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진서)] [목차] == 개요 == 張載 생몰년도 불명 [[서진]]의 인물. 자는 맹양(孟陽). 기주 박릉군 안평현 출신으로 서진의 촉군태수 장수(張收)의 아들이다. == 생애 == 성품이 한아하고 박학다식하여 문장을 짓는 재주가 있었다고 한다. 한번은 촉군태수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 검각을 지날 때, 장재는 촉 땅의 사람들이 험준한 지형에 의지해 반란을 일으키기 좋아한다는 소리를 듣고 촉 사람들을 비판하는 시를 지었다. 익주자사 장민(張敏)은 이를 기이하게 여겨 [[무제(서진)|무제]]에게 보고했고, 무제는 장재의 시를 마음에 들어하며 사람을 보내 검각 인근 돌에 새기게 했다. 이 장재의 시는 《검각명(劍閣銘)》이라 하며, 훗날 [[당나라]]의 시인 [[이백(시인)|이백]]의 시 《촉도난(蜀道難)》에서도 인용된다.[* 《검각명》에서 "한 사람이 창을 들고 만 명을 저지할 수 있다(一人荷戟,萬夫趄)." 글귀가 《촉도난》에서 "한 사람이 관문 막으면 만 사람도 열 수 없다(一夫當關,萬夫莫開)"로 인용되었다.] 이후로도 장재는 문학적 재능을 펼쳐 《교론(榷論)》, 《몽사적(蒙汜賦)》 등을 지었고, 당시 박학기로 유명한 사예교위 [[부현]]에게도 인정을 받으면서 전국에 명성을 떨쳤다. 장재는 조정의 부름을 받고 중앙에서 좌저작랑(佐著作郎)을 지내다가 비향현령(肥鄉縣令), 저작랑, 태자중사인(太子中舍人), 낙안상(樂安相), 홍농태수를 차례로 역임했다. [[팔왕의 난]]이 일어나자 장사왕 [[사마예]]가 장재를 기실독(記室督)으로 삼아 다시 중앙으로 불러들였다. 이후 중서시랑, 영저작(領著作)을 역임하던 중, 서진의 정치가 너무 혼란스러운 것을 보고 병을 핑계로 사직해 고향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는 살면서 총 10여 편의 시를 남겼고 그 중 혼란한 세상을 보며 한탄하는 내용인 《칠애시(七哀詩)》 2편이 제일 유명하다. 그리고 먼 훗날 [[명나라]] 사람들은 장재와 그 아들 [[장협]]의 문학 작품들을 모아 《장맹양경양집(張孟陽景陽集)》으로 엮었다. [[분류:서진의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