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include(틀:동로마 제국의 대외전쟁)] ||<-9><:> {{{+1 '''제19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 '''시기''' ||<-2>서기 1422년 6월 10일 ~ 9월|| || '''장소''' ||<-2>[[콘스탄티노폴리스]]|| || '''원인''' ||<-2>[[오스만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 시도|| || '''교전국''' ||[[파일:비잔티움 제국 국기.png|width=25]] [[동로마 제국]]||[[파일:오스만 제국 국기(1383-1453).svg.png|width=25]] [[오스만국]] || || '''지휘관''' ||[[파일:비잔티움 제국 국기.png|width=25]] [[마누일 2세]][br][[파일:비잔티움 제국 국기.png|width=25]] [[요안니스 8세]]||[[파일:오스만 제국 국기(1383-1453).svg.png|width=25]] [[무라트 2세]]|| || '''결과''' ||<-2>[[동로마 제국]]의 승리.|| [목차] [clearfix] == 배경 == 1421년, [[오스만국]]의 술탄이 된 [[무라트 2세]]는 그의 계승 과정에 [[동로마 제국]]이 농간을 부렸다고 판단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켜 동로마 제국을 파괴하려 했다. [[메흐메트 2세]]가 살아있던 시절에 반란을 일으켰던 [[바예지트 1세]]의 아들 무스타파는 반란이 실패하자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도주했는데 오스만의 무스타파 반환 요구에 꾸물대던[* 그리고 이를 [[메흐메트 1세]]가 묵인했다.] 사이 무라트 2세가 술탄위를 계승하고는 다시 무스타파와 내전을 벌여 승리한 상황이었다. 이에 무라트 2세는 동로마 제국이 무스타파를 지원했다는 의혹을 떨칠 수 없었고 그동안 오스만의 내분 틈에서 관대한 처우를 받아 간신히 연명하고 있던 동로마 제국에 이를 드러냈다. 이 포위전은 [[오스만 제국군|오스만군]]이 정면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략한 첫 번째 전투이고, 대형 [[구포]]를 동원해 공성전을 진행한 전투이기도 하다. == 전개 == 공성이 유지된 시간은 비교적 짧았다. 무라트 2세의 동생인 쿠취크 무스타파가 [[아나톨리아]]에서 반란을 일으켜 먼저 이것부터 진압해야 했기 때문이다. 동시대의 기록에 의하면, 이 반란의 배후에는 동로마 제국의 자금지원이 있었다고 하는데, 동로마 제국은 그동안 이런 방식으로 주변 국가들이 제국의 남아있는 마지막 보루에 신경을 쓰지 못하게 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어책인 상태였다. == 결과 == 동로마 제국은 일단 명목상 또다시 승리를 거두기는 했으나 이미 이 시점에서 제국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제외하면 몇몇 도시들만 남아있는 상태로 도시국가나 다름없는 처지에 있었다. 제국의 재정은 바닥을 드러내어 더 이상의 병력 충원도 어려운 상태에 있었다. [[교황]] [[비오 2세]]는 멸망 직전에 있는 동로마 제국을 돕기 위해 서유럽 각국에 지원을 요청했고 서유럽 국가들은 소수의 대포를 지원했다. 이는 30여 년 뒤에 벌어진 [[제2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에서 유용하게 쓰이지만 제국을 구원하는 데에는 역부족이었다. == 영향 == 로마 제국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테오도시우스 성벽]] 덕분이었고, 만약 오스만이 내란의 위기에서 안전해 질 수 있다면 기술적으로 동등한 이상 함락은 시간문제라는 것은 이미 명확해졌다. 그리고 역으로 아나톨리아에서의 반란을 막으려면 마지막 남은 동로마 제국의 보루를 제거해야 하는 것도 분명해졌다. == 둘러보기 == [include(틀:동로마 제국의 대외전쟁)] [include(틀:오스만 제국의 대외전쟁)] [[분류:로마-오스만 전쟁]][[분류: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분류:15세기 사건 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