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송나라/인물]][[분류:969년 사망]][[분류:창즈시 출신 인물]] [include(틀:송사)] [목차] == 개요 == 張延通 (? ~ 969년) [[북송]]의 장수. == 생애 == 노주(潞州) 노성현(潞城縣) 출신으로, 장연통의 아버지 장언성(張彦成)은 [[후주]]에서 우금오위상장군(右金吾衛上將軍)을 지냈다. 장연통은 성품이 매우 총명하고 슬기로우며 재간이 있었으며, 음서를 통해 공봉관(供奉官)으로 보임되었다. 북송이 들어선 뒤 통사사인(通事舍人)을 역임했고 동상합문부사(東上閤門副使)로 승진하였다. 개보(開寶) 연간에 서천병마도감(西川兵馬都監)이 되었다. 당시 [[후촉]]이 멸망한 뒤 벌어진 반란들이 아직 평정되지 않아서 내객성사(內客省使) [[정덕유]], 인진부사(引進副使) 왕반(王班), 내시 장서(張嶼)에게도 군대를 이끌고 촉 지방에 주둔하도록 명하였다. 하지만 정덕유는 성품이 방자해서 장연통이 정덕유의 잘못을 비난했고 정덕유는 이 때문에 장연통을 원망했다. 또한 장연통은 장서(張嶼)와 사이가 나빴다가 뒤에 다시 화해했는데, 정덕유는 장연통과 장서가 붕당을 결성했다고 의심해서 더욱 기뻐하지 않았다. 969년 북송이 [[북한(오대십국시대)|북한]]을 정벌할 때 행재소에서 조정의 사자가 도착해서 태조가 한여름에도 불구하고 직접 전선에도 임했다고 알렸다. 이에 장연통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상께서 이렇게 근면하시는데 우리는 날이 갈수록 안락을 누린다. 하지만 정덕유는 장연통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북한 정벌이 실패한 뒤 장서가 먼저 조정으로 돌아갔고 태조가 장서에게 후한 상을 내렸다. 장연통과 정덕유가 뒤이어 도착하니, 태조는 장연통을 불러들였고 정덕유를 점점 박대하였다. 정덕유는 점점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결국 태조에게 장연통이 일찍이 부하들을 꾸짖고 불법을 많이 저질렀으며, 장연통과 장서가 한패라고 주장했다. 정덕유의 참소를 들은 곧바로 장연통, 장서, 왕반을 어사대로 압송하여 이들을 국문하도록 명했다. 이때 장서와 왕반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지만, 장연통은 항변할 때 말투가 불손해서 결국 참수되었다. 장서, 왕반, 왕인길(王仁吉)은 모두 척추에 장형을 받았으며, 장서는 사문도(沙門島)로 유배되고, 왕반은 허주(許州)로 유배되고, 왕인길은 서요무(西窯務)로 유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