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제주도 내왓당 무신도.jpg]] [목차] == 개요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용담동(제주)|용담 2동]]의 한천 가에 있었던 거대한 규모의 신당인 내왓당에 있던 [[조선]]시대의 무신도. 국가민속문화재, 국가중요민속자료 제 240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제주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무신도이자 제주 무속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써, 제주도는 해당 유물을 [[국보]]로 승격시키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현재 제주도에는 국보급 유물이 없다.] [[서울특별시]] [[은평구]]에 있는 샤머니즘 박물관에 복제품이 전시되어있다. == 소개 == [[1959년]], [[제주대학교]] 현용준 [[교수]][* 단, 최초 발견자는 아니다. 그 이유는 아래 문단에서 설명.]는 우연히 냇가에서 어떤 안노인이 이상한 그림을 가지고 이리저리 짝을 맞추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이를 이상하게 생각한 교수가 다가가 확인을 해 보았고 전후사정을 알게 되었다. [[1882년]] 당시 제주도의 4대 국당이라고 불릴 정도로 거대한 규모를 가진 내왓당이 훼철되었는데, 이 당의 매인 심방이자 신방청의 도행수로 있던 고임생이 이곳에 있던 무신도들을 [[삼도동(제주)|삼도동]]에 있는 자택에 가져다 모셨다가 그의 사후 그의 [[부인]]이 [[제주시]] 산지천 가까이에 있는 남수각 근처 [[굴]]로 이사를 하며 이들 무신도와 [[무구]]도 이곳으로 옮겨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매인 심방이란 당집에 묶인 심방, 그러니까 당집에 소속되어 활동하는 심방을 말한다.] [[1963년]] 고임생의 부인이 사망하자 현 교수는 그녀가 살던 굴 속에서 무신도가 들어있던 궤짝을 꺼내서 용담동의 제주대학교의 창고로 옮겼다. [[1967년]] 제주대학교 민속박물관 개관 후 [[1970년]]에 유물을 전시할 때 이 무신도들이 전시되었고, [[1980년]] 제주대학교가 현 위치인 아라동으로 이전될 때 이 무신도 역시 현재의 [[제주대학교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지금 현존하고 있는 무신도가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세조실록]] [[1466년]](세조 12) [[7월]] 계사일과 병신일 기사에 강우문과 복승리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으며 이와 관련해 ‘화상을 소각하였다.’ 고 기록이 되어 있는 것을 보면, 내왓당의 신을 그린 화상은 그 전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어사 강우문이 안무사 복승리를 모함하기 위해서 노산군의 화상을 천외당에 모셔 제사를 지내 소각했다는 것이다. 심방들의 구전에 따르면 이 신당의 신위는 12신위이며, 우리말 신명도 전승되고 있다. 우리말 신명과 한자 신명이 일치하는데, 구전하는 「내외불도마누라」라는 남녀 2신위의 무신도가 없는 것으로 보아 당시 소각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10폭의 무신도는 [[세조(조선)|세조]] 12년 이전부터 있었던 그림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현존하는 무신도에 대해선 의견이 조금씩 갈리는데, 미술평론가 김유정은 [[1702년]] 제주 목사 이형상의 [[무속|무교]] 탄압 때 불탄 것을 [[1703년]]에 다시 그린 것이 현재의 무신도, 그러니까 복제품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반면 제주대학교 현용준 교수는 [[1466년]] 이전에 그려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 형태 및 구성 == 모두 10폭으로 구성되었으며, 1폭당 [[신]] 하나가 그려져있다. 사실 2폭이 더 있었으나 중간에 소실되었다.[* 후술할 강우문과 복승리의 사건 당시 소각된 것으로 추정] 가로 32㎝, 세로 62㎝의 [[한지]]에 그려져있는데 무신도 10폭 모두 소나무 판자에 붙여져 있다. 모두 진채 물감으로 그려졌으며, 각 폭마다 신위 1위씩을 앉은 자세로 그려 넣었다. 각각의 무신도에는 [[한자]]로 신명이 기록되어 있다. 이 신명들은 [[이두]]로 표기해 놓은 순수 우리말인데, 그중 [[남신]]은 천자위, 상사위, 수령위, 원망위, 감찰위, 제석위 등 6폭이고, 홍아위, 중전위, 본궁위, 상군위 4폭이 [[여신]]이다. 남신도의 의관은 그림마다 서로 다르며 1폭을 제외하고 모두 부채를 들고 있다. 한지에 채색 안료인 진채를 사용하여 그렸는데, 육지의 무신도들과는 화법이 많이 다르다. 색감은 빨강·노랑·초록 등 삼색을 많이 사용하였으며, 부분적으로 금박이 입혀져 있다. === 특징 === 제주인들의 [[신앙]]과 생활상이 함께 그려져 지역 [[특성]]과 [[전통]]이 잘 나타나있다고 평가받는다. 한국 채색화의 전통을 고수하면서 [[선묘]]를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평면적인 채색을 하였으며, 한국 채색화의 전통을 가장 독특하게 남기고 있는 작품이라고 한다. [[빨강]]·[[노랑]]·[[초록]]의 화려한 [[옷]]을 입은 신들의 얼굴표정, [[부채]]를 잡은 손과 손가락의 움직임에서 신들의 [[권능]]과 영력이 생생하게 표현되어있다. == 기타 == 현용준 교수 이전에 무신도를 처음 발견한 사람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당시의 민속학자였던 무라야마 지준이 그 주인공으로 당시 조선의 무속신앙을 연구하던 중, 원 소유자인 심방 고임생의 자택에서 무신도를 발견하고 그것을 사진으로 남겼다. [[파일:내왓당 무신도1.jpg]] [[파일:내왓당 무신도2.jpg]] [[파일:내왓당 무신도3.jpg]] 그러나 후속 연구가 없어 그대로 묻혀졌다가 해방이 되고 한참이 지나서야 현용준 교수에 의해 세상에 빛을 볼 수 있게 되었다. == 외부 링크 == * [[https://m.terms.naver.com/entry.nhn?docId=2458079&cid=46660&categoryId=46660|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제주도 내왓당 무신도]] * [[https://m.terms.naver.com/entry.nhn?docId=1219099&cid=40942&categoryId=33598|두산백과 : 제주도 내왓당 무신도]] [[분류:조선의 회화]][[분류:제주대학교 박물관 소장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