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承復 [[1520년]]([[중종(조선)|중종]] 15) ~ [[1580년]]([[선조(조선)|선조]] 13) [목차] == 개요 ==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경주 정씨|경주]](慶州), 자는 경윤(景胤)이고 호는 옥계(玉溪)이다. [[을묘왜변]] 때 활약한 명장이다. == 생애 == [[세조(조선)|세조]] 시대 계림군(鷄林君) 정지년(鄭知年)의 현손(玄孫)으로, 부친은 돈용교위(敦勇校尉:정6품 무관의 품계) 정내(鄭鼐)이고, 모친은 훈련원 습독(訓鍊院習讀:종9품) [[개성 왕씨]] 왕침(王琛)의 딸이다. 부인은 운산군수를 지낸 [[안(성씨)|죽산 안씨]](竹山 安氏) 안수금(安秀嶔)과 [[연안 김씨]] 김엽(金燁)의 딸이다. [[전라도]] [[순천시|순천도호부]](현 [[전라남도]] [[순천시]]) [[http://suncheon.grandculture.net/suncheon/toc/GC07600603|출신으로]], [[1544년]](중종 39)에 별시 무과에 을과 1위, 전체 2등으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MU_6JOa_1544_412025|급제하고]] 2년 뒤인 1546년([[명종(조선)|명종]] 1) 중시(重試)[* 조선시대 당하관(堂下官) 이하의 문무관에게 10년마다 한번씩 보이는 과거.] 무과에 병과 1위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MU_6JOa_1546_160004|급제하여]] 절충장군(折衝將軍:정3품 무관의 품계)으로 승진했다. 이후 옥구현감(沃溝縣監:종6품)을 역임하였다. [[1555년]], 옥구 현감에 재직하던 중에 왜구가 전라도 남부 지역에 침입하는 [[을묘왜변|]]을 맞아 전라도까지 가서 왜구들에 맞서 싸워 공을 세웠다[* 왜구의 습격이라 전쟁 축에도 못 끼지만 당시 전남의 10개 성이 함락되고 전라도 병마 절도사와 진도 군수가 전사했다.]. [[1559년]], 기미왜변(己未倭變)이 터지자 어란진만호(於蘭鎭萬戶)로 출정하여 [[추자도]](楸子島)에서 큰 승리를 거두고 왜선 1척을 포획하여, 감사 박충원(朴忠元)과 수사 최희효(崔希孝)가 포계(褒啓)를 올려 웅천현감(熊川縣監)이 되었고 얼마 안되어 영덕현령(盈德縣令)에 제수되었고, 또 자리를 옮겨 함흥판관(咸興判官)을 역임했다. 사후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증직되었고, [[순천]]의 옥계서원(玉溪書院)에 배향되었다. == 가족 == 첫부인 죽산안씨와 2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정사안(鄭思安), 정사익(鄭思翊)이고 사위는 정유경(鄭惟敬), 한척(韓惕)이며, 둘째 부인 연안김씨와 3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정사준(鄭思竣), 정사횡(鄭思竑), 정사정(鄭思靖)이고 사위는 이명남(李命男), [[안방준]](安邦俊)이다. 측실에서 아들 1명을 두었는데 정사립(鄭思立) 이다. 그의 아들 정사준(鄭思竣)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李舜臣)의 군관으로서 [[조총]]의 제작에 공이 있었고, 조정의 식량이 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조카 정빈(鄭𢣐)과 함께 군량미 천여 석을 모아, 뱃길로 [[의주]](義州) 행재소까지 운반하였고, 정사횡(鄭思竑)과 정사정(鄭思靖)은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다시 수백 석의 군량미를 모아 충무공(忠武公) 이순신의 휘하에 들어가서 [[노량해전]]에 참전하여 적선을 격퇴하는 공을 세웠다. [[원균]]을 극딜하는 내용이 담겨 있는 은봉전서를 쓴 저자이자, 의병장 및 학자 [[안방준]](安邦俊)이 그의 사위였다. [[분류:조선의 무관]][[분류:순천시 출신 인물]][[분류:경주 정씨]][[분류:1520년 출생]][[분류:1580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