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조남승}}}[br]趙南升[* [[https://sjw.history.go.kr/id/SJW-K44020020-00000|승정원일기 고종 44년(1907) 2월 2일 기사]]에 趙南'''{{{+1 昇}}}'''으로 오기돼 있다.]'''}}}}}}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독립운동가 조남승.jpg|width=100%]]}}} || || '''이명''' ||조일운(趙一雲), 조국광(趙國光), 조남천(趙南舛)[* [[http://db.history.go.kr/id/gsdc_002_0400|1932년 형사 제1심 소송기록]] 참조. 升을 舛으로 잘못 판독한 듯하다.] || || '''자''' ||백윤(伯允) || || '''본관''' ||[[풍양 조씨]][* 회양공파(淮陽公派)-한산군파(漢山郡派)-풍안군파(豊安君派) 26세 남(南) 항렬.] || ||<|2> '''출생''' ||[[1882년]] [[4월 28일]] || ||[[한성부]] 북부 진장방 삼청동계[br](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 || || '''원적''' ||[[경기도]] [[양주시|양주목]] 건천면 성능리[br](現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능리 229번지) || ||<|2> '''사망''' ||[[1933년]] [[6월 25일]][* [[음력]] [[5월 3일]].] (향년 51세) || ||사망지 미상 || || '''학력''' ||한문 수학 || || '''가족''' ||외조부 [[흥선대원군]][br]아버지 [[조정구(1860)|조정구]], 당숙 조완구 || || '''종교''' ||[[천주교]] || || '''묘소''' ||화장 || ||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자는 백윤(伯允), 이명 조일운(趙一雲), 조국광(趙國光)이다. 201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흥선대원군]]의 외손자이자 [[고종(대한제국)|고종]]의 생질(甥姪), [[순종(대한제국)|순종]]의 외사촌동생이다. [[이종찬(1936)|이종찬]] 전 [[국가정보원장]]은 조남승의 생질이다.[* 이종찬의 아버지 이규학(李圭鶴)은 조남승의 첫째 여동생과 결혼했다.] == 생애 == 1882년 4월 28일 한성부 북부 진장방 삼청동계(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에서 아버지 작농(芍農) [[조정구(1860)|조정구]]와 어머니 [[전주 이씨]](1861 ~ 1898. 12. 27)[* [[흥선대원군]]의 딸이다.] 사이에서 4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원적은 [[경기도]] [[양주시|양주목]] 건천면 성능리(現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능리 229번지)이다. 이후 경기도 [[경성부]] [[원서동|원동]](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원서동]])[* [[https://db.history.go.kr/item/imageViewer.do?levelId=npda_1932_02_28_v0002_0160|1932년 2월 28일 동아일보 기사]]에는 원동(苑洞)이 아닌 화동(花洞:現 종로구 [[화동(종로구)|화동]])으로 기재돼 있는데, 조남승의 작은아버지 조경구(趙經九, 1875 ~ 1899. 8. 27)의 집이 원동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 원동이 본적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237번지로 이주해 [[http://db.history.go.kr/id/npda_1932_03_05_v0002_0120|본적을 두었다]]. 5대조 조득영(趙得永, 1762 ~ 1824. 3. 3)은 [[이조판서]]를 지낸 [[조만영]]·[[영의정]]을 지낸 [[조인영]] 형제의 8촌 삼종형(三從兄)이었다. 아버지 조정구 역시 독립유공자로, 일제가 주는 남작 작위를 거부했으며 순종의 유언을 신한민보에 공개한 바 있는 인물이다. 또 다른 독립유공자 조완구는 당숙이다. 여동생 조계진은 독립유공자 [[이회영]]의 아들인 이규학과 결혼하였다. 국회의원, 국가정보원장 등을 지낸 [[이종찬(1936)|이종찬]]이 조남승의 조카이다. 1898년([[고종(대한제국)|고종]] 35) 3월 4일 [[동구릉|혜릉]](惠陵) [[참봉]]에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35_03A_04A_00070_2004_176_XML|임용되면서]] 벼슬길에 오르게 됐으나, 3월 10일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35_03A_10A_00040_2004_176_XML|사직했다]]. 1902년(고종 39) 1월 27일 [[영희전]] 참봉에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39_01A_27A_00060_2006_191_XML|임용되었으나]] 한 달만인 2월 19일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39_02A_19A_00030_2006_192_XML|사직했다]]. 그해 2월 20일 내부 주사(內部主事)에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39_02A_20A_00060_2006_192_XML|임용되면서]] 본격적으로 출사해 1903년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40_01A_29A_00090_2006_195_XML|내부 참서관]](內部參書官),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40_03A_11A_00090_2006_196_XML|칭경시 예식사무위원]](稱慶時禮式事務委員), 1905년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42_04A_06A_00050_2006_203_XML|비서감 승]](秘書監丞),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42_10A_13A_00080_2006_205_XML|시종원 부경]](侍從院副卿, 칙임관 3등) 등을 역임했다. 비서감 승으로 재직 중이던 1905년 10월 21일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그해 10월 30일에 [[궁내부]] 특진관(特進官)이던 [[조병세]] 등 48인과 함께 연명으로 조약의 부당함과 조약 체결에 조인한 법부대신 [[박제순]] 등 정부대신을 규탄하는 상소를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42_10A_30A_00080_2006_205_XML|올리기도 했다]]. 이후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42_10A_30A_00070_2006_205_XML|상방사 장]](尙方司長), 1906년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43_03A_02A_00040_2006_206_XML|태복사 장]](太僕司長),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43_03A_15A_00050_2006_206_XML|영선사 장]](營繕司長, 훈 4등),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43_03A_27A_00030_2006_206_XML|봉상사 제조]](奉常司提調),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43_12A_22A_00040_2006_209_XML|주전원 경]](主殿院卿) 등을 역임했다. 그 후[* [[고종실록]]([[https://sillok.history.go.kr/id/kza_14405027_001|#]])과 [[승정원일기]]([[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44_04A_16A_00060_2006_210_XML|#]])의 기록이 1907년 5월 27일(음력 4월 16일)자로 끊겨 있는 것으로 보아 이후일 것이다.] [[청나라]] [[베이징시|베이징]]으로 건너가면서 [[일본 제국]]으로부터 '재북경 요시찰인(在北京 要視察人)', 즉 주요 감시 대상이 되었다. 1921년 3월 1일 독립기념일을 축하하는 행사가 베이징시 박정래(朴貞來)의 집에서 열리자 [[신채호]] 등 16명과 함께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 '독립기념일을 잊어서는 안 될 것, 일본의 노예가 되지 말 것, [[대한민국 임시정부|상해정부]](上海政府) 및 선전부의 명령을 굳게 지킬 것'을 결의하였다. 1921년 4월 17일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4630|북경군사통일회]] 조직에 참여했고, 그해 10월에는 [[위안스카이]]와 만나 교섭을 통해 지원을 받아냈다. 1922년 4월에는 [[이르쿠츠크]]에서 열린 [[고려공산당]]대회에 참가했고, 그해 5월에는 [[모스크바]]에서 열린 [[국제공산당]]청년대회에도 참석했다. 1923년 6월 [[상하이시]]에 본부를 둔 조선인과 중국인의 결사단체인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에서 활동했으며, 1924년 7월 24일 북경 한교동지회(北京韓僑同志會)를 조직할 때 규칙기초위원, 집행위원으로 참여하였다. 1924년 8월 중국에서 유럽과 아시아 각국의 반제국주의 단체와 개인이 참가하는 [[반제국주의]]운동대연맹회(大聯盟會)가 결성되자, 그해 8월 25일 [[이세영(1870)|이세영]]·박제선(朴齊善)·박숭병(朴嵩秉)과 함께 [[대한통의부]] 전권대표에 [[http://db.history.go.kr/id/su_007_1924_08_25_0910|선출돼]] 본 대연맹회에 파견되었다. 1925년 1월 20일 '[[https://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7379.html|일본국 및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 간의 관계에 관한 기본적 법칙에 관한 조약]]'이 체결되자 북경한교동지회 실행위원에 선임되어 조약 성립에 대한 선후책을 결의하였다. 1925년 6월 11일 북경에서 [[영일동맹]] 배척운동에 참여할 목적으로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10847|한흥]](韓興)·[[원세훈]]·[[서왈보]]·[[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7578|박건병]](朴健秉)·[[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7824|배천택]](裵天澤)·송호(宋虎)·황운룡(黃雲龍)·[[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9064|김세준]](金世晙)[* [[http://db.history.go.kr/id/su_007_1925_06_11_0450|일제침략하 한국36년사 7권]]에는 金世'''{{{+1 唆}}}'''으로 오기돼 있다.]·[[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3065|유우국]](柳佑國) 등과 함께 [[http://db.history.go.kr/id/su_007_1925_06_11_0450|선두자사]](先頭者社) 동인(同人)으로서 「中國國民(중국 국민)의 救國救族運動(구국구족운동)에 當(당)하여 我(아) 2千萬(천만) 兄弟姉妹(형제자매)에 告(고)함」이라는 격문[* 이 격문의 내용 중 '희망조항(希望條項)'에는 "中韓聯合(중한연합)하여 日本(일본)을 總攻擊(총공격)하자. 國內外(국내외)의 各種 社會(각종 사회) 및 各團體(각 단체)와 韓國民族運動團(한국민족운동단)과 聯合同作(연합동작)의 意志(의지)를 表示(표시)하고 中國國民運動(중국민족운동)에 대하여 精神(정신)과 物質(물질)의 應援(응원)을 授與(수여)하자." 등의 문구가 있었다고 한다.]을 제작하고 이에 연명한 뒤 시민들에게 [[http://db.history.go.kr/id/su_007_1925_06_11_0450|배포했다]]. 1926년 봄에 원세훈·배천택·김세준 등과 함께 한족동맹회(韓族同盟會)를 조직하고 조사부를 담당했다. 1926년 4월 26일 [[순종(대한제국)|순종]]이 승하하자 종척 집사(宗戚執事)에 [[https://sillok.history.go.kr/id/kzc_11904026_008|임명되었고]], 1926년 5월 10일에는 천릉시 종척 집사(遷陵時宗戚執事)에 [[https://sillok.history.go.kr/id/kzc_11905010_002|임명되었으나]] 북경에 체류 중이었으므로 실제 국상에는 참여치 않았다. 1926년 10월 16일 [[안창호]]가 제안한 '대독립당(大獨立黨) 결성'을 위해 한국유일독립당 북경촉성회(韓國唯一獨立黨北京促成會)를 창립할 때 집행위원으로 참여해 그해 11월까지 활동했다. 1927년 봄에는 박건병·유우국 등과 함께 도보사(導報社)를 설립해 사장에 취임했고, 그해 12월 20일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2747|한흥교]](韓興敎)·[[원세훈]]·유우국·김세준·송호·박건병·배천택·[[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10036|조성환]](曺成煥)·[[장건상]]·[[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930|이탁]](李鐸)·박모씨 등과 함께 대한독립단 북경촉성회[* 대독립당 조직 북경촉성회라고도 한다.]를 조직했다. 그러나 1932년 1월 27일 중국에서 귀국해 [[인천항]]에 입국했으나, 인천경찰서에 검거되었다. 그해 2월 1일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 [[http://db.history.go.kr/id/npda_1932_02_28_v0002_0160|송치되었고]], 2월 17일 경성지방법원의 예심에서 이른 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http://db.history.go.kr/id/npda_1932_02_28_v0002_0160|기소돼]] [[http://db.history.go.kr/id/gsdc_002_0400|경성지방법원의 공판에 회부되었다]]. 그리고 1932년 3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 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아 곧 출옥했다.[* 조남승 외 관계자들은 모두 [[중화민국]] [[북경시|북평시]](北平市에 체류 중이었므로 [[기소중지]] [[http://db.history.go.kr/id/gsdc_002_0400|처분을 받았다]].] 출옥 후에는 옥고의 여독으로 고통받다가 1933년 6월 26일 별세했다. 201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 이완용 연루설? == 《[[매천야록]]》 [[http://db.history.go.kr/id/sa_001r_0060_0120_0880|제6권 1910년 조]]를 보면, [[이완용]]과 조남승의 관계를 언급한 대목이 있는데, 그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09년 헨리 콜브란(Henry Collbran, 1853 ~ 1925)이 자신과 동업자 해리 라이스 보스트위크(Harry Rice Bostwick, 1870 ~ 1931), [[고종(대한제국)|고종]]이 합작으로 설립한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1619|한미전기회사]](韓美電氣會社)를 [[일본인]] [[http://db.history.go.kr/id/im_215_00547|무샤 렌조]](武者鍊三)가 설립한 일한와사회사(日韓瓦斯會社, 닛칸[[가스]]가이샤)에 매도했다. 이때 매도금으로 받은 금액 중 고종이 두 번에 걸쳐 기부한 130만원[* 1904년 한미전기회사 설립 당시 고종은 [[이완용]]과 [[이윤용(1855)|이윤용]]의 권유로 100만원을 보조금으로 기부했는데, 이중 40만원은 이완용 자신이 꿀꺽하고 60만원만 헨리 콜브란에게 건넸다. 이후 콜브란이 차도를 보수할 때도 고종이 70만원을 더 기부했다.]을 반납하기 위해 [[이완용]]에게 130만원을 건넸다. 그런데 이때 이완용은 이 금액 중 일부를 꿀꺽하고는 어새를 도용해 영수증을 위조해서 콜브란에게 건넸다. 마침 고종이 콜브란이 회사를 매도했다는 소문을 듣고 기존에 기부한 바 있는 원금 170만원이 들어오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해 사람을 시켜 콜브란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콜브란은 이완용으로부터 받은 어새가 찍힌 영수증을 고종에게 바쳤는데, 고종이 영수증이 위조된 사실을 깨닫고 그 원인을 규명하려고 했다. 이에 이완용의 하인이었던 조남승은 중죄를 받을까 두려워 도주했으나 이내 체포되었고, 결국 사건의 실체가 드러났다. > >그러나 이완용은 자신의 죄를 면하기 위해 [[통감부]]에 고종이 1894년 이후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 벌인 사건 일체를 모두 폭로했고, 이 사건과 관련된 문서들이 한 철제 궤짝에 몰래 숨겨져 있는데 그 궤짝이 [[주프랑스 대한민국 대사관|프랑스 영사관]]에 보관돼있노라 말했다. 일전에 1906년 [[이토 히로부미]]가 [[외부]]를 폐지할 때 [[조선]]-[[대한제국]]이 [[청나라]]·[[대영제국]]·[[미국]]·[[프랑스]]·[[러시아 제국]]·[[이탈리아]]·[[필리핀]] 등 9개 나라와 체결한 조약 문서를 찾아보려고 했으나 어디에 보관돼 있는지 알 수가 없어 끝끝내 찾지 못했었는데, 오랫동안 고종의 신임을 받고 있던 조남승이 자신이 [[천주교]] 신자임을 이용해 이 문서들이 담긴 철제 궤짝을 프랑스 영사관 내 교회당에 은밀히 보관해두었던 것이다. > >이에 일본은 프랑스인과 교섭해 그 궤짝을 열어 보았고, 그 안에 고종 재위 기간 동안의 모든 외교 문서 및 각 국의 문서, [[헤이그 특사]]사건에 관한 문서 등이 있음을 알았다. 그 뒤 이 문서들이 담긴 철제 궤짝을 [[일본]]으로 보냈고, 얼마 후 조남승은 석방되었다. [[매천야록]]의 신빙성에 대해서는 말이 많지만 위 기록을 그대로 따르면, 조남승은 이완용이 고종의 자금을 떼먹은 것, 고종의 어새를 훔친 것, 영수증을 위조한 것을 [[방조]] 내지는 동참했고, 이완용에게 청나라 등 9개 나라와 체결한 조약 문서 및 [[헤이그 특사]] 관련 문서를 비롯한 외교 문서의 행방을 알려주는 등 1910년 당시 이완용이 벌인 갖가지 친일 매국 행위에 동조했던 앞잡이 노릇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 실린 [[http://www.catholi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883|2008년 11월 29일 조광 고려대학교 사학과 교수 칼럼]]에서도 이완용의 죄를 혼자서 뒤집어 쓴 조남승이 자신 또한 죄를 면하기 위해 조약 문서 원본의 행방을 이완용과 일제에 알려 주었다는 식으로 내용을 기술했다. 그러나 조남승의 생질이자 [[독립유공자]] [[이회영]]의 손자인 [[이종찬(1936)|이종찬]] 전 [[국가정보원장]]이 [[https://m.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2303010600035#c2b|어머니로부터 전해 들은 말]][* 위에서 언급했듯이, 이종찬의 어머니는 조남승의 첫째 여동생이다.]에 의하면, [[헤이그 특사사건]] 후 [[일본 경찰]]이 조남승의 [[묘동]] 집에 들이닥쳐 조남승이 소지했던 모든 문서들과 고종의 옥새를 감췄다며 추궁했고, 집의 장판까지 뜯어내 수색한 뒤 조남승을 체포해갔다고 하며, 그리고는 1910년 6월 5일자 『[[황성신문]]』 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고 한다. >趙南升(조남승) 起訴(기소) >玉璽(옥새) 僞造犯(위조범) 趙南升(조남승)은 若林賚藏(와카바야시 라이조) 警視總監(경시총감)의 歸任(귀임)을 待(대)하야 起訴(기소)하기로 決定(결정)하얏다더라 이종찬의 증언에 따르면, 조남승은 외교 문건이 담긴 비밀 철상자를 [[뮈텔]] 주교에 부탁해 [[중림동]] [[약현성당]]에 은밀히 보관해두었는데, 조남승이 아닌 뮈텔이 비밀 철상자의 존재를 일제에 알렸다는 것이다. 이렇듯, 매천야록의 기록과 조남승의 생질 이종찬의 증언은 정면으로 대치되는데, 객관적으로 봤을 때 당시 민중들 사이에 떠돌던 또는 [[황현]] 자신이 알고 있던 일종의 [[썰]]을 다수 기록한 매천야록의 기록과 조남승의 최측근인 자신의 어머니로부터 들은 것을 토대로 한 이종찬의 증언 중에서는 당연히 후자가 더 설득력이 클 것이다. 그리고 설령 이종찬의 어머니가 자신의 오빠인 조남승을 두둔하려고 조남승이 모두 다 뒤집어 쓴 것이라 말했다고 하더라도, 1905년 당시 조병세와 함께 [[을사오적]]을 규탄하는 상소를 올린 조남승의 기존 행적은 물론 [[뮈텔]] 주교의 친일 행적[* 뮈텔은 [[안중근]] 의사를 핍박하며 사형 집행 직전 [[고해성사]]까지 거부하고, 안중근의 4촌 동생 [[안명근]]이 [[니콜라 빌렘]] 신부에게 말한 [[신민회]]의 [[데라우치 마사타케]] [[조선총독]] 암살 계획을 전해 듣고 곧바로 일제 헌병대에 고발하였으며, [[3.1 운동]]에 참여한 신학생들을 폭도로 매도하며 퇴학시켰다.]을 합쳐서 생각해보면, 이완용이 조남승에게 공금횡령죄를 뒤집어 씌웠고, 뮈텔 주교가 외교 문서의 행방을 일제에 밀고한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풍양 조씨]][[분류:종로구 출신 인물]][[분류:1882년 출생]][[분류:1933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분류:독립유공자 후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