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수서)] [include(틀:북사)] [목차] 張衡 (? ~ 612) == 개요 == [[수나라]]의 인물. 자는 건평(建平). == 생애 == 하내군 사람으로 양주 총관의 사마를 지내다가 600년 3월에 행군총관이 되어 보병, 기병 5만을 이끌고 이영림의 반란을 진압하게 되었다. [[수양제]]가 태자 시절에 그를 가까이 하고 일을 맡기자 수양제를 위해 적통을 빼앗는 책략을 꾀했으며, 602년에 태자좌서자를 지냈다. 604년에는 [[수문제]]가 병이 들자 침전에서 병시중을 들면서 [[후궁]]들을 모조리 내보내어 별실에 가도록 하면서 수문제를 눌러 죽였으며, [[수양제]] 즉위 이후에는 [[어사대부]]가 되었다. 607년에 수양제가 공의 주택을 지날 것이니 짐을 위해 주인 노릇을 해달라고 하자 먼저 달려가서 하내에 도착해 소고기, 술 등을 준비했으며, 수양제는 장형의 집으로 가서 3일 동안 머물고 연회를 베풀었다. 장형이 음식을 다시 헌상했고 수양제는 공경들에게 하사해주도록 하는 것으로 생색을 냈으며, 이는 위사에 이르기까지 미치지 않는 것이 없었다. 610년에는 수양제의 명으로 분양궁을 만들기 위한 도면을 갖추어 이를 상주하게 했지만 [[백성]]들의 [[노역]]을 조금씩 억제하라고 줄여달라는 간언을 했는데, 이로 인해 수양제의 마음이 심히 편안하지 못했다. 장형은 헌사(형벌과 옥을 담당하는 [[관청]])의 일을 맡는 사람으로서 행동거지가 바르지 못했다고 해서 유림태수로 쫓겨났으며, 누번성을 쌓는 역사를 감독하게 되었다. 수양제는 장형이 몸을 상하게 하지 않은 것을 싫어했는데, 이로 인해 다시 유림으로 쫓겨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강도궁을 짓는 일을 담독하게 되었으며, 양현감에게 설도형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이야기를 했다가 [[양현감]]이 수양제에게 상주했다. 또한 [[왕세충]]이 장형이 궁궐을 짓는 도구를 줄이고 있다고 상주하여 가둬졌다가 석방되면서 3월에 [[평민]]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수양제는 장형이 하는 행위를 엿보게 했는데, 612년에 [[첩]]에 의해 황제를 원망하면서 [[조정]]의 정사를 비방했다고 고발되자 [[자살]]하라는 [[조서]]가 내려졌다. == 대중매체에서 == * 2006년 [[SBS]] 드라마 <[[연개소문(드라마)|연개소문]]>에서는 배우 [[손호균]]이 연기했다. [[양소(수나라)|양소]]와 함께 [[양제(수)|수 양제]]의 오른팔이었으며 [[문제(수)|수 문제]]의 근위대장으로서 수 양제에게 궁 안의 소식들을 전달하고 조언하는 역할을 맡았다. 수 양제가 사고를 치자 수 문제 시해를 주장하고 이를 직접 시행한 이도 그였다. 장형은 처음에는 수 문제의 근위장으로 나오며 수 문제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한다. 장형이 본격적으로 수 양제의 사람이 되기 시작한 것은 [[독고가라|문헌황후]]가 사망한 이후로 수 양제가 장례식에서 한바탕 눈물쇼를 펼친 후 수 양제가 자기 방에서 장형과 함께 술과 음식을 먹으며 낄낄대고 장형도 같이 웃으면서 장형이 수 양제에게 술까지 따라주며 장형이 본격적으로 수 양제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묘사되는데 심지어 수 양제가 장형을 이 때부터 '동무'라고 부른다. 문헌황후가 사망하기 이전의 장형은 수 양제와 그닥 가까운 사이가 아니고 그저 수 문제의 명령을 잘 따르는 근위장일 뿐이었는데 수 양제가 태자가 된 후 근위장 장형을 포섭한 것으로 보인다. 장형의 성향을 생각하면 아무리 양광이 표리부동하고 똘끼가 넘차는 놈이여도 아예 군주로써는 폐급의 모습만 보여줬던 문제의 다른 아들들보다는 훨씬 낫다고 생각해서 그를 따른듯 하다. 실제로 작중 양소 역시 같은 판단을 했었고, 실제 역사에서도 그 아들들 중에서 양제가 태자로 뽑힌 것은 워낙 다른 황자들이 폐급이였기 때문이였다. 문헌황후의 장례식 이후부터 태자 수 양제의 사람이 된 장형은 본격적으로 수 양제에게 충성한다. 수 양제가 황제가 되고 나서도 장형은 근위대장직을 유지하나 거기서 그의 영광은 끝이 난다. 권력은 험하게 잡아도 수 양제가 정치는 올바르게 하기를 원했던 그의 바람과는 달리 수 양제는 제대로 폭군의 길을 걸어간다. 그 자신은 비록 황제를 시해한 전적도 있지만 수 양제에게 있어 대장군 [[우문술]]의 자제들인 [[우문화급]]과 [[우문지급]] 형제의 비리를 적발해서 그들을 노비로 만드는데[* 이것도 수 양제가 사적으로 사돈이기도 한 우문술을 생각해서 봐준 것이다. 장형은 국법에 따라 둘을 참수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양제도 원래는 그렇게 하려고 했다. 우문술이 무릎 꿇고 빌어서 겨우 목만은 붙인 것. 문제는 그렇게 노비로 만들어 놓고도 아예 멀리 보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명색만 노비로 만들어 놓은 것도 아닌, 바로 옆의 근위장들로 유임시키면서도 노비로 괴롭히는 짓을 수십년 간이나 해서 결국 스스로 화를 자초한 셈이다.] 일조했을 만큼 원칙주의자인 충신이었다. 장형은 계속 조언을 하고 직언을 아끼지 않았지만[* 장형 스스로도 동무로서, 또한 신하로서, 다른 사람이 하지 못하는 쓴소리를 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다.(제34화)] 그걸 전부 잔소리에 쓴소리로 받아들인 수 양제는 "무인치고 살이 너무 쪘으니 변방으로 가서 좀 요양하다 오라"면서 장형을 좌천시켜 버린다. 양소가 제거당할 때 "다음은 자네 차례다"라고 충고했던 것이 그대로 실현된 셈인데 극에서 퇴장하기 전 장형이 수 양제에게 남긴 마지막 인사는 "꼭 오래 사셔서 제국의 종말까지 보고 가소서". 우직한 인물이나 정치적인 감각은 그리 없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양소는 제거당하기 훨씬 이전부터 '진왕/태자 전하가 언젠가 나를 토사구팽할지 모른다'라는 생각을 진작 하고 있었으나 "태자 자리 떼고 시위장 자리 떼면 우린 친구"라는 수 양제의 사탕발림에 번번이 넘어가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 자기 자신이 변방으로 쫓겨갈 때는 "사나이의 의리를 믿었다" 운운하는데 극 중에서 수 양제가 어떻게 즉위했는가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자의 말치고는 지나치게 허무하고 안이한 감이 있다. 사실 수양제처럼 권력을 잡는 방법은 개판이였거나 패륜을 저질렀어도 민생을 신경쓰거나 괜찮은 자질을 보여준 군주는 조선의 태종이나 묵돌처럼 여럿 있었고 혜제나 한무제처럼 자신이 총애하는 사람은 선을 넘지만 안으면 끝까지 감싸주는 경우도 있었고 도원결의의 사례나 유비처럼 의리를 정말로 중요시 하는 경우도 많았고 작중의 수양제도 다른사람 앞에서는 철저히 가면을 쓰고 연기하지만 장형 앞에서 만큼은 본모습만을 보여줬고 항상 의리나 동무 같은걸 강조했기에 어쩌면 장형도 수양제의 의리나 동무 소리를 정말로 믿은것인지도 모른다. 다만 수양제는 저들과는 심지어 무제랑도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의 싸이코였고 동무니 뭐니 하는건 결국 입에발린 소리에 불과했기에 결국 토사구팽 당하고 만다. '''황제 시해라는 행적과는 달리 의외로 주군과 국가를 위해 바른 말을 하는 충신'''이지만 하필이면 주군이 인간말종이다 보니 세간에서 욕 꽤나 얻어먹은 듯한 묘사도 있다. 양소가 죽고 그의 상가집에서 한바탕 노는 수 양제에게 직언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이밀]]이 "시위장 그 놈이 웬일로 입바른 소리를?"이라고 반응하는 장면이 있다. 실제와는 거리가 멀지만 극 중에서 이밀은 상당히 지용을 겸비한 호걸 쯤으로 그려지는데 그런 인물도 장형을 간신 쯤으로 취급했던 것. [[분류:수당시대/인물]][[분류: 중국의 자살한 인물]][[분류:612년 사망]][[분류:자오쭤시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