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전용성.jpg]] 田溶星 [[1911년]] [[3월 27일]] ~ [[2007년]] [[6월 23일]] [목차] == 개요 == [[대한민국]]의 [[법조인]], [[의사]]. 본관은 [[전(성씨)|담양]](潭陽)[* 경은파 26세 용(溶) 항렬.], 호는 송산(松山)이다. 의사 출신 법관 1호라는 기록을 남겼다. == 상세 == 1911년 3월 27일 [[경상남도]] [[함양군]]에서 아버지 전찬진(田酇鎭)과 어머니 [[양(성씨)|남원 양씨]](南原 梁氏) 양주회(梁柱繪)의 딸 사이의 2남 5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상경하여 [[경기도]] [[경성부]]에 본적을 두었다.[[http://db.history.go.kr/id/im_109_30154|#]] 일찍이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아자부(麻布)수의축산학교[* 현 아자부대학(麻布大學).]에 유학하였으나 [[수의학]]에서 [[의학]]으로 방향을 전환, [[1938년]]에 의사시험에 합격하여 의사 면허를 취득하였다. 해방 당시까지 일제 치하 [[경성부]]에서 전 내과의원을 개업하여 의사로 활동하였다. [[8.15 해방]]을 맞아 [[서울대학교/학부/사회과학대학/정치외교학부|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에 편입[* 동기로 [[구태회]] 전 국회부의장, 차기벽 전 성균관대 명예교수 등이 있다.]한 그는 [[1949년]] 졸업 후 [[고등고시]]에 응시하였으나 당시 치러진 고시에서는 낙방하였다. 이후 [[6.25 전쟁]] 발발로 [[대구광역시|대구]]로 피난간 그는 병원에서 진료를 보는 한편 고등고시 수험을 계속하였고, [[1955년]] 제7회 [[고등고시]]에서 46세의 나이로 행정과와 사법과에 동시 합격하였다.[* 최고령 합격] 합격 후 법관으로 임용된 그는 서울지방법원[* 1950년대에는 서울 각 지방법원이 당시에는 단일한 법원이었다.], 서울형사법원[* 60년대에 민사법원과 형사법원으로 분리]에서 판사로 재직하였는데 이는 최초의 의사 출신 법관이기도 하다. 법관 활동을 하면서도 의학 연구를 계속하였는데, [[1965년]]에는 54세의 나이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서 [[병리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박사 학위 논문 : [[http://www.riss.kr/link?id=T181906|肝保護劑 및 驅蟲劑의 肝細胞 核分裂에 미치는 影響에 關한 實驗的 硏究 : <第1編> 肝保護劑 및 驅蟲劑投與白鼠의 肝細胞劾分裂狀況]](간보호제 및 구충제의 간세포 핵분열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실험적 연구 : <제1편> 간보호제 및 구충제투여백서의 간세포핵분열상황).] [[1967년]] 변호사로 개업하였고, 서울의사회 법률고문, 의료관계 판례연구 서적 출판 등 의학 지식을 갖춘 변호사로 활동하였다. [[1981년]]에는 늦깍이로 본 전공인 [[정치학]]을 살려 무소속으로 70세에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민주정의당]] [[김정례]] 후보와 [[무소속]] [[조순형]]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짧은 정계활동을 은퇴한 후에는 서울라이온스 총재, 국제라이온스 부총재, 서울대학교 총동창회 부회장,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동창회장을 역임하는 등 사회활동에 주력하였으며, 말년에는 다시 의사로 돌아와 전병원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이후 [[2007년]] [[6월 23일]] [[숙환]]으로 별세하였다.[[https://www.hankyung.com/news/article/2007062441331|#]] [[분류:1911년 출생]][[분류:2007년 사망]][[분류:함양군 출신 인물]][[분류:담양 전씨]][[분류:서울대학교 출신]][[분류:대한민국의 의사]][[분류:대한민국의 법조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