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1553년 출생]][[분류:1637년 사망]][[분류:동래 정씨]][[분류:조선의 문관]][[분류:좌의정]][[분류:우의정]][[분류:북인]] [include(틀:역대 조선 정승(중종-광해군))] || '''{{{#f0ad73 정창연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include(틀:역대 조선 정승(인조-경종))] ---- [include(틀:북인)]}}} || ||<-2> '''[[정승|{{{#f0ad73 조선 정승}}}]][br]{{{+1 정창연}}}[br]鄭昌衍''' || || '''출생''' ||[[1553년]] [[1월 20일]][* [[율리우스력]] [[1월 10일]].][br](음력 [[1552년]], [[명종(조선)|명종]] 7년 12월 26일)|| ||<|2> '''사망''' ||[[1637년]] [[1월 9일]] ~ [[1월 31일]] 사이 (향년 83 ~ 84세)[br](음력 [[1636년]], [[인조]] 14년 12월 14일 ~ 인조 15년 1월 6일 사이)[*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난갈 때 수원으로 피난갔으나 전쟁이 끝난 후 사망이 확인되었다.]|| ||[[경기도#역사]] [[수원시/역사#조선시대|수원도호부]] 쌍부리|| || '''[[본관|{{{#f0ad73 본관}}}]]''' ||[[동래 정씨]]|| || '''[[자(이름)|{{{#f0ad73 자}}}]]''' ||경진(景眞)|| || '''[[아호|{{{#f0ad73 호}}}]]''' ||수죽(水竹)|| || '''부모''' ||부친 - [[정유길]][br]모친 - [[원주 원씨]] 원대은개(元大隱介, {{{-3 1492 ~ ?}}})[* 원계채(元繼蔡)의 장녀로, [[정석군]]의 외증손녀.]|| || '''형제자매''' ||'''1남 5녀 중 4째'''[* [[http://royal.aks.ac.kr/Ge/JokboPageData?bookId=JSK_WJ_K21047&pid=14672|#]]][br]누나 - 정환(鄭還, {{{-3 1533 ~ ?}}})[br]누나 - 정양정(鄭楊貞, {{{-3 1541 ~ 1620}}})[* [[광해군]]의 왕비 [[문성군부인]]의 모친으로, 봉호는 봉원부부인(蓬原府夫人)이다.][br]누나 - 정말정(鄭末貞, {{{-3 1542 ~ ?}}})[br]누나 - 정혜정(鄭蕙貞, {{{-3 1546 ~ ?}}})[br]여동생 - 정윤양(鄭胤養, {{{-3 1559 ~ ?}}})|| || '''부인''' ||[[청주 한씨]] - 한세건(韓世健)의 딸|| || '''자녀''' ||'''2남'''[br]장남 - 정광성(鄭廣成, {{{-3 1576 ~ 1654}}})[br]차남 - 정광경(鄭廣敬, {{{-3 1586 ~ 1644}}})||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 중기의 [[문관]]. == 생애 == 1552년([[명종(조선)|명종]] 7년)에 태어났다. 증조할아버지는 [[중종(조선)|중종]] 때 [[영의정]]을 지냈던 [[정광필]]이고 할아버지는 강화부사를 역임했던 정복겸이며 아버지는 [[좌의정]]을 지냈던 [[정유길]]이다. 18세이던 1579년(선조 26년)에 [[과거 제도#문과|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이조(조선)|이조]] 좌랑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좌부승지와 부제학, 이조 참판, 지돈녕부사 직을 역임했다. 누이 중 한 명이 [[광해군]]의 장모([[문성군부인]]의 어머니)여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임진왜란]]이 발발한 후 광해군이 [[분조]]했을 때 세자좌빈객 자격으로 여기에 참여하여 광해군과 함께 움직였다. 이후 예조판서와 대사헌, 동지성균관사, 좌참찬 직에 임명받았다가 해직된 후 다시 맡기를 여러 번 했다. 또한 [[이조(조선)|이조]], [[형조]]의 [[판서]]도 역임했으며 지중추부사와 [[혜민서]] 제조로서도 활동했다. 그리고 정승으로서는 실세인 [[우의정]]과 [[좌의정]] 직까지 맡았다. 상술했듯, 정창연은 [[광해군]] 장모의 형제였고 [[분조]]에서도 함께 활동한, 광해군의 핵심 지지 세력 중 한 명이었고 당파도 당연히 [[대북]]이었다. 그런데 [[우의정]]을 지낼 무렵에 조정에서 큰 사건이 벌어졌다. 바로 광해군이 적모 [[인목왕후]]를 [[덕수궁|서궁]]에 유폐시키고 동생 [[영창대군]]을 [[강화도]]로 [[귀양]]보낸 것이다. 정창연은 이에 반대했고 이때 뜻을 같이하는 류몽인, 이명, 유만 등과 함께 [[중북]]으로 분당했다. 그리고 유배지에서 사망한 영창대군의 죽음에 강화부사 정항이 책임져야한다는 상소를 부사직 정온이 올렸는데, 이 상소를 본 [[광해군]]이 분노하여 정온을 잡아들이고 국문하려하자 정창연이 직접 나서서 광해군에게 정온을 용서해달라는 청을 올렸다. --님 하해와 같은 마음을 좀 보여주셈--[[http://sillok.history.go.kr/id/koa_10603007_001|#]] 그러나 광해군은 끝내 정온을 친국한 뒤 [[제주도]]로 유배보냈고, 이에 실망해서였는지는 몰라도 직후 정창연은 사직소를 올렸다. 표면적인 사유는 병 때문이었다. 그러나 광해군은 받아주지 않았고 계속된 요청 끝에 결국 2년이 지나서야(...) 겨우 물러날 수 있었다. [[http://sillok.history.go.kr/id/koa_10804009_004|#]] 얼마 지나지 않아 영돈녕부사로 임명받기는 했으나 이 자리는 왕실의 친인척을 관리하는 자리라 그저 실권없는 명예직일 뿐이었다. 이후 정창연은 [[두문불출]]하고 칩거에 들어갔다. 하지만 폐모론을 반대했다는 전적 때문인지 [[대북]]파는 계속해서 그에게 공격을 가했다. 유학 한천정, 한보길, 윤지임, 이구 등은 그를 귀양보내라는 [[상소]]를 계속 올렸고[[http://sillok.history.go.kr/id/koa_10911026_012|#]] 심지어 유학 송영서는 칩거 행위 자체를 꼬투리 잡기도 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oa_10912002_013|#]] [[인조반정]] 이후에는, [[북인]]이었음에도 무사했다. 이는 폐모살제에 반대하여 대북파의 공격을 받았으며, [[서인]] 측과도 무난하게 지냈기 때문이다.[* 애당초 정창연의 외조카 중 2명이 [[서인]] 세력을 대표하는 [[김상용]], [[청음 김상헌|김상헌]] 형제이다.] 그래서 정창연은 반정 직후에 [[좌의정]]으로 복귀했고[[http://sillok.history.go.kr/id/kpa_10103024_002|#]] 얼마 후에는 영중추부사가 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pa_10109021_005|#]] 1625년(인조 3년)에는 판중추부사로 임명받았다가[[http://sillok.history.go.kr/id/kpa_10302025_003|#]] 3년 뒤에 허유 역모사건에서 이름이 언급되자 이에 책임지고 사직을 청했으나 인조가 윤허하지 않았다.[[http://sillok.history.go.kr/id/kpa_10601003_006|#]]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이 한창일 때 세상을 떠났다. 향년 85세.[* 당시 나이 셈법인 [[세는나이]] 기준.] == 가족과 후손 == 정창연이 페모론에 참여하지 않았기에 후손들은 정치적으로 생존했고, 서인에 합세한다. 다른 북인출신 가문들의 몰락을 생각하면 놀라울 정도다. 장남 정광성은 형조판서를 지냈으며, 차남 정광경은 이조 참판 직을 맡았다. 정광성의 아들 [[정태화]]는 현종의 치세에 영의정을 지냈다. 정태화의 다섯번째 아들 정재륜은 정태화의 동생 정치화에게 입적하고, 효종의 딸 [[숙정공주]]와 결혼했다. 그래서 동평위 작위를 받은 [[부마]]가 되었다. == 묘역 == 현재 [[서울특별시]] [[동작구]] [[사당동]]에 정창연과 그의 조상 및 후손들의 묘역이 있다.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수죽정공신도비.jpg|width=100%]]}}} || || {{{#f0ad73 ''' 동래 정씨 임당공파 묘역에 있는 정창연의 신도비[* [[https://www.heritage.go.kr/heri/cul/imgHeritage.do?ccimId=1636211&ccbaKdcd=21&ccbaAsno=00620000&ccbaCtcd=11|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 정창연의 묘 동남쪽에 그의 일생과 업적을 적은 신도비가 있다. 그의 호인 수죽을 붙여 '수죽정공신도비'라고 부른다. 1646년(인조 24년)에 세웠으며, 어깨 부분에 [[연꽃]] 문양과 가운데에 서수를 조각한 받침돌 위에 비신을 올리고 그 위에 화려한 조각이 있는 머릿돌을 올린 형태이다. 이경여가 비문을 짓고, 심지원이 글씨를 썼다. 1984년 11월 3일에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62호로 지정받았으나 2008년 12월 30일에 해제되고 61호 [[정유길#묘역|동래 정씨 임당공파 묘역]]으로 통합되었다. [각주][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정유길, version=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