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초나라의 왕, rd1=장오(초나라), other2=견종, rd2=티베탄 마스티프)] [include(틀:역대 조(전국시대) 군주)] ||<-5> '''[[고조공신후자연표]](高祖功臣侯者年表第六) 후제(侯第)''' || || '''2위 평양후(平陽侯) [[조참]]''' || {{{+1 ←}}} || '''{{{#white 3위 선평후(宣平侯) 장오}}}''' || {{{+1 →}}} || '''4위 강후(絳侯) [[주발(전한)|주발]]''' || ||<-5><:>{{{#ffffff '''전한의 조왕(趙王)'''}}}|| ||<:>(신규 책봉)||<:>{{{+1 ←}}}||<:>'''장오'''||<:>{{{+1 →}}}||<:>[[유여의]](劉如意)|| || '''생몰년도''' ||? ~ 기원전 182년 || || '''[[이름]]''' ||장오(張敖) || || '''[[작위|왕 작위]]''' ||조왕(趙王) || || '''[[작위|후작 작위]]''' ||선평후(宣平侯) || [목차] == 개요 == [[중국]] [[초한전쟁|초한쟁패기]]와 [[전한]] 초기에 활약했던 인물. 상산왕 [[장이]]의 아들이다. == 생애 == 아버지 장이는 [[진여]](陳餘)와 함께 [[무신#s-3|무신]](武臣)을 꼬드겨 [[진승]](陳勝)에게서 독립하게 하였다. 무신은 [[조]][[왕]](趙王)이 되었다. 진승은 그들을 건드려 아예 적이 되지 않기 위해 무신의 가족을 보호하고 장오를 성도군(成都郡)에 봉했다. [[거록대전]] 중 아버지 장이가 거록에서 오도가도 못할 때 북쪽에서 일만 명의 군졸을 조직하여 구원하려 했지만 [[진나라]](秦) 군의 기세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라 뭘 해볼 수도 없어 [[항우]](項羽)의 군대가 도착하기 전까지 꼼짝도 못했다. 아버지 장이는 진승이 거병하기 전부터 진나라에서 가장 이름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장이는 항우에게 갈 수도 있었으나 유방에게 투신해 공을 세웠다. 초한전쟁 때 이미 고령이라 통일 즈음 사망하여 역모에 말려들거나 하는 일도 없었다. 덕분에 아들 장오가 이 영광을 대신 받았다. 쟁쟁한 공신들 중에서도 장오가 서열 3위라는 높은 자리를 차지한 것은 아버지 장이의 영향이다.[* 장이는 워낙 명성이 높은 인물이라서 유방에게 투신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높은 자리를 받을 수 있었고 거기다 한신과 함께 강적 진여를 죽이고 조 및 대 땅을 평정하는 데도 일조했다.] 장이는 조나라 왕의 자리에까지 올라 장오가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고제(전한)|한고제 유방]](劉邦)의 장녀인 노원공주(魯元公主)와 결혼하여 그야말로 순풍에 돛을 단 듯 무탈하게 잘나가고 있었다. [[백등산 포위전]] 때문에 [[흉노]]의 [[묵돌]]에게 마누라를 [[네토라레]] 당할 위기도 있었지만 자기 딸을 묵돌에게 주기 싫었던 [[고황후 여씨|장모님]] 덕에 부인을 지켰다. BC 200년 유방이 조나라에 들렀을 때 문제가 터진다. [[백등산 포위전]]에서 흉노의 묵돌에게 대패한 유방은 당시 기분이 매우 안 좋았을 것으로 추청된다. 장오는 장인어른 유방을 대접하면서 직접 팔을 걷어 올리고 음식 대접부터 모든 과정을 지극히 정성스럽게 하였다. 하지만 '''천성이 무례한''' 유방은 기분까지 안 좋으니 의자에 다리를 쭉 뻗고 앉아 장오에게 욕을 하며 성질을 부렸다. 유방에게 장오는 그야말로 애송이 사위이지만 아버지 장이 때부터 장씨 일가를 모셨던 빈객들에게는 충격이었다. 장이는 진나라에서 장이의 행방을 알 수 없자 천금의 상금을 걸었을 정도로 거물이었다. 장오가 뒤를 이은 후에도 여전히 장씨 일가를 모시던 빈객들은 나이가 60세가 넘도록 전란에서 살아남은 [[호걸]]들이었다. 상국 관고(貫高)와 조오(趙午) 등은 장오에게 "왕을 위하여 천자를 죽이겠다."라고 선언하였다. 혼이 빠질 정도로 놀란 장오는 [[손가락]]을 깨물어 [[혈액|피]]를 보이면서 말했다. >그대들은 어찌하여 당장 죽을 처지였던 우리를 황제께서 거둬주신 은혜를 잊고 그렇게 잘못된 말을 하는 것입니까?[* 유방이 조나라와 연나라 땅을 취한 진여에게 동맹을 청하자 진여는 원수인 장이의 목을 요구했다. 유방은 장이와 닮은 죄수의 목을 보내 진여와 동맹을 맺었지만, 얼마 안 가 들통나서 진여와 적이 되었다. 장이를 살리고자 [[정형 전투]]씩이나 벌였던 셈이니 아들인 장오가 유방을 은인으로 생각하는 것도 당연하다.] 더욱이 우리 선조들이 망해 잃은 나라를 황제께서 찾아 주시어 그 덕이 자손들에게 전해지니 우리들의 털끝 하나까지 모두 황제의 덕에 힘입은 바입니다. 원컨대 여러분들은 두 번 다시 그런 말을 하지 마십시오. 관고와 조오는 장오를 나약한 사람으로 여긴 것을 반성했으나 '유방 암살 계획'을 그대로 밀어붙였다. 유방이 기주 조국(趙國) 백인(柏人)현에서 묵으려다 지명이 박인(迫人)[* 박(迫)이라는 한자가 핍박하다, 강제하다라는 뜻이 있다. [[협박]], [[압박]]할 때 쓰이는 한자라서 뒤에 사람 인(人)의 글자와 합치면 사람을 핍박하다라는 뜻이니 불길해 보이는 것.]과 유사하여 기분이 좋지 않다고 장소를 바꿔 암살 계획이 실패했다. 결국 정보가 유출돼 장오와 그 신하들이 단체로 역모죄 문초를 당하게 되었다. 황제 암살 음모라는 [[충격과 공포]]급 사건이므로 장오도 사형당할 확률이 높았다. 배신감에 펄펄 날뛰는 유방은 사위를 감싸는 여후의 애원에도 "그놈이 황제가 되고자 한다면 우리 딸의 목숨이 대수겠냐?"라며 혐의만 확정되면 장오를 죽여버리려고 했다. 그러나 [[고문]]을 받는 관고 등이 워낙 결사적으로 장오와의 관련을 부정하고 "이건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들이 저지른 일이다."라고 일관적으로 계속 주장했다. 달군 쇠꼬챙이로 허벅지를 뚫리면서도 말이 조금도 달라지지 않자 유방도 관고에게 꽤 감동 받아 장오를 조나라 왕에서 해임하는 것으로 사건을 끝낸다. 유방은 관고의 호걸스러움과 엄청난 고통을 당하면서도 신의를 지키기 위해 장오를 팔아먹지 않은 기개를 높이 사 그의 책임을 더 이상 묻지 않고 석방했다. 관고는 내가 고문을 당하면서도 죽지 않은 것은 조왕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함이었고 신하로서 임금을 시해하려고 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 말한 후 자결했다. 관고 사건 이후로 유방은 반란자의 관련인에겐 나름대로 관대해져서 같이 따라서 반역하지 않으면 사면해주거나 때로는 상금을 주면서 회유하려 했다. 덕분에 [[진희(한나라)|진희]]와 [[노관]]의 반란 때 애꿎은 사람들이 엮여서 줄초상을 치르지 않을 수 있었다. 장오를 선평후(宣平侯)로 봉했다. 장오가 물러난 조왕(趙王) 자리는 [[척부인]] 소생의 유방의 서자 [[유여의]]가 물려받았으며, 유여의가 [[여후]]에게 [[짐독]]으로 암살당한 후 이복동생 유우(劉友)가 물려받았지만, 여후를 비방하다 암살되었다. 이후 양왕 유회(劉恢)가 물려받았지만 역시 수상쩍은 자살로 공석이 되었고, 공석이 된 조왕 자리는 여후의 조카 여록(呂祿)이 물려받았다가, 기원전 180년 여씨 천하가 끝난 후에 유우의 아들 유수(劉遂)가 물려받았다. 장언(張偃)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장오가 사망할 때는 나이가 어려 장오의 첩실 소생인 아들이 후에 봉해졌고 장언은 [[노]](魯)에 봉해졌다. 그 후 고황후 여씨가 죽고 여씨 일가의 제후왕은 물론이고 핏줄이 모조리 멸살당하는 와중에 혼자서만 생존했는데, 여씨 일가이긴 해도 유방의 외손자인데다가 아버지가 공신에서도 높은 서열에 들어서인지 노왕 자격을 박탈당하고 남궁후(南宮侯)로 격하되는 데에만 그쳤다. [각주] [[분류:기원전 182년 사망]][[분류:초한쟁패기/인물]][[분류:한나라의 공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