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송사)] [목차] == 소개 == 張珏, ? ~ 1280 자는 군옥, [[남송]] 말 항[[원나라|원]] 명장이자 민족영웅. 농서(龍西) 봉주(鳳州)[* 현 섬서 펑 현 동북부] 사람들은 '''사천 노장'''이라 불렸다. 1259년 [[왕견]]의 수하로 그와 함께 [[조어성 전투|조어성에서 몽골군을 격파한 뒤]], 1263년 합주 수장으로 성을 지키며 천촉을 되찾을 기회를 노린다. 이후 1279년 [[육수부]]를 찾아 재기를 도모하기 위해 애산에 사람을 보냈지만 애석하게도 [[애산 전투|송군은 애산에서 전멸하여]] 실패한다. 1280년 대도로 압송되던 와중 안서의 어느 변소에서 목을 매어 죽는다. == 생애 == 섬서 봉상 현 출신으로, 평민 출신이었다. 그가 태어난 때는 몽골군과의 항전이 지속되고 있었는데, 그는 전란을 피해 가족들을 따라 뿔뿔이 흩어졌고, 많은 혈육들이 도망치다가 죽거나 흩어졌다. 어려서부터 그의 가슴은 몽골인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차 있었다. 18세에 합주(合州)[* 지금의 충칭 허촨]의 신주둔지인 조어성(釣魚城)[* 지금의 허촨 동북부]에 입대하여 여러 차례 군대에 갔다. 전공을 세워 중군도 통제에 올라 '''사천노장'''이라 불렸다. [[이종(송)|이종]] 보우 말년(1258), 몽골 군대가 사천으로 쳐들어와 길평간을 무너뜨리고 장녕산(長寧山)을 함락시켰다. 사천 창계의 수장 왕좌 부자를 죽이고, 낭주[* 지금의 사천 낭중]에 이르러 수장(守將) 양대연(楊大淵)은 항복했으며 조광(趙廣)은 순국하였다. 봉주[* 지금의 쓰촨성 펑안]에 이르러 수군장 장대월(張大悅) 또한 항복하였다. 이로써 성도를 비롯한 사천 지역의 대부분이 몽골 군대에 점령당하였다. 1259년 조어성에서 전투가 시작되었고, 몽골과 각 도의 군대가 합주를 포위 공격하였다. 몽골군이 온갖 공성병기를 동원해 성을 공격하였으나, 장각은 부장으로서 주장 [[왕견]](王堅)과 9개월 동안 조어성(釣魚城)을 지키며 몽골군의 침공을 여러 차례 물리쳤고, [[몽케 칸|몽케]]는 조어산 아래에서 부상을 입고 죽고 몽골군은 퇴각하였다. 1260년 왕견이 합주를 떠나자 조정에서는 마천이 흥원(興元, 지금의 산시 한중) 도통(都統)이 되었다. 겸지합주(必知合州)로 정정(景定) 4년(1263)에 마천(馬千)의 아들이 호상산(虎相山)으로 군비를 보내고 몽고병에게 잡혀 항복을 권고하자 마천은 흔들렸고, 조정은 장각을 합주지주로 임명하였다. 장각은 위용과 권모술수가 있고 병사를 잘 썼으며 기이한 병사를 일으켜 매복하였으나 계략은 실책이 없었다. 10월 흥원부(지금의 섬서 한중)의 제군도통제 겸 이주(지금의 사천 광원)로 승진하였고, 무사와 합주지주를 겸했다. 취임 후 농업 생산을 재개한 뒤, 병사를 훈련시키고, 병기를 적극적으로 정비하고 합주를 방어하기 위한 준비를 철저히 했다. [[쿠빌라이 칸|쿠빌라이]]는 몽골의 대칸을 계승한 후 송(宋)을 공격하여 조어성을 포위, 고립시키고 중병을 파견하여 대량평(大良平)을 차지하였다. 지금의 쓰촨성 광안), 호상산성을 증축하고, 수시로 출병하여 양산군(지금의 충칭 량핑)과 충주(忠州, 지금의 충칭 충현), 만주(萬州, 지금의 충칭 완저우), 개주(開州, 지금의 충칭 카이현)를 공격하였다. 달주(達州, 지금의 쓰촨 달주)에서는 농민들이 농사를 짓지 못하고 사졸들이 쉬지도 못하여 군량을 거주(居州, 지금의 쓰촨 거 현)까지 운반할 때마다 송은 몇 군대의 병력을 호송하여 두 성 아래서 싸워야만 들어갈 수 있었다. [[도종(송)|도종]] 함순 2년(1266) 11월, 부장 소장과 왕립이 50명의 결사장사를 거느리고 대량평산성, 호상산성을 탈환했다. 함순 3년(1267) 4월, 몽골군 수만 명이 충칭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합주성 아래를 통과하였다. 장각은 방룡계(方龍溪)에서 배를 강물에 정박한 뒤 강물을 차단해 수성을 쌓고 저항해 수만 명의 몽골군의 공세를 또 꺾었다. 합주(合州)는 일찍이 염진, 염박 형제의 책략으로 군사를 조어산으로 옮긴 이래 성곽이 견고해졌다. 그러나 개주(開州)·중경(重慶)이 병화를 당해 백성들이 어려움을 겪었고, 장각은 대외적으로는 군대로 농사를 지으며, 안으로는 백성들에게 논밭을 일구어 식량을 비축하도록 가르쳤고, 두 달도 안 돼 공적·사적 유용성을 겸비했다. 1271년에 쿠빌라이는 국호를 [[원나라|대원]]이라 고치고, 수도를 대도로 정하고(현재의 [[베이징시]]), 한족의 전통을 채택했다. 경제문화 사상 체계가 남송에 대항하여 남송 관리 사졸을 마구 무마하고, 유민들이 모여들어 보는 것조차 중상하며, 투항한 관리를 중용하여, 대송 전투는 봉건 왕조가 바뀌는 전쟁으로 바뀌었다. 성도에 사천행성을 두고 중병으로 징후를 진격하면서 사천의 군정을 잘 아는 남송의 항장 [[유정(원나라)|유정]]이 진격, 투항을 권유하고, 조어성(釣魚城), 중경(重慶)에 대한 포위망을 좁혀 중경(重慶)과 조어성(釣魚城)의 통로를 차단해 파국을 노리고 있다.북쪽으로는 청거(靑居, 지금의 쓰촨 남충동남)에서 한초(漢初, 지금의 쓰촨(四川) 무승현 열면 진한초촌), 정원(定遠, 지금의 쓰촨 무승)까지 밀고 나가 무승군을 세웠다. 함순 8년(1272) 4월 조어성과 강을 사이에 둔 의승산(宜勝山, 지금의 합천북)에 성을 쌓아 조어성의 수비력을 강화한다.이듬해 정월, 원군의 상자가 조어성에 다시 들어가자, 장각의 부하가 원병과 함께 마차산, 호정산을 쟁탈할 것을 건의하자 이에 출병하여 원군의 진공을 격파했을 뿐만 아니라, 원군이 두 곳에 성을 쌓고 장악하려 했던 것도 타파했다. 함순 10년(1274), 영원군승선사(寧遠軍承宣使)에 올랐다. 송 공제 덕우 원년(1275)에 남송은 다시 장각을 사천제치부사(四川制治副使), 중경지부(重慶知府)에 임명했다. 또 군사를 이끌고 상경해 경성을 지키라고 명령했지만, 길이 막혀 명령이 보내지지 않았다. 6월에 짠만수이딩(지금 쓰촨 러산시)과 싼거우청구정성이 원에 투항하고 장후가 난전 중 전사하자 원군은 여세를 몰아 노주, 서주(사천 서영), 장녕(長寧, 지금의 쓰촨 창닝현), 복순(富順, 지금의 쓰촨부순), 개주(開州), 달주(達州), 파주(巴州, 지금의 쓰촨 바중), 거주(居州, 지금의 쓰촨 바중)를 차지하여 중경(重慶)을 공격하고 장강(長江), 가릉강(嘉陵江)에 부량을 설치하여 원병을 차단하였다. 원군이 가을부터 겨울까지 중경을 포위 공격하자, 중경은 식량난에 시달리고 있음에도 이를 방어해 냈다. 이듬해 중경이 장기간 포위 공격당하는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조안을 파견하여 원군의 정남도원수를 습격하게 하였다. 부 소재지인 청거성(靑居城, 지금의 쓰촨(四川) 남충남)은 원을 공격해 유재(劉才)와 참의마숭(馬崇)을 위로하고 돌아왔다. 2월에는 정병을 수로로 보내 중경 수비군을 증원했다. 4월에는 중경(重慶)군과 합류해 노주(魯州)를 침공하고 노주(魯州)의 사인인 유림(劉林)과 선곤붕(先昆朋)이 이에 내응하기로 했다.[* 이때 공제와 사태후를 필두로 한 남송 조정은 원군에 항복한 상태였고, 송 단종은 5월 복주(福州)에서 남송 정권을 재건했다.] 그리고 6월에는 조안·왕세창 등을 보내 노주를 되찾고 매응청을 생포해 처형했다. 원군은 어쩔 수 없이 점차 중경에서 철수하여 노주를 포위 공격하였다. 그해 12월, 조정응은 장각을 맞아 중도에 들어갔다. 경은 사천제치사(四川制治使)를 맡았고, 부장을 파견하여 장만(張萬)과 정총(程總)을 인솔하여 부주(지금의 충칭)를 탈환하였다. 남송의 항장들과 옛 복주 자사 양립이 다시 합병하여 결전을 치렀는데, 사진·장세걸은 전사하고 장만은 견디다 못해 양립한 처녀를 사로잡고 이단을 달래며 돌아온다. 장각은 청총으로 부주를 지켰고, 중경 원병은 모두 물러났다. 장각은 익왕 조하, 위왕 조병(趙兵)이 광주에서 황제를 맞아 수백 명을 파병해 이왕이 있는 곳을 찾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장각조사훈충, 조안 등이 노주를 구원하였다. 또 장만을 기주로 보내 충, 부주의 군대와 연합하여 석문과 바무채를 함락시키고 원군의 장병 100여명을 확보했다. 해대녕(解大寧, 지금의 충칭 무계)을 포위하여 열여덟 채를 돌파하였다. 천문(川門)을 장악하면서 천동(川東)은 한때 형세가 호전됐다. 경염 원년(1276) 연말에 원군이 다시 사천으로 진격하자, 경염 2년 6월에 원장 장덕윤이 공격하였고, 복주를 격파해 장수 정총을 잡으라는 명을 받았다. 이에 앞서 정총은 중경(重慶)에서 수성(守城)의 의견을 강하게 주장했고, 장각은 중경에 입성해 그와 맞지 않게 복주에 그를 보냈다. 정총이 푸저우에 도착하여 불공평하다고 생각하고, 울적하여 방비하지 않고 붙잡혔다. 장덕윤이 청청을 가마에 싣고 돌아오며 이르기를 "당신의 아들 청펑비는 이미 정치를 했으니 밤낮으로 그와 모일 수 있다"라고 했다. 정총은 내가 잡혀서 투항한 것이지 내 아들이 아니라고 했다. 이 달에 양산군 원세안이 투항했다.10월에 만주의 천성성이 무너지자 원병은 수장 상관 기를 죽였다. 11월에 노주의 양식이 바닥나 사람들이 서로 사람을 잡아먹자, 원병은 노주를 부수고 왕세자를 안심시켰다. 창은 스스로 목을 매 숨졌다. 원군은 중경(重慶)으로 회군하여 불도관(佛圖關)에 주둔하였고, 일군은 남성(南城), 일군은 주촌평(朱村平), 일군은 장강(長江)에 주둔하였다. 원군은 노주의 항복장 리를 보내 투항시켰고, 장각은 순종하지 않았다. 12월 달주의 항복장 선여충이 황화성(지금의 충칭 충현)을 쳐부수고, 산수장 마쿤을 잡았으며, 군사 포신이 시가전에서 전사하였다. 경염 3년(1278) 봄, 장각이 보낸 이의(李義)가 군대를 이끌고 원군과 싸우나 전멸했다.2월에는 원병 파소경부(지금의 충칭 펑수이)와 장수 선룡, 호북 제형 조립과 제사막관 조유태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장각은 병사를 거느리고 훈풍문을 뛰쳐나와 원 대장과도 속히 싸웠다. 샨바(지금의 충칭 동수문 부근)에서는 장각의 뒤에서 제장들이 연합 습격해 장각군이 대패했다. 중경 성에서 식량이 바닥나자 장각부는 조안에게 편지를 보내 투항을 권유했지만 장각은 동의하지 않았다. 조안은 장하 한충현과 밤에 진서문을 열고 항복하였다.장각은 병사를 이끌고 뒷골목에서 전투를 벌여, 힘이 부치자, 돌아가 독주를 달라고 요구했고, 좌우가 독주를 감추자, 작은 배에 아내를 태웠다. 여자는 동쪽으로 부주로 달아났다가 도중에 크게 분개하여 도끼로 배를 내리쳐 자침하려 했고, 뱃사공은 도끼를 빼앗아 장강(長江)에 버렸고, 장각은 뛰어올라 물에 뛰어들려다 가족들에게 붙잡혀 죽지 못했다.이튿날, 만호 철목이 부주로 달려가 그를 붙잡아 북경으로 보냈다. 중경은 항복했고, 제기인 조기는 스스로 목을 매 숨졌고, 장완과 장기애는 성을 나와 투항했다. 원군이 합주로 진격하여 외성을 무너뜨렸다. 3월에 왕립이 성을 바치고 항복했다.[* 남송 멸망 2달 전이었다.] 대도(지금의 북경)로 압송되던 중 안서(지금의 산시 시안성 동북)의 조로암을 지나갔는데, 그의 친구가 "공충일세(公忠一世)로 소사에 보답하고, 지금 이쯤 되면 죽지 않아도 어찌하겠느냐"라고 하자 장각은 활시위를 내려 화장실에서 목을 매 자결했다. 수행원이 이를 시체를 질그릇에 담아 죽은 곳에 묻었다. == 사후 == [[문천상]]은 이를 알고 감탄하며 "도제치사 장각"을 지었다. >나라를 불멸로 이끈 공업이 어떠했는가. [[분류:송나라/인물]] [[분류:1280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