자로 지목하는 주장이 최근에는 힘을 얻고 있다. 신빙성은 떨어지지만 [[클라우스 바르비]] 본인도 전쟁 40년후 프랑스로 인도되어 재판을 받던 중에 당시 레지스탕스 내 공산계열 지도자였던 레이몽 오브라가 밀고자였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어쨌든 정확한 진실은 저 너머에 있다. == 둘러보기 == [Include(틀:프랑스 2 선정 위대한 프랑스인)] [[분류:프랑스의 남성 정치인]][[분류:1899년 출생]][[분류:1943년 사망]][[분류:베지에 출신 인물]][[분류:몽펠리에 대학교 출신]][[분류:팡테옹 안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