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정창원 정창.jpg|width=100%]]}}}|| || {{{#000,#fff {{{-1 정창원 정창(正倉).}}}}}} || [목차] [clearfix] == 개요 == '''쇼소인'''([ruby(正倉院, ruby=しょうそういん)], 정창원)은 [[도다이지]](東大寺, 동대사) 북서쪽 약 300m 거리에 있는 [[일본 황실]]의 [[창고]]이다. 검은 [[통나무]]를 쌓아(귀틀식) 만들어졌으며, 건물 전체가 지면에서 높이 들어올려진 모습이 특이하다. 이는 지면에서 올라오는 습기를 피하기 위한 것으로, [[고대]]에는 많은 건물들이 이런 식으로 지어졌다. 이렇게 건물을 땅에서 들어올리는 양식을 우리나라에서는 고상식(高床式)이라고 부르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시대까지는 흔한 형태였다.[* 땅에서 올라오는 습기로부터 목조건물을 들어올린다는 것은 흔하게 할 수 있는 발상이기에 중세 러시아에서도 고상식 가옥이 있었을 정도.] == 연혁 == 도다이지의 부속 시설로서 일본 황실의 유물 창고로 쓰였다. 창건연대는 [[729년]]에서 [[749년]] 사이로 추정된다. 원래 정창원의 정창은 도다이지 외에도 여러 절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현재는 모두 없어지고 도다이지에만 1동 남았다. 긴 건물이기 때문에 북창, 중창, 남창으로 분류한다. [[756년]] 교모 황후는, 남편인 [[쇼무 덴노]] 7주기에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숟가락]]을 비롯한 [[칼]]·[[거울]]·[[무기]]·목칠공예품·[[악기]] 등 애장품 600여 종을 [[사십구재]]에 맞춰 헌납하였다고 한다. 그 뒤로도 고묘 황후는 3번에 걸쳐서, 자신과 쇼무 천황과 연관이 있는 물건을 봉헌했다. 이 헌납품에 대해서는, 현존하는 5종류의 「헌납장」이라고 하는 문서에 기록되어 있다. 이 보물은 쇼소인에 보관되어 있다. 오랫동안 도다이지의 관리 하에 있었지만, 지금은 [[궁내청]] 정창원관리소가 관할한다. 소장품은 1년에 한번 가을에 [[나라국립박물관]]에서 열리는 [[전시회]]에서 선별적으로 볼 수 있으며, 건물은 궁내청 관리인의 지도 하에 멀리서 구경할 수 있다. 창고라 해서 작을 것 같지만, 거의 [[경복궁 경회루|경회루]]만큼 크다. == 유물과 가치 == 역사가 굉장히 긴 왕실 유물창고로, [[한국]]의 [[삼국시대]] 시기의 유물들도 다수 소장하고 있다. 2018년 정창원 국제학술심포지엄에서는 9천여 점으로 알려진 정창원 소장품 가운데 백제, 신라, 중국 등 외국산 물품이 5%에 불과하다고 일본 관계자들이 설명했으나, 당시 익명을 요구한 한 연구자는 "10년 전에는 6000점이라고 들었는데, 내놓는 수치가 달라져 확신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라고 지적했다. 한반도 국가들에서 유래한 유명한 문물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백제]]의 [[의자왕]]이 [[일본]]에 선물했다는 [[http://m.cyberoro.com/news/news_view.oro?num=517955&agree=1|[[바둑판]], [[바둑알]]]][* [[일본]]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 된 [[바둑]] 세트이다. 이 바둑판은 [[코끼리]] 문양 등 [[한반도]]에서 사용되지 않은 문양이라 [[중국]]이나 일본은 중국에서 제작된 바둑판이 [[백제]]를 경유해 [[왜]]로 들어왔다고 추측했다. 그러나 바둑판의 재질이 한반도의 소나무로 밝혀져 백제에서 제작된 사실이 확인됐다.] * [[민정문서]]와 [[제2신라문서]]. 이에 대해서는 후술. * 매신라물해(買新羅物解) 문서. [[신라]]에서 일본으로 수입한 물품 리스트. * [[통일신라]]의 악기인 [[정창원 신라금|신라금]] * [[정창원 비파]] * [[정창원 신라 유기그릇]] * [[정창원 신라 유기접시]] * [[정창원 신라 양탄자]] * [[정창원 신라 숟가락]]. 신라에서 수입한 이후 포장도 뜯지 않았다. * [[정창원 신라 인삼]] * [[정창원 신라 먹]] 등등 [[삼국시대]], [[남북국시대]]의 한국과 교류를 하면서 얻은 유물들도 다수 보관중이다. 이외에도 [[면류관]]과 관련 [[의복]]들이 남아있다고 하며, 이를 백제에서 의복과 제작 기술을 전해준 기록과 결부시켜 백제의 의복이 아닐까 추측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의복을 묘사한 그림은 공개되었지만 유물 자체가 일반에 공개된 적은 없다. 위에 언급된 유물들은 만약 한국에 있었으면 하나하나 [[국보]] 지정은 무조건 된다라고 봐도 좋을 정도로 희소하고 중요한 문화재들이다. [[아키히토]] 덴노의 맏손주인 [[마코 공주]]는 [[가쿠슈인]] 초등과 5학년 때 가족과 함께 정창원을 방문했던 일을 초등과 졸업 작문에 쓰기도 했다. [[마코 공주]]는 정창원에서 유물들을 둘러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하며, [[미술]]에 대한 깊은 관심을 드러냈다. 훗날 마코 공주는 [[국제기독교대학]] 교양학부 예술과학과를 졸업한 후 [[영국]]과 [[일본]]의 대학원에서 미술품 및 박물관학을 공부하였고, 박물관 연구원 등의 일을 하고 있다.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32&aid=0002854415|정창원 보물들에 대한 한일 공동 심포지엄에 관한 기사]]. 사진 자료와 내용이 풍부하게 나와있다. 안에 있는 보물들에 대해 연구할 경우, 역사가 12번도 바뀔 수 있다고들 하지만 한국 학자는 물론이고 일본 학자들에게조차 연구를 잘 허락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정창원 유물들에 대한 전문개설서는 1996년 나온 최재석 전 고대교수의 <정창원 소장품과 통일신라>가 유일할 만큼 연구여건이 답보 상태인데, 일본 쪽 연구자들도 평상시엔 수장고에 일절 접근하지 못하기에 답답한 심정은 마찬가지라고 한다. 1946년 이래 매년 10월 국립나라박물관에서 한 차례 열리는 소장품 전 외에는 실물로 볼 수 있는 기회가 전혀 없다. 2018년 정창원 국제학술심포지엄 당시 사이토 나카에 나라 국립박물관 학예부장도 명확한 유물 내역은 자신도 모른다고 말했다. [[일본 정부]] [[궁내청]]과 보수적인 학자들은 고대사의 [[일본 황실]]과 연관된 것을 연구하는 데 긍정적이지 않고, 특히 한반도와 관련된 보물은 연구성과를 학계에 공개할 경우 일본에 득이 될 것이 많지 않기에 연구가 폐쇄적이라는 게 중론이다.[[https://n.news.naver.com/article/028/0002402713|#]] 정창원 황실 유물 중에는 느티나무로 만든 가구인 ‘적칠관목주자’가 있었는데 유물 목록 중 '국가진보장'에 '적칠관목주자'가 "백제 [[의자왕]]이 내대신([[후지와라노 카마타리]])에게 하사한다."라고 유래가 적혔다. 현재 남아있는 것은 '적칠문관목주자'인데 일본 학계는 이 역시 백제에서 유래된 것으로 여긴다.[[https://n.news.naver.com/article/022/0003255840|#]] 위에 나열된 신라와 백제에서 가져온 물품 목록만 보아도 그 당시 일본에서는 스스로 만들 수 없어 왕실과 귀족들이나 간신히 쓰던 최첨단 문물들이다. [[칠지도]]처럼 백제의 우월한 기술력으로 만들어진 물품을 공개적으로 연구하다간 일본 사학계의 자존심이 꺾이는 건 물론이고, 당대 국제관계에서 누가 갑이고 누가 을이었는지 밝혀져 한국의 자부심만 높여주므로, 일본 입장에서는 왕실 창고에 이런 진귀한 물건이 있다는 것만 보여주고 학술연구는 아주 가끔씩 일본 학자들에게 허락할 수밖에 없다. [[민정문서]]나 [[정창원 신라 숟가락]][* 이건 신라에서 수입한 후 포장도 뜯지 않고 지금까지 보관 중인 미사용 숟가락 묶음이다.] 등 정당한 방식으로 입수해 지금까지 소장하고 있는 유물들도 있다. [[대한제국]] [[고종(대한제국)|고종]]의 것으로 여겨지는 [[두정갑]] 투구 등 일부 유물들은 일본이 [[조선]] 말기에 도굴하여 가져간 [[고려청자]]들처럼 침탈 등 불법적 경로로 얻은 보물이란 사실이 연구 결과 공개될 가능성도 있고, 한국 관련 유물을 일부만 조금씩 공개했던 전례 등을 봤을 때 정창원의 보물들에 대한 한국학계의 전면적인 학술 연구가 시행될 가능성은 별로 없다.[* 한편 같은 궁내청 소속의 서릉부도 보유 도서의 목록을 전부 공개하고 있지 않다는 의혹이 있고, 필사본 [[화랑세기]] 떡밥도 여기서 시작되었다.] [[8세기|8]]~[[9세기]] [[통일신라]]의 지방 통치에 관한 중요한 자료인 신라 [[민정문서]][* [[신라장적]](新羅帳籍), [[신라 촌락 문서]]라고도 한다]가 바로 이 정창원에서 발견되었다. [[1933년]]에 도다이지 정창원 중창 소장의 유물을 정리하다가 손상되었었던 [[불경]]인 [[화엄경론]](華嚴經論)의 책갑을 수리하는 도중 내부의 포심에 덧붙인 종이 중에서 발견되었다. 이 시기의 불경은 긴 [[비단]]이며, 그것을 [[대나무]] 등으로 만든 책갑이라는 표지로 말아 보관하는 형태이기 때문에 현대인이 쉽게 그 모습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아무튼 신라 민정문서는 불경의 [[포장지]]로 쓰였던 것. 이를 [[일본]]이 [[통일신라]]의 귀중한 문서를 훔쳤다고 오해하면서 분통을 터뜨리는 사람들도 있기도 하지만 일본은 아주 오랫동안 [[불경]]을 한국에서 들여왔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신라인들이 제품을 보호하기 위해 [[종이]]를 [[포장지]]로 덧댄 것이다.[* 서양에서 [[자포니즘]]을 일으킨 원인이 된 [[우키요에]] 민화 역시, 당시 일본의 [[도자기]]를 수입해서 [[유럽]]에 가져다 팔던 무역선들이 도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일본에서 폐지로 버려지는 우키요에 민화 복사본 폐지로 [[도자기]]를 감싸 운반해 갔기 때문이다.] 종이를 제품의 포장지로 쓰는 것은 동양에서는 흔한 방법이었다. 이 과정에서 아무래도 종이가 넘쳐나는 것은 아니니 이미 사용하고 난 후의 쓸모없는 종이를 활용하였는데, 이미 쓸모가 없어진 민정문서를 가져다가 재활용했다고 추정한다. 민정문서란 것은 전국의 촌락을 몇 년 주기로 조사하는 것이었고, 당시에는 수천 장씩 널려 있는 흔한 문서였을 것이다. 오늘날로 치면 한국 [[동사무소]]에서 통계 조사한 공문서가 일본으로 흘러가 일본 불경의 포장지로 사용된 것.[* 비유가 그렇다는 거지 오늘날은 이관, 보존절차가 갖춰져 있기도 하거니와 실제로 이렇게 했다간 공문서 취급 부적정으로 징계나 처벌을 받을 수 있다.] 다만 지금에 와서는 다른 기록들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삼국사절요에 인용된 부분을 제외하면 소실된 상태이기 때문에 민정문서의 가치가 높아진것이다. 그리고 이 민정문서는 일본 화엄경론의 일부였기 때문에 결국 촬영 후 원 상태로 도로 붙여 두었고, 지금은 사진본으로만 볼 수 있다. [각주][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도다이지, version=191, paragraph=3)][[분류:정창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