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도검]][[분류:폴암]][[분류:보병 무기/고대~근세기]] [include(틀:다른 뜻1, other1=유럽의 장검, rd1=롱소드)] [include(틀:고려의 무기)] [include(틀:조선의 무기)] [목차] == 개요 == 이미 한국사에서는 옛날부터 장검(長劍)과 비슷한 무기들이 존재하였지만 [[고려]]시대부터 쓰이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대~근세기 무기|전근대]] 장병도(長柄刀) 계열 무기이며, [[장병기]]의 일종이다. 외형은 실전형 [[월도]]나 [[글레이브]], [[협도]] 등과 흡사하지만 보병용이며 운용 방식에서는 차이가 난다. [[월도]]는 주로 기마용으로 쓰이고 육중한 무게를 이용하여 적 보병의 진형을 붕괴 시키는데 쓰였으며, [[협도]] 또한 보병용으로 육중한 무게를 이용하여 적 보병의 진형을 붕괴 시키는데 사용 되었다. 반면, 정도전의 진법에 포함된 보병의 다섯 개 병종 중에 '검(劍)'이 바로 이 장검으로 무장한 병종이듯이 보병으로 편성되어 있으며, [[협도]]에 비하여 코등이가 없고 칼등에 가지와 소꼬리 장식(毦)이 없으며, 길이가 좀 더 짧고 가볍다. 후나후포(後捕後獲)라고 적의 뒤에서 적을 생포할 때 쓰는 무기로도 쓰였으며, 체력을 단련하는 부가기능도 있었다. == 형태 == 장대에 긴 [[환도]]를 부착한것처럼 생겼으며, 세종실록 133권 오례에 따르면, 날은 길이가 2척 5촌이고, 자루는 나무를 사용하는데, 길이가 5척 9촌이다. 장대는 붉은 색으로 칠하거나, 혹은 검은 색으로 칠한다. 자루 아래에 덮어씌운 쇠[冒鐵]가 있는데, 둥글고 뾰족하다. 현대에서는 보기 힘드나 경복궁 수문장 교대식이나 기타 유적지 예식에서 볼 수 있다. || [[파일:ida_045051a04.jpg|width=150]] || [[파일:sumunjang.png|width=170]] || ||세종실록 오례 장검(長劍) || 경복궁 수문장 교대식 장검 재현 || == 역사 == 장대에 긴 철제무기를 붙여 사용한 역사는 길다. [[원삼국시대]]부터 장대에 긴 철제형 검날형을 붙인 검신형(劍身) 투겁창이 사용되어 현재에도 발굴되고있으며[* 장검(長劍)과 흡사하게 생긴 월도(月刀) 또한 원 삼국시대부터 사용되었다.], 3~5세기 [[가야]]시대에는 장대에 휘어진 칼날을 묶은 [[곡도]] 또한 발굴되었다. 이러한 장병기는 [[남북국시대]]를 거치며 [[고려]]시대에 이르러 일부 장검으로 발전한 것으로 추정된다. ||
[[파일:attachment/월도/1.jpg|width=200]] || [[파일:external/file.agora.media.daum.net/pcp_download.php?fhandle=YVhYZkBmaWxlLmFnb3JhLm1lZGlhLmRhdW0ubmV0Oi9LMTYyLzExLzExMzAuanBn&filename=096.jpg|width=200]] || || 3~5세기 대성동 고분군 출토품 || 출토된 가야의 곡도와 장창 복원체 || [[고려]]시대에는 대규모 외침이 있을 시에는 인구수의 1/10이 병력으로 운영되었을 정도로 전 국민이 전쟁과 맞닿은 삶을 지내고 있었다. 또한 지방[[호족]]들이 난립하던 시기였으며, 소규모 외침 또한 매우 잦았고, 중앙 군사력이 약하여 지방호족들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지방호족들은 [[가별초|별초]]를 운영하여 사병집단을 정예화 하였고, 잦은 외침과 이러한 사병 정예화는 집단전에 기초된 전술에서 소규모 백병전의 필요성 또한 요구되었다. 이러한 집단전 위주의 장창병에서 백병전에서 보조 할 수 있는 장병기 수단으로 장검(長劍)이 발달 된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중앙집권화를 이루고 세종 때 오례에 장검(長劍)이 편성되어 있으나, 엘리트 정예병인 [[갑사]]의 폐지와 화포의 발전으로 백병전의 필요성이 적어졌다. 점차 사용도가 사라졌고, 추후 이 자리는 중후한 무게로 적 보병진형을 깨뜨리는 [[협도]]가 차지하게 되었다. 날의 형태, 무게나 운용법도 그렇고 '''오히려 [[월도]] 쪽이 장검의 직계후손에 가깝다'''는 설이 있다. 월도 문서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