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삼국시대(중국)/전투]][[분류:제갈량]][[분류:윈난성의 역사]] [[파일:Zhuge Liang's Southern Campaign.png]] [목차] == 개요 == [[제갈량]]의 남중 정벌은 제갈량이 [[유비]] 사후 [[익주]] 남부의 반란을 평정한 사건을 말한다. == 배경 == [[손권]]은 자신에게 복종한 [[교주]]의 [[사섭]]을 사주하여 익주 남부의 [[호족]]인 [[옹개]] 등을 포섭하게 했다. 이에 옹개는 [[장예]]를 포박해 오나라로 보내고 반란을 일으켰으며, 월수군의 [[이민족]] 왕 [[고정(삼국지)|고정]]도 초황을 살해한 후 옹개에게 동조했고, 장가 태수 [[주포(삼국지)|주포]]도 종사 상방을 죽인 뒤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남만의 부족장 맹획을 끌어들였다. 그러나 [[이회]]가 계책으로 옹개를 대파한 뒤 반란군 사이에서 내분이 일어나 고정이 부하를 시켜 옹개를 살해하였고, 주포 역시 [[마충]]에게 토벌되어 죽은 후, 제갈량은 [[맹획]]을 감화시켜 마침내 남중을 평정하였다. == 결과 == >가을, 마침내 4군을 평정했다. 익주군을 고쳐 건녕군(建寧)으로 삼고, 이회를 태수로 하였고, 안한장군(安漢將軍)을 더하고, 교주자사(領交州刺史)를 맡도록 했으며, 치소를 미현(味)으로 옮겼다. 건녕군, 월수군(越巂)을 나누어 운남군(云南郡)을 설치하고, 여개(呂凱)를 태수로 삼았다. > >또 건녕, 장가군을 나누어 흥고군(興古郡)을 설치했다. 마충을 장가태수(牂柯太守)로 삼았다. > >남중의 경졸(勁卒=강병), 청강 만여 가를 촉으로 옮겨 5부로 삼으니, 그 앞에 당할 자가 없었고, (이를) 비군(飛軍)이라 불렀다. > >또 그 연약한 자들을 대호족 초(焦), 옹(雍), 누(婁), 찬(爨), 맹(孟), 양(量), 모(毛), 이(李)씨에게 나누어주어 부곡으로 삼고, 오부도위(五部都尉)를 설치하였으며, (이를) 오자(五子)라 하였으므로, 남쪽 사람들은 말하길 '사성오자(四姓五子)'라 하였다. > >이(夷)족엔 강한한 자들이 많아서, 대호족과 부호를 따르지 않았기에, 이에 금과 비단을 내어 성질나쁜 이족을 초빙해 가문의 부곡으로 삼도록 권하고, (부곡을) 많이 얻은 자는 칭찬하고 관직을 세습시켜 주었다. > >이에 이인들이 재화를 탐하게 되어, 점점 한에 복속하게 되었고, 이족과 한족이 부곡을 이루었다. > >제갈량은 남중의 준걸 건녕(建寧)의 찬습(爨習), 주제(朱提)의 맹염(孟琰) 및 맹획(孟獲)을 거두어 관속으로 삼았는데, 찬습은 관직이 영군(領軍)에 이르렀고, 맹염은 보관장군(輔官將軍), 맹획은 어사중승에 이르렀다. 남중의 금, 은, 단, 칠, 밭가는 소, 전마가 군국(軍國)의 비용으로 생산되었다. > >(내항)도독은 항상 신중한 사람을 기용하였다. >---- >『화양국지』 「남중지」 >여개를 운남태수(雲南太守)로 임명하고 양천정후(陽遷亭侯)로 봉했다. 마침 여개는 반란을 일으킨 만족에게 살해되었으므로 아들 여상(呂祥)이 후사를 잇게 되었다. >---- >『삼국지』 「여개전」 >이후에 군대가 돌아오자, 남방의 만족은 또 반란을 일으키고 수비하던 대장을 살해했다. 이회는 직접 토벌에 나서 흉악한 행동을 한 무리들을 근절시키고, 그곳의 유력자들을 성도로 이주시키고, 수(叟)와 복(濮)땅에서 밭가는 소, 군마, 금은, 무소 가죽을 공물로 납입하도록 하여 지속적으로 군용 물자를 충당했으므로 당시 비용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 >『삼국지』 「이회전」 >이전에 월수군(越嶲郡)에서는 승상 제갈량이 고정(高定)을 토벌한 뒤 수이(叟夷)들이 자주 반란을 일으켜 태수 공록(龔祿)과 초황(焦璜)을 죽였다. 이때부터 태수는 감히 군으로 가지 못하고 군으로부터 800여 리(320km) 떨어진 안상현(安上縣)에 머물렀으므로 그 군은 그저 이름만 있을 뿐이었다. >---- >『삼국지』 「장억전」 제갈량은 남중 정벌을 통해 청강 1만여 가(家)를 [[촉#s-4]]으로 이주시켜 무당비군(無當飛軍)으로 편성했고, 남중의 [[금]] • [[은]]과 [[소|우]], [[말|마]] 등 자원을 얻어 [[제갈량의 북벌|북벌]]의 군수물자로 사용하는 등의 단기적 성과를 얻었다. 또한 [[찬습]], [[맹염]], [[맹획]] 등 현지 인사들도 중앙에 기용했다. 남중 지역의 통치에 대해선 현지 유력가들을 기용하는 한편으로, 기존 남중 4군[* 월수, 장가, 익주, 영창]과 유비가 신설한 주제군을 7군[* 월수, 장가, 건녕, 영창, 주제, 운남, 흥고]으로 재편하고 내항도독이 통솔하도록 하여 남중을 군현 체계에 더 확고히 편입시키려 했다. 그러나 양양기 등의 서술과는 달리, 실제로는 남중에서 군대가 회군하자 다시 반란이 빈번히 발생했고, 촉에서 파견한 지방관 다수가 살해당하며 통제력이 저하되었다. 이에 대응하여 이회 → 장익 → 마충으로 이어지는 내항도독 라인의 지속적인 토벌이 있었으며, 233년 유주의 대규모 반란을 마충, 장억 등이 진압하고, 장억이 240년에 월수군을 새롭게 정복하는 등의 장기적인 노력 끝에야 남중 지방은 안정화될 수 있었다. 그러나 초주전의 서술을 보면 남중 민심이 수탈로 인해 촉 중앙에 적대적이라는 여론은 촉 멸망 당시까지도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 연의 == 연의에서는 이 남중 정벌이 [[남만]] 전역에 대한 정벌로 확대되고, [[맹획]]을 7번 잡았다 풀어주는 것을 반복하는 [[칠종칠금]]을 통해 맹획을 굴복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