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ffc700 {{{+1 정후겸}}}[br]鄭厚謙}}}''' || || '''본관''' ||[[연일 정씨]][* 19세 공(恭) 항렬이다.] || || '''출생''' ||[[1749년]]([[영조]] 25) [[경기도]] 인천도호부 [[제물포]] || ||<|2> '''사망''' ||[[1776년]]([[정조(조선)|정조]] 원년) [[함경도]] [[경원군|경원도호부]] || ||향년 27세, 사사 || ||<|2> '''부모''' ||생부 [[정석달]][br]생모 [[전주이씨]] || ||양부 [[정치달]][br]양모 [[화완옹주]] || || '''가족''' ||아들 정00[br]손자 정운구[br]증손자 [[정준택]][br] 현손자 [[정경택]]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연일 정씨|연일]](延日)[* 문정공파-판결사공파 22세 겸(謙) 항렬.], 자는 백익(伯益). 초명은 정인대(鄭麟大).[* [[http://sjw.history.go.kr/id/SJW-F33050030-00500|#]]] 영조의 딸 [[화완옹주]]의 시가 쪽 먼 친척 출신 양자이자 [[외척]]이다. [[북한]] 정무원 부총리를 지낸 [[정준택]]은 그의 증손자이며, 북한 국가보위상 [[정경택]]은 그의 현손자이다. == 생애 == 1749년 [[경기도]] 인천도호부 [[제물포]](현 [[인천광역시]] [[중구(인천)|중구]])에서 생선장수로 생계를 잇던 아버지 정석달(鄭錫達)[* 1757년 종9품 [[참봉]]을 시작으로[[http://sjw.history.go.kr/id/SJW-F33050030-00500|#]], 정후겸의 후광을 입어 1759년 종6품 상의원 주부(尙衣院主簿)[[http://sjw.history.go.kr/id/SJW-F35030200-03000|#]]·정6품 [[사헌부]] 감찰(監察)[[http://sjw.history.go.kr/id/SJW-F35050280-00900|#]]·종6품 연기현감(燕岐縣監)[[http://sjw.history.go.kr/id/SJW-F35090250-00600|#]], 1765년 종5품 사복시 판관(司僕寺判官)[[http://sjw.history.go.kr/id/SJW-F41040250-01300|#]]·종4품 배천군수(白川郡守)[[http://sjw.history.go.kr/id/SJW-F41080050-00300|#]], 1768년 종5품 대구판관(大丘判官)[[http://sjw.history.go.kr/id/SJW-F44120210-00900|#]], 1772년 종3품 서흥도호부사(瑞興都護府使)[[http://sjw.history.go.kr/id/SJW-F48010230-02300|#]]·정3품 상주목사(尙州牧使)[[http://sjw.history.go.kr/id/SJW-F48120210-00900|#]] 등 문과는 커녕 생원·진사시에도 등과하지 않았는데도 정3품 요직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과 어머니 [[전주 이씨]] 이기태(李基泰)의 딸 사이의 6남[* [[http://sjw.history.go.kr/id/SJW-G00040150-01800|#]]]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생가 형인 정일겸(鄭日謙, 1747년생)은 1771년(영조 47) 식년시 진사시에 2등 17위로 급제하고[[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c_1771_024219|#]] 1772년(영조 48) 정시 문과에 병과 4위로 급제하여[[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MN_6JOc_1772_010266|#]] 1775년 정3품 좌부승지(左副承旨)[[http://sjw.history.go.kr/id/SJW-F51080030-02400|#]]에 이르렀다. 본생가 첫째 동생 정시겸(鄭時謙, 1754년생)은 1773년(영조 49) 증광시 진사시에 1등 4위로 급제하였다.[[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c_1773_024401|#]]] 그의 직계에는 5대조 정시창(鄭始昌)이 1633년([[인조]] 11) 식년시 진사시에 3등 52위로 입격하여[[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b_1633_010514|#]] 정5품 [[형조]] 정랑(正郞)에 오르고 고조부 정백빈(鄭伯賓)이 81살 넘게 장수하여 정3품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제수된 것을 마지막으로 이렇다 할 관직에 오른 조상들이 없었고, 그의 아버지 대에 이르러서는 생선장수로 생계를 잇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런데 1757년(영조 33) 사종숙(四從叔, 11촌 지간)인 일성위(日城尉) 정치달(鄭致達)과 [[영조]]의 서녀 화완옹주에게 [[입양]]되면서[[http://sjw.history.go.kr/id/SJW-F33050030-00500|#]], 그를 비롯하여 생부와 생가 쪽 식구들의 형편은 이전과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한마디로 팔자를 고치게 된 것이다. === 영조 생전 === 당시 [[영조]]에게 가장 총애받던 딸 [[화완옹주]]의 [[양자]]이다 보니 정후겸도 덩달아 영조에게 많은 총애를 받았다. 1764년(영조 40) 종8품 장원서 봉사(掌苑署奉事)[[http://sjw.history.go.kr/id/SJW-F40040180-00800|#]]·정7품 세자익위사 부수(世子翊衛司副率)[[http://sjw.history.go.kr/id/SJW-F40070170-01900|#]]에 임명된 것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올랐으며, 이듬해인 1765년 식년시 생원시·진사시에 각각 3등 57위[[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c_1765_023784|#]], 2등 10위[[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c_1765_023812|#]]로 급제하여 같은 해 종6품 제용감 주부(濟用監主簿)[[http://sjw.history.go.kr/id/SJW-F41080060-01400|#]]·종6품 세자익위사 위수(世子翊衛司衛率)[[http://sjw.history.go.kr/id/SJW-F41090240-01000|#]]에 제수되었다. 1766년(영조 42)에는 정시 문과에 을과 1위(아원)으로 급제하여[[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MN_6JOc_1766_009953|#]] 정6품 [[병조]] 좌랑(佐郞)에 제수되었다.[[http://sjw.history.go.kr/id/SJW-F42030110-01100|#]] 이후 1767년(영조 43) 정6품 [[홍문관]] 수찬(修撰)에 올랐고, 이어 종5품 홍문관 부교리(副校理)·정5품 [[사헌부]] 지평(持平)을 지내고 1768년 정3품 [[승정원]] 승지(承旨)가 되었으며, 이듬해 정2품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를 거쳐 정3품 [[호조(조선)|호조]] 참의·종2품 호조 참판·종2품 [[공조(조선)|공조]] 참판을 지냈다.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에 따르면 정후겸은 [[김귀주]]와 함께 [[혜경궁 홍씨]]와 [[정조(조선)|세손]]을 공격하는 등의 모략을 많이 세웠다고 하며, 세도가로 혜경궁 홍씨의 숙부였던 [[홍인한]](洪麟漢)과 더불어 국정을 좌우하였다. 1775년 [[영조]]가 정조에게 [[대리청정]]할 것을 선언할 때에도 강력히 반대했고 [[동궁]]에 사람을 비밀스럽게 보내어 세손의 언동을 감시케 하기도 했다. 또한 한편으로는 유언비어를 퍼뜨려 세손의 비행을 조작하고 부사직(副司直) 심상운(沈翔雲)을 시켜 세손을 보호하는 [[홍국영]]을 탄핵하는 등[[http://sillok.history.go.kr/id/kua_15112021_002|#]] 세손을 모해하는 데 분주하였다. === 영조 사후 === 정조 즉위 후 정조에 반대했던 홍인한 세력이나 화완옹주의 힘이 줄고, 정조의 측근인 홍국영, [[채제공]]이나 [[소론]], [[남인]] 등이 힘을 얻으면서 정후겸도 힘이 줄어든다. 정조 즉위 후 대신들이 정후겸을 죽일 것을 요청하면서 결국 [[함경도]] [[경원군|경원도호부]]에 유배되어 위리안치되었다가, 이후 정조 암살 시도가 일어나자 결국 [[사사]]되었다. 그리고 역적을 법적인 영조의 양외손(養外孫) 자격으로 둘수 없다는 정조의 명령으로 정조 원년 8월 28일 양모 화완옹주와 강제 [[파양]]되게 되었다.[* 조선왕조실록 : 정후겸을 본종으로 돌리라고 명하다. [[http://sillok.history.go.kr/id/kva_10008028_005|이때의 기사]].] === 사후 === [[순조]] 때 역적으로 단죄되었지만 1908년([[순종(대한제국)|순종]] [[융희]] 2) 내각 총리 대신이자 매국노 [[이완용]]과 마찬가지로 매국노인 법부대신 [[조중응]] 등의 건의로 복권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zb_10101030_004|#]] == 여담 == * 화완옹주는 1738년생으로 양어머니와 나이차가 11살밖에 나지 않는다. 물론 혼인과 출산을 빨리 하던 시대였으므로 현대의 부모자식에 비하면 '약간' 수준이었지만. * 본인이 유배를 가서 사약을 받고 죽은 함경도에, 시간이 제법 흐르고 본인의 현손자가 태어나서 자랐다. 그가 바로 북한에서 국가보위상과 총정치국장을 역임한 [[정경택]]. * 노론인 [[홍인한]]과 손잡고 어울리기는 했지만, 양조부 정우량이 소론계였기에 소속 당파는 소론으로 추정된다. 영조에게 청해 소론 삼대신들인 [[조태억]], [[최석항]], [[이광좌]]의 관작을 복구하게 하였고[* 심지어는 신축년037) 과 임인년038) 의 삼흉(三兇)들은 선대왕에게 만세의 원수가 되는 자들인데, 속이는 말로 덮으며 주선하여 관작이 복구되게 하였습니다. [[http://sillok.history.go.kr/id/kva_10003025_001]]], 소론 대신들인 구윤옥과 서명선이 정후겸과 친하게 지냈다며 정조에게 사죄하기도 했다. == 대중매체에서 == * 2007년에 방영된 이산에서는 배우 [[조연우(배우)|조연우]]가 맡아 연기하였다. 정조 즉위 전 세손시절에도 뒤를 캐고 대리청정을 방해하고 정조 즉위 후 자객을 보냈다가 실패하여 유배 후 사사된다. * 배유안의 역사 동화 창경궁 동무에서는 정조와 정후겸의 아름다울 수 있었던 우정이 어떻게 어긋났는지 잘 나와 있다. 마지막 장면에 정후겸이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 [[타임인조선]]에서는 노론의 중신들에게 정조를 권총으로 암살하자고 주장한다. 총을 만들 인물은 미래에서 온 황찬기 박사. * 2021년작 드라마인 [[옷소매 붉은 끝동(드라마)|옷소매 붉은 끝동]]에서는 [[권현빈]]이 맡아 연기했으며[* 여기선 본명이 아닌, 자인 정백익으로 나온다.], 여기서도 세손 시절의 [[정조(조선)|정조]]를 모해하는 것으로 나온다. 허나, 위의 이산과는 달리, [[노론]]의 사주가 아닌[* 애초에 이 드라마에서 [[노론]]은 [[정조(조선)|정조]]는 커녕, [[영조]]에게도 기가 죽어 지내는 겉절이로 나온다.] 순수 본인의 의지로 그를 적대하는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그가 유배가기 직전에 그 동기를 고백하는데, 자신을 친아들처럼 사랑해준 양어머니 [[화완옹주]]에 대한 비뚤어진 효심이 그것이었다. [[분류:조선의 외척]][[분류:인천 중구 원도심 출신 인물]][[분류:연일 정씨]][[분류:1749년 출생]][[분류:1776년 사망]][[분류:소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