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파일:장철수.png]][br]{{{-1 [[도쿄제국대학]] 재학시}}} || || '''성명''' ||장철수(張徹壽 또는 張澈壽)[* 사료마다 [[徹]] 또는 [[澈]]로 기록이 다르다.] || || '''아호''' ||죽암(竹巖) || || '''본관''' ||[[인동 장씨]] || || '''출생''' ||[[1908년]] [[7월 2일]] || ||<|2> '''사망''' ||[[1954년]] [[6월 5일]] (향년 45세) || ||[[서울특별시]] [[중구(서울)|중구]] [[저동1가]] [[가톨릭대학교 여의도성모병원|명동성모병원]] || || '''학력''' ||[[보성고등학교(서울)|보성고등보통학교]] {{{-2 (졸업)}}}[br][[교토]] [[구제고등학교#넘버스쿨|제3고등학교]] {{{-2 (졸업)}}}[br][[도쿄제국대학]] {{{-2 ([[법학]] / [[학사]])}}} || || '''경력''' ||주 [[아르헨티나]] 일본공사관 서기관[br][[일본 외무성]] 사무관[br][[외교부|대한민국 외무부]] 정무국장[br][[경북대학교]] 교수 || [[파일:장철수2.png]][br][[고등문관시험]] 합격 당시[* 조선중앙일보 1933년 10월 2일] [목차] [clearfix] == 개요 == [[일제강점기]] [[일본제국]] 및 광복 후 [[대한민국]]에서 활동한 [[외교관]]. 특히 일제강점기 [[고등문관시험]] 외교과에 합격해 일본 외교관이 된 유일한 [[조선인]]이다. 이 때문에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해외-일본 부문에 등재되었다. == 생애 == 1908년 7월 2일 태어났다.[* 출생지에 대해서는 사료에 따라 [[경상북도]] [[대구광역시|대구군]], 경상북도 [[경주시|경주군]]([[http://people.aks.ac.kr/front/dirSer/ppl/pplView.aks?pplId=PPL_7HIL_A1908_1_0018970|#]]), [[전라남도]] [[목포시|무안부]], '경성 [[통의동]] 148번지([[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33092700209102004&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33-09-27&officeId=00020&pageNo=2&printNo=4595&publishType=00010|#]])' 등으로 달리 기록하고 있다. 주로 [[전라도]]에서 성장해서 스스로 전라도 사람으로 자처했으며 경상도 인동양반이라는 말을 싫어했다고 한다.] [[기생]]이었던 어머니에게서 [[서자]]로 태어났다고 한다.[* 부친에 대해서는 [[순헌황귀비]]의 [[승지]]였다는 얘기가 있다.] 1926년 [[보성고등학교(서울)|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가 [[교토]]의 [[구제고등학교#넘버스쿨|제3고등학교]][* 당시 구제고등학교는 대학 예과에 준하는 고등교육기관으로 제3고등학교는 현 [[교토대학]] 교양부로 개편되었다.]를 거쳐 1933년 [[도쿄대학|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영법(英法) 전공으로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 진학해 국제법을 연구하던 중 일본 [[고등문관시험]] 외교과에 합격했다.[* 일설에는 수석으로 합격했다는 말도 있으나 당시 합격을 보도한 신문 기사에서는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고만 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에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한 조선인은 모두 408명에 달하나 대부분 행정과와 사법과였고 가장 어렵다는 외교과 합격자는 장철수가 유일하다.[* 행정과 135명, 사법과 272명, 외교과 1명.][* [[김성용(1918)|김성용]]은 외교과 필기시험에 합격했으나 다음해 구두시험을 칠 때는 외교과가 행정과에 통합되는 바람에 행정과에 최종 합격하여 행정과 합격자로 분류된다.] 1934년 주[[프랑스]] 일본대사관 서기생, 1935년 주[[벨기에]] 일본대사관 외교관보, 1938년 주[[아르헨티나]] 일본공사관 3등 서기관에 임명되었고 1939년 [[일본 외무성]] 본부 사무관으로 승진해 통상국과 조사국 등에서 1943년까지 근무했다. 1944년부터는 무보직 상태로 광복을 맞을 때까지 경성에 체류하는 날이 더 많았으며, 이 당시 [[김성수(1891)|김성수]]와 [[송진우(독립운동가)|송진우]]의 집을 드나들면서 일본의 패망을 단언했다고 한다. [[8.15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1948년 12월 [[외교부|외무부]] 초대 정무국장으로 임명되었다. 정무국장으로 재직하던 1949년 5월 외무부 모 과장의 생일잔치에서 [[이승만]] 대통령과 [[장택상]] 전 외무부장관을 비판한 일로 시경 사찰과장이었던 [[최운하]]의 조사를 받게 되자 그날로 사직했다. 이후 [[성균관대학교]]에 출강하면서 [[폭음]]과 [[독설]]로 [[자학]]에 빠진 광적인 생활을 했다. [[6.25 전쟁]] 때 [[납북]]되어 [[평양]]까지 끌려갔다가 탈출했다. 이후 [[경북대학교]]에서 외교사를 강의하며 교수로 재직했다. 평생 [[독신]]으로 지냈으며 1954년 6월 5일 [[서울특별시]] [[중구(서울)|중구]] [[저동1가]] [[명동성모병원]]에서 [[간암]]으로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4060700209201016&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4-06-07&officeId=00020&pageNo=1&printNo=9600&publishType=00020|별세했다]]. == 외모 == 많은 이들이 그를 특이한 외모를 가진 인물로 기억한다. [[이인기(1907)|이인기]]는 "땅딸막한한 키에 얼굴 면적이 넓고 좌우로 퍼졌으며 눈이 유난히 가늘어서 웃는 상이며 얼굴빛이 붉었다"고 회고했고, [[도쿄제국대학]] 후배로 [[동아일보]] 총무부국장을 지낸 윤현배는 "작달막한 키에 벌어진 어깨, 몽골리안의 후예답게 광대뼈가 나온 널찍한 네모꼴의 얼굴"이라고 묘사했다. == 기타 == [[이인기(1907)|이인기]] 전 [[영남대학교]] 총장의 회고에 의하면, [[고등문관시험]] 합격 후 [[일본]] 정계 인사를 찾아가 자기의 장래를 물었는데, "잘해봤자 [[간도]][[총영사]]"일거란 식의 말을 듣고 크게 실망했다고 한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79110500329204003&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9-11-05&officeId=00032&pageNo=4&printNo=10492&publishType=00020|1979년 11월 5일자 경향신문]] 조선인 [[도공]]의 후손으로 외무대신까지 오른 [[도고 시게노리]]가 외교관 시험에 합격한 장철수를 개인적으로 불러 격려하고 술도 같이 마셨다고 한다. 상기했듯 [[친일인명사전]]에도 등록된 인물이지만, 정작 본인은 [[독립운동가]]였던 고하 [[송진우(독립운동가)|송진우]] 선생을 존경하고 따랐다고 한다. [[독일]] 패전을 전후한 시기에 [[송진우]]를 방문하여 [[제2차 세계 대전]] 중 [[미국]]이 [[소련]]과 공동전선을 펴기 위해 [[프랭클린 D. 루스벨트|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의 특사로 [[소련]]을 방문한 웰키의 [[소련]] 실태 조사보고서라고 할 《하나의 세계》를 증정하면서 [[송진우]]에게 세계 정세와 전쟁의 전망, 그리고 [[카이로 선언]], [[얄타 회담]], [[대서양 헌장]] 등 구미 각국의 동향을 자세히 전하기도 했다. [[이복형제|이복형]]으로 장성수(張城壽)가 있다. 아호가 감산(堪山)이라 장감산으로도 불리는 인물이다. 그는 [[대구]] 출생이며 [[한학]]과 [[주역]]에 통달했고 [[풍수지리]]와 [[주역|역학]]의 대가로 경북의 어느 산사에 은둔한 거사였다고 한다. 사족으로 [[박정희]]가 그를 사부로 모셨다고. 그래서 장감산이 [[박정희]]에게 [[5.16 군사정변|5.16]]의 거사 날짜를 잡아주고 성공을 계시했다거나, [[동아일보]]에 대한 광고 탄압을 푸는 데 은밀히 간여했다는 등의 --정사 말고-- [[야사(역사)|야사]]가 전하기도 한다.[[https://web.archive.org/web/20221009095921/http://dongne.donga.com/2018/12/24/69-동아일보-사람들-이동욱/|#]] '살아 있는 [[옥편]]'[* [[한자]]를 많이 알았다는 뜻이라기보다는 박람강기(博覽強記)하다는 의미로, 요즘 말로 하면 '살아 있는 백과사전' 정도의 의미다.]이란 별명이 따라다녔고, 생전의 지인들은 그를 '기억력의 천재'라고 회고했다. 언변에도 능해 좌담의 명수로 통했는데 역사, 지리, 문학, 철학, 정치 등의 지식 뿐만 아니라 인간 관계의 숨은 비화에 훤해 화제가 무궁무진했다고 한다. [[술고래]]로 술에 취하면 "이 장철수가... 이 대(大) 장철수가 말이여..."라며 큰소리로 뽐내는 [[술주정|주벽]]이 있었다고 하며, 결국 [[간암]]으로 사망했다. [[분류:1908년 출생]][[분류:1954년 사망]][[분류:인동 장씨]][[분류:일본의 외교관]][[분류:대한민국의 외교관]][[분류:보성고등학교(서울) 출신]][[분류:교토대학 출신]][[분류:도쿄대학 출신]][[분류:고등문관시험 출신]][[분류:경북대학교 재직]][[분류:성균관대학교 재직]][[분류:대한민국의 사회과학 교수]][[분류:간암으로 죽은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