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송사)] [include(틀:남송 5대 권신)] ||<-2> '''{{{+1 丁大全[br]정대전}}}''' || || '''작위''' ||단양군후(丹陽郡侯) → 서국공(瑞國公) || || '''성''' ||정(丁) || || '''이름''' ||대전(大全) || || '''자''' ||자만(子萬) || || '''아들''' ||정수옹(丁壽翁) || || '''생몰''' ||1191년 ~ 1263년 (향년 72세) || || '''주군''' ||[[이종(송)|송이종]] || || '''출생지''' ||남송(南宋) 진강부(鎭江府) || [목차] [clearfix] == 개요 == 중국 [[남송]]시대의 정치가. 자는 자만(子萬). 작위는 서국공(瑞國公)이다. [[사미원]] 이후 [[가사도]]와 더불어 [[이종(송)|송이종]] 시기 양대 권신으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무능하고 무책임한 행동으로 남송을 궁지에 빠뜨린 인물로 남송 역사에서 손꼽는 간신 중 한명이다. == 생애 == 정대전은 1191년에 태어났고, 남송 진강부(鎭江府) 출신이다. 가희 2년(1238년)에 진사로 급제하여 소흥부 소산현의 현위를 지냈으며, 이종의 친척을 모시는 시녀와 사통하고 이를 기회로 고위 관직에 진출하였으며, 또한 이종의 환관이었던 노윤승(盧允昇), 동송신(董宋臣)에게 아첨하여 탐욕을 부리고 중앙 정계로 진출하였다. 정대전은 대리사직과 요주 통판을 지냈으며, 입조하여 태부시의 주부를 역임하고 상서다염소검열강주분사(尙書茶鹽所檢閱江州分司)를 지냈으며, 추밀원 편수관을 겸임하고 중앙에서 태부시부, 우사간, 전중시어사를 역임했다. 뒤에 시어사로 승진하고 시독(侍讀)을 겸임한다. 정대전은 보우 4년(1256년)에 남송의 재상이었던 동괴를 탄핵했다. 이종의 조서가 내려오기 직전, 정대전은 밤에 100여 명의 변방 병사들을 동원하여 동괴의 집안을 포위한 뒤 어사대의 공문서를 이용해 동괴에게 나오도록 압박했고 수레에 태워 대리시로 압송하라는 거짓 명령을 내려 동괴를 협박하려고 했다. 북관을 나온 뒤 정대전은 동괴를 버리고 큰 소리로 외치면서 흩어졌으며, 동괴는 천천히 걸어서 접대사(接待寺)로 들어갔고 이때 동괴를 재상에서 파면한다는 조서가 하달되었다. 정대전은 동괴를 내쫓은 뒤 우간의대부, 단명전학사, 첨서추밀원사가 되고 단양군후(丹陽郡侯)로 책봉되었으며, 1257년 동지추밀원사 겸 참지정사가 되었고, 1258년에는 참지정사, 우승상 겸 추밀사가 되어 조정의 요직을 장악했고 서국공(瑞國公)으로 진봉되었다. 이렇게 정대전은 점차 권세가 커져갔고, 자신에 반대하는 이들을 쫓아냈다. 정대전이 내부에서 요직을 장악하던 당시 남송 주변의 상황은 급박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몽골 제국]]이 급속도로 세력을 확대하면서 남송은 몽골과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정대전은 원개(袁玠)를 구강제치부사(九江制置副使)로 임명했는데, 원개는 성격이 탐욕스럽고 가혹했다. 원개는 물고기를 잡는 토호들을 체포하여 잔혹하게 독촉했고, 토호들은 여기에 분노하여 남송을 버리고 자신들이 가진 모든 어선들을 [[몽골 제국군]]에 지원하였다. 한편 태학생인 진종(陳宗), 유보(劉黼), 황용(黃鏞), 증유(曾唯), [[진의중]], 임칙조(林則祖) 등 6명이 대궐 앞에 엎드려 상소를 올려 정대전을 규탄하며 정대전의 파면을 요구하였으나, 옹응필(翁應弼)과 오연(吳衍)이 정대전의 앞잡이로 나서며 진의중 등 6명을 탄압하여 좌천시키고 조정에서 쫓아냈다. 1259년, 몽골군이 악주를 공격한 상황에서 변경의 급보가 조정으로 속속 전해졌는데, 정대전은 이를 숨기고 조정에 보고하지 않았다. 이미 남송의 전황이 점차 불리한 상황에서 정대전은 전술한 이유로 인해 재상에서 파면되고 관문전대학사, 판진강부(判鎭江府)로 강등되었다. 정대전이 재상에서 파면된 이후, 중서사인 홍근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며 정대전의 처벌을 요구한다. >정대전은 음험한 성격과 도둑질로 흉악한 이들을 끌어들이고 충량한 이들을 재앙에 빠지게 했으며, 언로를 막고 조정의 기강을 흐리고 어지럽혔습니다. 청컨대 정대전을 관직에서 쫓아내고 멀리 귀양보내, 국법을 펼치고 천하에 사죄하셔야 합니다. 감찰어사 주비손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정대전은 간악하고 괴벽하며 교활하고 음흉하며, 흉악하고 악랄하며 탐욕스럽고 잔인합니다. 정대전은 폐하의 위광과 형벌을 빌어 천하의 입에 재갈을 물렸으며, 폐하께서 내리신 관작과 봉록을 끼고 천하의 재물을 끌어 모았습니다. 감찰어사 요호신 또한 정대전의 4가지 죄를 논하였는데 그 죄상은 다음과 같았다. >1. 언로를 막았다.(絕言路) >2. 인재를 무너뜨렸다.(壞人才) >3. 민력을 고갈시켰다.(竭民力) >4. 변방의 수비를 그르쳤다.(誤邊防) 이렇게 정대전에 대한 처벌여론이 거세진 가운데 이종은 1260년 정대전에게 중봉대부(中奉大夫)로 물러나도록 명하였다. 그럼에도 대신들의 규탄 여론이 거세지가 정대전을 남강군(南康軍)으로 보냈다가 다시 남안군(南安軍)으로 보냈다. 1261년 [[유응룡]]이 정대전의 귀양을 주청하여 정대전은 다시 귀주단련사(貴州團練使)로 좌천되었다. 정대전은 귀주에서 유옹명(游翁明)과 술을 마신 뒤 실언을 저질렀는데, 유옹명은 정대전이 비밀리에 활과 화살을 만들고 오랑캐와 내통하여 나쁜 짓을 꾀하려 한다고 호소하였다. 이 사실이 주사손(朱禩孫)을 통해 조정에 전달되면서 정대전은 다시 1262년 신주(新州)로 귀양을 가게 된다. 뒤에 태상소경(太常少卿) 유진손(劉震孫)이 다시 정대전을 해도로 보낼 것을 주청하여, 1263년 정대전은 해도로 가는 귀양길에 올랐고, 정대전이 탄 배가 등주(藤州)를 지날 때 정대전을 호송하던 필천(畢遷)이 정대전을 배에서 밀쳤고 결국 바다에 빠져 익사했다. == 기타 == * 안무사 사암지(史巖之)는 다른 빈객들이 물러나기를 기다렸다가 정대전 혼자 남았을 때 정대전을 매우 친절하게 대우하고 나중에 반드시 정대전을 중용하겠다고 약조했다. * 정대전이 회서에 있을 때 총령(總領)인 정우(鄭羽)가 오문(吳門)의 갑부였기에 정대전은 정우의 집안과 혼인하려고 했지만 정우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정대전은 탁몽경(卓夢卿)을 시켜 정우를 탄핵했고 그의 가산을 몰수하였다. 정대전은 아들인 정수옹(丁壽翁)을 장가 보내려다가 상대의 미모를 보고는 스스로 아내로 맞이하여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웃음을 샀다. * 정대전이 몰락한 이후 남송 조정의 전권은 가사도가 틀어쥐게 된다. [[분류:송나라/인물]][[분류:1191년 출생]] [[분류:1263년 사망]][[분류:전장시 출신 인물]][[분류:익사한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