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청사고)] 祖大壽 (1579 ~ 1656) [목차] == 개요 == [[명나라]], [[청나라]]의 장수. 자는 복우(复宇). [[임진왜란]]때 명군의 원병을 지휘한 [[조승훈]]의 아들. == 행적 == === [[영원성 전투]]와 금주 대첩 === 요동 영원(現 [[랴오닝성]] [[후루다오시]](지급시) 싱청시(현급시))사람으로 명에서 정동영의 유격에 임명되었고 경략 [[웅정필]]이 충성스럽고 부지런하다고 칭찬했으며, 천계 초에는 광녕순무 왕화정이 중군유격으로 삼았고 광녕이 함락되자 각화도로 달아났다. 대학사 손승종이 독사가 되자 조대수는 휘하 참장으로 김관과 함께 각화도를 지켰다. 손승종과 [[원숭환]]이 영원에 성벽을 쌓기로 하자 조대수는 영원성 공사를 맡았으며, 1624년 정월에 누르하치가 [[영원성 전투|영원성을 공격하자]] 방어에 참가해 후금군을 물리쳤다. 후금에서는 [[홍타이지]]가 즉위하고 명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1627년 5월에 금주성을 포위했다가 실패하면서 영원성을 공격하자 원숭환의 명령으로 조대수는 우세록과 함께 4천 명을 이끌고 후금군의 뒤를 돈 후에 성 밖에서 후금군과 전투를 벌였으며, 후금의 군사들은 다시 금주성을 공격했지만 실패해 끝내 후금군은 철수했다. === 금주 전선과 대릉하 전투 === 1628년에 원숭환이 독사로 임명해 상방보검을 하사하고 조대수는 6월에 요동 전선의 총병으로 승진해 금주에 주둔했으며, 1629년에 홍타이지가 영원, 금주를 함락시키지 못한 것으로 인해 요서를 우회해 북방을 통해서 명나라를 공격해 북경 근처까지 벌어져 이 일로 12월에 원숭환이 구금된 것을 듣고 산해관을 넘어 도망쳤다가 원숭환의 옥중 서신과 손승종의 만류로 귀환했다. 1630년 봄에 후금의 군사가 영평 등 4개의 성을 함락하자 홍타이자가 조대수의 친족이 영평 30리 마을에 거주하는 것을 듣고 군을 이끌고 잡아오도록 하면서 조대수의 조카와 친척을 붙잡았으며, 홍타이지가 조대수의 조카에게 자택을 주면서 병력을 통해 감시하게 했다. 손승종의 지시로 마세룡, 양소기, 조대락, 조가법, 장홍모, 유천록, 조공성 등을 이끌고 난주로 진격했다가 영평으로 가자 아민 등이 4개의 성을 버리고 돌아갔다. 후금의 군사가 물러나자 금주로 돌아갔다. 1631년 7월에 조대수는 군사를 이끌고 대릉하에 성을 쌓았다가 성벽이 완성되지 않았을 때 후금의 군사가 공격하자 포위되었고 성 안의 군사들이 서로 말을 잡아먹다가 사람을 잡아먹는 일까지 일어날 정도가 되었으며, 조대수는 항복을 결심하고 부장 하가강이 이를 말리자 그를 성 밖으로 쫓아낸 후에 투항했다. 하지만 사실 이것은 거짓 항복이었다. 홍타이지에게 거짓 투항한 후에 자신을 금주성으로 보내면 무혈 입성을 시켜주겠다고 했다가 후금의 진영을 벗어나자 금주성으로 들어가 성을 굳게 지키며 다시 항전했다. 이렇게 그는 무려 10년간 청군을 막았다. === 청나라와의 항전 끝에 투항하다 === 1638년 10월에 청(후금)의 군사가 명나라를 침공했고 조대수는 중후소에 군대를 주둔시켜 도도를 기습해 패배시켰다. 1639년 음력 2월에 아지거를 선봉으로 삼아 송산을 포위하자 숭정제의 명으로 송산을 지원했다. 조대수가 나타나자 청군은 영원에 주둔했고 홍타이지가 금주에 사자를 보내 항복을 권유했고 조대수는 조극용, 양진, 서창영 등에게 변방을 통해 금주를 취하고 오흔아구로 가라고 했으며, 청의 장수 알사란이 명군을 격파해 84명이 죽고 말 150필을 빼앗는 피해를 입었다. 1640년 5월에 몽고의 다라특부(多羅特部)의 소반대(蘇班岱), 아이파대(阿爾巴岱)등이 청나라에 투항을 요청하고 홍타이지가 지르갈랑 등을 이끌고 1500명으로 영접하자 조대수는 청나라의 군사가 적은 것을 알고 [[오삼계]], 유주지와 함께 7천 명이 출격했지만 지르갈랑에게 패했다. 7월에 금주 외성에서 몽고의 라무치 등이 청나라에 항복을 꾀해 내응하기로 했고 청나라의 군사가 도착하면서 외성이 함락되었으며, 홍타이자가 도르곤, 지르갈랑에게 번갈아 금주를 공격하라고 했다. 1641년 3월에 홍타이지가 금주를 다시 공격하자 [[홍승주]]가 오삼계 등 8명의 총병을 이끌고 13만 명을 지원해 송산에 주둔시켰다. 홍타이지가 명군의 보급을 끊고 송산에 포위해 1642년 2월에 홍승주를 투항시켜 지원군이 오지 못했으며, 송산성이 함락된 지 한 달도 안 돼서 금주성이 식량이 떨어지고 아사자가 속출해 방어가 어렵자 청나라에게 항복했다.([[송산 전투]]) 청나라의 장수들은 그가 이미 배신했기에 죽여야 한다고 했지만 홍타이지는 그를 용서했으며, 6월에 청나라에서 팔기군을 창설하면서 정황기 한군에 배치되었고 암반 장긴(총병관)의 직위를 받았다. 조카인 오삼계에게 투항을 권유하기도 했지만 소용없었고 1644년 9월에 지르갈랑의 호위를 받고 성경에서 북경으로 옮겼다가 1656년에 집에서 병사했다. [[분류:1579년 출생]][[분류:1656년 사망]][[분류:명나라의 인물]][[분류:청나라의 군인]][[분류:후루다오시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