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구당서)] [include(틀:신당서)] ||<-2> {{{#ece5b6 '''{{{+1 당나라의 명장[br]동평열공(東平烈公)[br]{{{+1 程名振 | 정명진}}}}}}'''}}} || || '''{{{#fff 시호}}}''' ||열^^(烈)^^ || || '''{{{#fff 작호}}}''' ||동평군공^^(東平郡公)^^ || || '''{{{#fff 성}}}''' ||정(程) || || '''{{{#fff 이름}}}''' ||명진(名振) || || '''{{{#fff 생몰연도}}}''' ||? ~ 662년 || || '''{{{#fff 출신}}}''' ||명주(洺州) 평은현(平恩縣) (현 [[허베이성]] [[한단시]]의 일부)|| [목차] [clearfix] == 개요 == [[당나라]]의 무장이다. 고향 인근에서 거병한 [[두건덕]]의 휘하에 있다가 당나라로 귀순하여 공을 세웠다. 주로 고구려 쪽 전선에서 적은 병사로도 전공을 올려 명장이란 평을 받았다. 돌궐 전선에서 활약하나, 이후 서경업의 난을 계기로 무측천에 의해 숙청당하는 명장 정무정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별도의 열전은 없고 [[구당서]]와 [[신당서]]에서 자식 [[정무정]]의 열전에 간략하게 정명진의 행적을 소개하고 있다.[* 제2차 고당전쟁에서 루방도행군이 고구려군에게 전멸에 가까운 대패를 당했기 때문이다. 사서에는 없지만, 부장 양사선의 묘지에서 루방도행군과 고구려군이 전투를 벌였다는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이는 당 초기 재상 [[임아상]]도 마찬가지.] == 생애 == === 당나라로 귀순 === 수말당초 두건덕 밑에서 보락현령(普樂縣令)을 했는데 유능하다는 평판이 있어 적들이 감히 침범하지 않았다. 621년(무덕[* 중국 당 고조의 연호] 4년) 음력 3월 당나라에 귀순하여 영년현령(永年縣令)이 되었다. 영년현은 아직 두건덕 치하에 있어 정명진은 병사를 이끌고 하북을 공격하였다. 업현을 야습하여 남녀 천여 명을 사로잡아 돌아오는데 젖이 나오는 부인 90여 명은 돌려보내니 업현 사람들이 그 자비로움에 감격하였다. 5월 두건덕이 평정되면서 비로소 영년현에 부임하였다. === 유흑달 토벌 === 두건덕의 잔당인 [[유흑달]](劉黑闥)이 두건덕의 복수를 위해 재차 거병하여 섣달[* [[자치통감]] 189권 당기 제5 고조 무덕 4년]에는 명주가 넘어가는 바람에 그 자사 진군빈(陳君賓)과 함께 장안으로 피하였다. 어머니 반씨(潘氏)와 처 이씨(李氏)는 유흑달에게 잡히고 말았다. [[이세민]][* 훗날 태종]의 유흑달 토벌에 참여하였다. 622년 3월 유흑달이 기주(冀州), 패주(貝州), 창주(滄州), 영주(瀛州) 등지로부터 군량을 조달받고 있었는데, 정명진이 천여 명으로 그 수송로를 타격하여 배와 수레를 몽땅 부쉈다. 유흑달이 대노하여 정명진의 어머니와 처를 죽였다. 623년 유흑달이 붙잡혀 명주에 있던 태자 이건성에게 보내졌다. 정명진은 손수 유흑달을 참수하길 청하여, 그 머리로 어머니에게 제사지냈다. 정명진은 영주도독부장사(營州都督府長史)에 임명되고 동평군공(東平郡公)에 봉해졌으며 많은 상을 받았다. 이후 명주 자사를 거쳐 우효위장군(右驍衛將軍)으로 승진하였다. === 여당전쟁 === 645년 제1차 여당전쟁이 일어나 장량(張亮)의 수군에 평양도행군총관(平壤道行軍總管)으로 소속되었다. 밤중에 [[비사성]]의 서쪽으로 진입하여 함락에 공을 세우고 8,000명을 생포했으며 독산진(獨山陣)도 격파하였다. 655년 영주도독 겸 동이도호(東夷都護)까지 올랐다. 5월 좌위중랑장 [[소정방]]과 적은 병사로 요수를 넘어 고구려를 침공했다. 얕보고 귀단수(貴端水)를 건너온 고구려군과 싸워 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고, 외곽과 마을을 불태우고 돌아왔다. 658년 우령군중랑장(右領軍―) 설인귀를 이끌고 고구려의 적봉진(赤烽鎭)을 침공하여 400여 명의 목을 베고 100여 명을 사로잡았다. 고구려 장군 두방루가 이끄는 3만 병력에 [[거란]] 병사로 맞서서 이기고 2,500명의 목을 베었다. 그 뒤 진주(晉州)와 포주(蒲州)자사를 지냈다. 661년 제2차 여당전쟁에 누방도행군총관(鏤方道行軍總管)으로서 여섯 부대 중 한 부대로 참전하였다. 662년에 죽어서 우위대장군에 추증되고 , 시호는 열(烈)이라 하였다.[* 사서에는 루방도행군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부장 양사선 묘지에 보면 전쟁을 치루던 중에 큰 봉황새가 이지러지기 시작해 하늘을 날던 날개가 떨어져 드리우고, 큰 고기가 길을 헤매어 큰 파도에 비늘이 떨어져 나가는 사건이 벌어져서 양사선이 그의 나이 58세였던 661년 10월 16일에 군대에서 죽어서 묻혔다고 나온다.][* 양사선의 묘지에는 정명진의 루방도행군이 661년 신성을 침략하여 초전에는 이겼지만 이후 기록이 없다. 이는 당군이 신성 공략에 실패하였다는 것을 시사한다.] == 평가 == [[두건덕]] 휘하에 있을 때부터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644년 11월 태종이 명주자사 정명진이 용병을 잘한다는 말을 듣고 그에게 고구려 정벌에 대한 방략을 물었다. 정명진의 답변이 매우 재민했으므로 장수나 재상이 될 만한 그릇이라고 격려하며 곧 일을 맡기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정명진이 감사의 예를 표하는 것을 깜박하였다. 태종이 이를 엄하게 꾸짖자, “신은 광야에만 있느라 황제의 질문을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었습니다. 오직 그 대답에만 온 신경을 집중하다가 그만 예를 표하는 것을 잊고 말았습니다.”라 태연하면서도 재치있게 답하였다. 태종이 “짐이 타인을 견책할 때마다 20여 년을 곁에 있어온 [[방현령]]은 늘 안색을 주체하지 못했는데, 정명진은 평생 짐을 보지 못했는데도 무서워서 떠는 기색도 없이 말의 조리를 잃지 않았다. 참으로 뛰어난 자로구나!”라며 감탄하였다. 그날로 우효위장군에 앉히고 평양도행군총관을 맡겼다. [[여당전쟁]] 때는 누차 적은 병력으로도 많은 적을 상대했기에 명장이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 기타 == * 고구려 원정에 참전한 중요 무장 중 하나이지만, 구당서 및 신당서에는 자식 정무정의 열전에서 간략히 소개되어 있고 대부분 역사서에서는 제2차 고당전쟁 때 루방도행군 사령관을 맡았다는 것 빼고 죽었다는 기록만이 나오는 등 세부 전투 기록이 전혀 나와 있지 않다. * 이후 그의 부장 양사선의 묘비가 발견되었는데, 루방도행군이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대패했다는 것을 시사하는 기록이 나와 있다. 양사선묘지에 따르면, 정명진의 루방도행군은 제2차 고당전쟁 당시 신성 지역을 공략하였으나 실패하고[* 신성 공격 이후의 기록이 없는데, 정명진의 루방도행군은 신성 공격에 실패했음을 시사한다.], [[글필하력]]의 요동도행군과 [[소사업]]의 부여도행군이 철군할 때 요동 지역의 고구려군의 집중공격을 받아 난전 중 전사했음을 알 수 있다. * 최근 제2차 고당전쟁에 관한 논문에는 정명진의 루방도행군의 행적에 대해 묘사한 것이 나왔다. 이 논문에 따르면, 661년 루방도행군대총관 정명진이 신성을 공격해 처음에는 승리하였으나, 결국 패하고 말았다.[* 정명진의 루방도행군이 신성을 공격하였으나 아무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실패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소사업]]의 부여도행군과 [[글필하력]]의 요동도행군이 철륵 반란 진압으로 인해 본국으로 철군할 때, 요동 방면의 고구려군이 정명진의 루방도행군을 집중 공격하였는데 그 와중 사망했다고 나와 있다. 루방도행군은 부여도행군과 요동도행군이 본국으로 철군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 주는 역할을 하였고 정명진과 양사선은 고구려군과의 난전 중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각주] [[분류:수당시대/인물]][[분류:한단시 출신 인물]][[분류:당나라의 장수]][[분류:662년 사망]][[분류:삼국통일전쟁/사망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