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위서(북조))] [include(틀:북사)] [목차] == 개요 == 張濟 (? ~ 408년) [[오호십육국시대]] [[북위]]의 관료로 자는 사도(士度). 서하(西河) 출신이다. == 생애 == 장제의 부친 장천추(張千秋)는 [[서연]]에서 효기장군(驍騎將軍)을 지냈고 서연이 멸망한 후 [[북위]]로 귀순하여 건절장군(建節將軍)으로 임명되고 성기현후(成紀縣侯)에 봉해졌다. 장천추는 뒤에 [[도무제]]의 정벌에 종군하여 여러 차례 공적을 세우다가 등국(登國) 연간 말엽에 죽었다. 장제는 경전과 사서를 섭렵했으며, 명석하고 용모가 아름다워서 도무제가 총애하여 측근으로 두었다. 장제는 공손표(公孫表) 등과 함께 행인(行人)이 되어 산기시랑(散騎侍郞)으로 임명되었으며, 성기현후의 작위를 이었다. [[후진(오호십육국시대)|후진]]의 [[요흥]]이 낙양을 공격하려 하자, [[동진]]의 옹주자사(雍州刺史) [[양전기]]가 상산왕(常山王) 탁발준에게 사신을 보냈고 탁발준이 이를 도무제에게 보고하자, 탁발규는 장제를 탁발준의 종사중랑(從事中郞)으로 삼아 양전기에게 보냈다. 장제가 양양(襄陽)에서 돌아온 뒤 도무제는 장제에게 동진의 정세에 대해 물었다. 장제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동진|진나라]]에서는 [[효무제(동진)|사마창명]]이 죽고 아들인 [[안제(동진)|사마덕종]]이 대신 즉위한 뒤 동진의 주진(州鎭)이 서로를 공격했습니다. 지금은 비록 조금씩 안정되고 있다지만 [[군약신강|임금의 권한이 약하고 신하의 권한이 강해서]] 기강이 전혀 없습니다. 장제는 뒤이어 도무제에게 양전기와 나눈 문답에 대해 이야기했다. >양전기: 위나라가 처음 [[후연|중산]](中山)을 정벌할 때 몇 십만의 군대를 거느렸소? >장제: 30여 만의 군대를 거느렸소. >양전기: 위나라에서 무장한 군마는 어느 정도나 되오? >장제: 중군에는 뛰어난 군마가 10여 만 마리가 있고 외군에는 무수히 많이 있소. >양전기: 이런 병력으로 [[후진(오호십육국시대)|강족]]을 토벌하다면 어찌 강족을 토벌할 때 부족하지 않겠소? 위나라가 중산을 평정할 때 몇 가구를 북쪽으로 이주시켰소? >양전기: 7만 여의 가구를 이주시켰소. >양전기: 어디에 도읍했소? >장제: 평성(平城)에 도읍했소. >양전기: 이렇게 많은 백성들이 있는데 또 어떻게 그들을 수용할 수 있소? 위나라의 황제는 오랫동안 평성에 도읍할 것이오? 아니면 천도를 할 것이오? >장제: 그것은 제가 아는 바가 아니오. 양전기는 북위가 산동에 도읍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화색이 돌아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진나라와 위나라가 통호한 것은 예전부터였지 오늘만 그런 것은 아니오. 강족 오랑캐들이 교활하고 자주 하락(河洛)을 침공해서 밤낮으로 근심하고 있소. 지금 이곳은 군대가 적고 창고는 텅 비었지만 그대와는 한 식구이니 명분으로 봤을 때 거리낄 것이 없소. 낙양의 구원은 위나라를 믿고 있으니, 만약 낙양이 구원되면 반드시 후하게 보답하겠소. 낙양을 강족에게 빼앗긴다면 차라리 위나라가 낙양을 취하게 하겠소. 이후 장제가 양주(揚州)로 향하려고 할 때 양전기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랑캐가 이곳저곳에서 일어나서 수로를 사용하기 매우 어려운데, 위나라의 군대는 이미 활대(滑臺)를 점령했으니 여기서 돌아가서 북로를 따라 동쪽으로 내려간다면 바로 갈 수 있소. 우리 진나라의 법제는 위나라와 다르오. 지금 나는 도독의 신분으로 양양에 진수하여 대외적인 일을 위임받았으니 만약 정벌을 하려고 한다면 즉시 군사를 일으켜 출발할 수 있고 그러한 뒤에 조정에 상주문을 올려서 조정에 알리면 되오. 만약 일이 그렇게 되지 않으면 조정의 명령도 받지 않을 것이오. 도무제는 장제의 이야기가 순리에 맞다고 생각해서 후한 상을 내리고 낙양으로 구원군을 파견할 것을 윤허하였다. 뒤에 장제는 알자복야(謁者僕射)로 승진했고 400년 후진에 사자로 파견되었다. 장제는 여러 차례 사신으로 파견되어 도무제의 뜻에 맞아서 승병장군(勝兵將軍)에 임명되었다. 도무제의 북벌에 항상 종군하여 계획을 짜낸 공로가 가장 많아서 노비 100명, 말과 소 수백 마리, 양 20여 마리를 받았으며, 이후 408년에 죽었다. 사후 아들인 장다라(張多羅)가 작위를 이었지만 사건에 연루되어 작위가 삭탈되었다. [[분류:동진 및 오호십육국시대/인물]][[분류:408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