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유송 황후)]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283372 0%, #3F51BA 20%, #3F51BA 80%, #283372)" '''{{{#ECE5B6 유송 추존 황후[br]{{{+1 武敬皇后 | 무경황후}}}}}}'''}}} || || '''[[시호|{{{#ece5b6 시호}}}]]''' ||<(> 경황후(敬皇后) || || '''[[성씨|{{{#ece5b6 성}}}]]''' ||<(> 장(臧) || || '''[[휘|{{{#ece5b6 휘}}}]]''' ||<(> 애친(愛親) || || '''{{{#ece5b6 부군}}}''' ||<(> [[무제(유송)|무제]](武帝) || || '''{{{#ece5b6 부친}}}''' ||<(> 장준(臧俊) || || '''{{{#ece5b6 생몰}}}''' ||<(> 360년 ~ 408년 3월 12일 || [목차] [clearfix] == 개요 == [[동진]] 동관군(東莞郡) 거현(莒縣) 사람으로 [[송(육조)|유송]]을 세운 [[송무제]]의 본처이다. 유유와의 사이에서 공주 유흥제(劉興弟)를 낳았다. 사후 경황후(敬皇后)로 추존되었고 부군인 무제의 시호를 중복하여 무경황후(武敬皇后)로 칭해졌다. == 생애 == 408년 3월 12일, 동성(東城)[* 現 [[안후이]] 정원현(定遠縣) 동남(東南).]에서 향년 48살로 병사하였다. 이때 유유는 예장군공(豫章郡公)의 작위를 갖고 있었기에 장애친은 예장공부인(豫章公夫人)으로 추서된 후 자신의 본가가 있는 곳에 매장되었다. 420년, 유유가 유송을 건국하자 장애친의 위패를 [[칠묘]]에 봉안하였고 그해 8월에 경황후(敬皇后)로 추존하였다. 역사서에선 무제의 시호를 중복하여 장애친을 무경황후(武敬皇后)라 칭하였다. 본래 칠묘는 자신의 조상들을 모시는 신주이지만 유유는 열조부인 [[유응]]까지만 모시고 나머지 한 자리엔 자신의 황후를 봉안하였다. 이는 중국사상 최초로 전례가 없었던, 즉 예법에 안맞는 행위였기에 후대의 비웃음을 샀다. 왕명성(王鳴盛)은 유유 자신이 죽고 난 후의 묘호를 태조(太祖)로 하기 위해 설계한 것이라고 지적하였으나 유유의 묘호는 고조(高祖)로 정해졌다. 무제가 죽고 그 위패가 신주에 봉안된 후부터 장애친은 더이상 주신(主神)으로 모셔지지 않았다. 그녀의 아버지는 장준(臧俊)이고 [[자(이름)|자]]는 선예(宣刈)이며 동진의 군공조(郡功曹)를 지냈다. 장준의 부친은 장왕(臧汪)으로 자는 산보(山甫)이며 동진의 상서량을 지냈다. == 참고 항목 == * [[https://zh.wikipedia.org/wiki/%E8%87%A7%E6%84%9B%E8%A6%AA|臧愛親]] == 둘러보기 == [include(틀:송서)] [[분류:송(남조)/황후]][[분류:360년 출생]][[분류:408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