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제 군주)] |||||| '''{{{#ece5b6 제(齊)나라 13대 국군 {{{+1 희공}}} 僖公}}}''' |||||||||| |||| '''[[성씨|{{{#ece5b6 성}}}]]''' |||| 강(姜) || |||| '''[[본관|{{{#ece5b6 씨}}}]]''' |||| 여(呂) || |||| '''[[휘|{{{#ece5b6 휘}}}]]''' |||| 녹보(祿甫) || |||| '''{{{#ece5b6 아버지}}}''' |||| [[제장공]](齊莊公) 강속(姜贖) || || '''{{{#ece5b6 생몰 기간}}}''' || 음력 || 기원전 ???년 ~ 기원전 698년 || || '''{{{#ece5b6 재위 기간}}}''' || 음력 || 기원전 730년 ~ 기원전 698년|| [목차] == 개요 == [[제(춘추전국시대)|제나라]]의 제13대 [[군주]]. [[제장공]]의 [[아들]]. [[제양공]], [[제환공]]의 아버지.[* [[열국지]]에서는 제 환공은 제 양공의 아들로 나온다.] 이 제 희공의 노력으로 제 환공 때 패자가 되는 기반이 마련된다. 이때부터 강제의 기록이 많아지기 시작한다.[* 단 무조건 그런 것은 아니고 [[제환공]], [[제경공(26대)|제경공]](齊景公) 등 유명한 군주에 한해서 많아진다.] == 치세 == 제 희공 9년(기원전 722년), [[노은공]]이 즉위했다.[* 이때부터 [[춘추]]에 기록이 시작된다.] 제 희공 11년(기원전 720년) 겨울, 제 희공은 [[정장공]]과 회맹해 [[정나라]]의 입지는 더욱 막강해졌다.[* 그 이유는 춘추 시대 극 초기에 정나라는 소국이지만, 제나라는 나름대로 국력이 상당한 나라기 때문이다. 다만 정장공 시기의 정나라는 정나라의 전성기를 달리던 시절이긴 했다.] 제 희공 14년(기원전 717년) 5월 신유일, 제 희공은 노 은공과 애 땅에서 회맹했다. 제 희공 15년(기원전 716년) 여름, 제 희공은 동복 아우 이중년(夷仲年)을 보내 [[노나라]]와 우호를 다졌다.[* 그는 제 양공을 죽이고 제나라 군주가 된 [[공손무지]]의 아버지이다.] 제 희공 16년(기원전 715년) 봄, 제 희공은 [[송나라]]와 [[위나라|위(衛)나라]]에게 정나라와 강화를 요청했다.[* 이 당시에 이들은 정 장공이 이끄는 정나라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같은 해 가을 7월에 [[송상공]]과 [[위선공]]과 함께 회맹했다. 8월 병술일에 정 장공은 제나라 사신과 함께 주나라의 조회에 참석했다. 겨울에는 제 희공이 노나라에 사람을 보내 송, 위, 정 삼국과 강화하자고 제안했다. 제 희공 17년(기원전 714년) 겨울, 제 희공은 노 은공에게 송나라를 치자고 했다. 제 희공 18년(기원전 713년) 2월, 제 희공은 중구에서 노 은공, 정 장공을 만나 회맹했다. 2월 25일 정나라에서 회맹해 출병 시기를 잡았다. 10월 임오일 제 희공은 정 장공과 함께 성(郕)나라가 송나라를 같이 치자고 해놓고서는 약속을 지키지 않아 성나라부터 쳤다. 제 희공 19년(기원전 712년) 7월, 제 희공과 노 은공, 정 장공이 [[허나라|허(許)나라]]를 쳤다. 첫날부터 허성을 함께 쳤다. 7월 3일 허나라를 점령했고, 허나라 군주 허 장공은 위나라로 도망갔다. 제 희공이 노 은공에게 허나라 땅을 주려 했으나 노 은공이 거절해 정 장공이 가져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노나라의 공자 궤가 즉 [[노환공]]이 노 은공을 죽이고 노나라의 군주가 된다. 제 희공 21년(기원전 710년) 봄, 송나라의 태제 화독이 송 상공을 죽이고 같은 해 3월 노 환공이 제 희공, 정 장공과 함께 송나라를 쳤다. 제 희공 22년(기원전 709년), 노 환공이 영 땅에서 제 희공과 회맹하다가 노 환공이 혼인하겠다는 말을 전해 제 희공은 자신의 딸인 문강을 노 환공에게 시집보낸다. ~~사망 플래그~~ [* 드립이라 취소선을 사용했지만 실은 맞는게, 제 희공의 아들 제 양공이 문강과 간통을 하고자 노 환공을 죽였기 때문이다. 자세한 것은 [[제양공|제 양공]], [[노환공|노 환공]] 문서를 각기 참조.] 이 해 여름에 제 희공과 위 선공이 포 땅에서 만났으나 맹세하지는 않았다. 제 희공 24년(기원전 707년), 제 희공은 정 장공과 함께 [[기나라|기(紀)나라]]에 방문했다. 제 희공 25년(기원전 706년), 북융이 제나라를 치자 제 희공은 정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정 장공은 6월에 태자 홀(忽)[* 훗날 정 소공이 된다.]을 보내 구원했다. 태자 홀은 북융을 쳐서 300명을 죽였고, 포로도 많이 잡았다. 이에 제 희공은 그 공로를 높이사서 제 희공이 그 딸을 태자 홀에게 시집 보내 주려 했으나 태자 홀이 말했다. "정나라는 소국이지만, 제나라는 대국입니다. 그러니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보아 거절합니다." 그리하여 그 일은 백지화되었다. 제 희공 26년(기원전 705년) 가을, 제 희공은 정나라, 위나라와 함께 맹읍과 상(向)읍[* 지명이나 성씨로 쓸 때는 向자를 원음인 향이 아닌 상으로 읽는다. 즉 나라 이름, 성씨 상으로 나타낼 수 있다.]을 쳤다. 주 환왕은 맹읍과 상읍의 백성들을 견땅에 옮겼다. 제 희공 29년(기원전 702년) 겨울, 제 희공은 위나라와 정나라와 연합해 노나라를 치니 노나라 군대는 상 땅에서 교전했다.[*희공 25년 북융의 제나라 침입 때 제희공이 제나라를 구원한 제후들의 군대에 양식을 보냈는데 이를 나누는 일을 맡은 노나라에서 정나라의 순서를 맨 마지막으로 하자 분노한 정나라가 제나라에 노나라를 칠 것을 요청하였다.] 제 희공 30년(기원전 701년) 정월[* 1월이다.], 제 희공은 위나라, [[송(춘추전국시대)|송나라]], 정나라와 함께 악조 땅에서 회맹을 가졌다. 제 희공 32년(기원전 699년) 2월, 기사일 제 희공은 송나라, 위나라, 연나라와 함께 노나라를 쳤다. 그 결과 노나라는 패배했다. 같은 해 동생 이중년이 죽었다. 이에 그 아들인 공손무지를 불러 그에게 태자인 강제아(姜諸兒)[* 훗날의 제 양공.]와 같은 대우를 해주었다. 제 희공 33년(기원전 698년) 겨울, 제 희공은 송나라, 위나라, [[채나라]], 조나라와 함께 정나라를 쳤다. 정나라는 제대로 대비하지 않아서 대패했다. 같은 해 12월 정사일에 제 희공이 죽으니 그 아들 강제아가 뒤를 이었다. 그가 바로 제양공(齊襄公)이다. [각주] [[분류:기원전 698년 사망]][[분류:제나라의 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