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위서(북조))] [include(틀:북사)] ||<-2> '''북평선왕(北平宣王)[br]{{{+1 長孫嵩 | 장손숭}}}''' || || '''시호''' ||선(宣) || || '''작호''' ||거록군공(鉅鹿郡公) → 남평군공(南平郡公) →[br]북평군왕(北平郡王) || || '''성''' ||장손(長孫) || || '''이름''' ||숭(嵩) || || '''생몰''' ||358년 ~ 437년 || || '''부친''' ||장손인(長孫仁) || || '''출신''' ||대군(代郡) || [목차] [clearfix] == 개요 == [[남북조시대]] [[북위]]의 대신으로 대군(代郡) 출신. == 생애 == 358년, 장손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장손인은 [[탁발십익건]] 때 남부대인(南部大人)을 지냈다. 장손숭은 관대하고 돈후하며 풍치가 있고 아담한데다 식견이 있었으며, 아버지를 대신하여 군사를 거느렸다. 376년, [[대(오호십육국시대)|대나라]]가 멸망한 뒤 [[전진(오호십육국시대)|전진]]의 [[부견]]은 [[연봉(북위)|연봉]]의 건의에 따라 부를 둘로 나누어 [[유고인]]과 [[유위진]]에게 다스리게 했다. 탁발숭은 이때 원타(元他) 등과 함께 무리를 거느려서 유고인을 따랐다. 383년, [[비수대전]]의 실패로 전진이 혼란에 빠지고 각지에서 반란이 벌어졌다. 385년, 유고인의 아들 유현(劉顯)이 숙부 유권(劉眷)을 살해하였다. 장손숭은 유현을 배반하고 난리를 피해서 달아나다가 오원(五原)에서 [[탁발식군]]의 아들 탁발악(拓跋渥)이 군중을 모아서 왕에 올랐기에 그에게 귀순하려고 했다. 이때 오악(烏渥)이 장손숭에게 탁발악이 역모를 일으킨 탁발식군의 아들이니 탁발규에게 귀순하라고 권했다. 장손숭이 쉽게 결정하지 못하자, 오악은 소의 머리를 가져와서 점을 쳤고, 점의 결과를 따른 장손숭은 삼한정(三漢亭)에서 탁발규를 만나 그에게 귀순했다. 386년, 탁발규가 대왕에 즉위했다가 위왕(魏王)을 칭했다. 장손숭은 이때 남부대인에 임명되었다. 387년, 탁발규가 장손숭을 비롯한 73명의 공신들에게 상을 내렸다. 391년, [[유연 제국]]의 필후발(匹候跋)과 악격(屋擊)이 달아나자, 장손숭은 장손비와 함께 필후발과 악격을 추격하여 평망천(平望川)에서 악격을 사로잡아 참수하였다. 392년, 서부문려대인(西部泣黎大人) 무선(茂鮮)이 반란을 일으키자, 장손숭은 무선의 난을 진압했다. 이후 [[후연]]을 정벌할 때 종군하여 안남장군(安南將軍), 기주자사(冀州刺史)로 임명되고 거록군공(鉅鹿郡公)에 봉해졌으며, 시중(侍中)으로 전임되었다. 398년, 탁발규가 순행을 떠날 때 우군장군(右軍將軍) 윤국(尹國)이 기주에서 조세를 감독하고 있었는데, 탁발규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모반하여 신도(信都)를 습격하려고 했다. 장손숭은 윤국을 사로잡아 평성으로 압송하였으며, 사도(司徒)로 임명되었다. 장손숭은 이후 상주자사(相州刺史)로 전출되고 남평군공(南平郡公)에 봉해졌다. 409년, 청하왕(淸河王) [[탁발소]]가 모반하여 탁발규를 시해하였으나 태자인 탁발사가 탁발소를 주벌하고 제위에 오르니 이가 제2대 황제인 [[명원제]]였다. 명원제가 즉위한 뒤 장손숭은 북신후(北新侯) 안동(安同)과 함께 송사를 처리하였다. 410년, 명원제의 조칙에 따라 장손숭은 유연을 정벌하고자 출병하였다. 이후 장손숭이 북위로 돌아오던 도중 우천(牛川)에서 유연에게 포위당하자, 명원제가 직접 출병했고 유연에서는 이 소식을 듣고 달아났다. 411년, 장손숭은 혜발(嵇拔), 해근(奚斤), 최굉 등과 함께 수레를 세워놓고 정무를 총람했고 그 처리가 공평하고 타당했기 때문에 팔공(八公)으로 불렸다. 412년, 명원제가 호랑이를 사냥한 뒤 장손숭 등에게 비단을 상으로 내렸다. [[분류:남북조시대/인물]][[분류:358년 출생]][[분류:437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