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1 조르조 페를라스카}}}[br]Giorgio Perlasca'''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Giorgio_Perlasca2.jpg|width=100%]]}}} || ||<|2> '''출생''' ||1910년 1월 13일|| ||[[이탈리아 왕국]] [[롬바르디아|롬바르디아주]] 코모도 코모|| ||<|2> '''사망''' ||1992년 8월 15일 (향년 82세)|| ||[[이탈리아]] [[베네토|베네토주]] [[파도바]]|| || '''직업''' ||상인|| || '''종교''' ||[[가톨릭]]|| || '''명예칭호''' ||'''{{{#AC470C 열방의 의인}}}'''|| [목차] [clearfix] == 개요 == [[이탈리아]]의 [[가축]] 상인.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헝가리]]에서 [[홀로코스트]]로 죽을 뻔했던 [[유대인]]들을 구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생애 == === 초기 === [[1910년]] [[이탈리아 왕국]]에서 태어났으며, 젊었을 땐 [[베니토 무솔리니]]를 지지하며 자발로 [[검은 셔츠단]]에 입단, [[파시스트]]편에 서서 열심히 싸웠다. 특히 [[스페인 내전]] 때 무공을 세워, [[프란시스코 프랑코]]로부터 "비록 귀하는 [[이탈리아인]]이지만, 언제든지 [[스페인]] 공관에 와서 도와달라고 하면 발벗고 도와주겠다"는 허가증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왕정이었던 [[이탈리아]]에서 모두가 평등하다는 기치를 내걸었던 [[파시즘]]을 지지했기에, [[1938년]] 이탈리아가 [[나치 독일]]을 위해 [[유대인]] 차별 관련 법안을 제정한 것을 계기로 파시즘에 대한 환멸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 정부가 그를 포병 교육대 장교로 징발한 이후 그는 외국을 도는 상인이 되었고, 사업차 [[헝가리 왕국(1920~1946)|헝가리 왕국]]으로 파견되었다. 그가 [[헝가리]]에 있던 중인 1943년에 [[이탈리아]]는 [[연합국]]에 항복한다. 이에 [[나치]]측에서 [[이탈리아인]]이었던 페를라스카를 잡아 가두었으나, 탈출 기회를 잡아 [[스페인]] 대사관으로 도망치게 되었다. === 유대인 탈출 작전 === 조르조 페를라스카는 예전에 프랑코가 준 허가증으로 호르헤 페를라스카가 되었고, [[스페인]] [[대사관]]의 대리대사였던 앙헬 산스브리스는 조르조에게 유태인을 중립국으로 빼돌리자고 제안하였다. 이를 받아들인 조르조는, 이 일을 하기 위해 산스브리스로부터 스페인 대사관 직원 신분증을 받고, [[유대인]]을 구하는 일을 맡게 된다. 그가 맡은 임무는 스페인 대사관이 제공한 보호문서를 가진 유대인들이 험한 일 당하기 전에 보호 가옥을 만들거나, [[중립국]]으로 유태인을 호송하는 일이었다. 1944년, [[소련]]이 [[부다페스트]] 근처에 진주하자, 프랑코는 자기네 [[외교관]]이 소련에 넘어가는 걸 싫어하여 [[스위스]]로 다 빼버렸으며, 대리대사였던 산스브리스는 조르조에게 같이 가자고 하였지만, 조르조 페를라스카는 계속 부다페스트에 남아있었다. [[스페인]] 외교관들이 철수한 후 헝가리의 파시즘 정당인 [[화살십자당]]이 들이닥치자, '''산스브리스는 곧 올 거고, 난 산스브리스가 임명한 대리인이다!''' 라고 뻥을 치고, 화살십자당 당수인 [[살러시 페렌츠]]에게 약 1천만 원의 뇌물을 건넸다. 이 일을 하는 동안 죽음의 열차를 관리하던 [[홀로코스트]]의 실무 책임자 [[아돌프 아이히만]] 바로 앞에서 유대인을 빼돌리기도 했다. 그리고 그걸 본 [[라울 발렌베리]]가 저 사람이 아돌프 아이히만이라고 나중에 알려줬다. 그리고 1945년 1월 16일, [[소련군]]이 [[부다페스트]]를 해방시킬 때까지 수천 명의 [[유대인]]들은 호르헤 페를라스카의 노력 덕분에 살아남았다. 그리고 1949년 5월 29일, 페를라스카는 [[이탈리아]]로 가기로 하고, 부다페스트 동부의 기차역에서 지인들의 배웅을 받으며 이런 글을 받았다. >당신이 우리를 살려주고 노약자들을 보살펴주었던 그 친절함에 바칠 수 없을만한 찬사는 없습니다. 당신은 우리가 절망에 빠져있을 때 용기를 북돋아 주었으며, 우리는 영원히 당신을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 전능하신 [[야훼]]께서 당신을 돌봐주시기를 바랍니다. === 전쟁 이후 === 전쟁이 끝난 후 조르조 페를라스카는 다시 생업에 복귀했다. 그는 가족들에게까지 이때의 일을 말하지 않았으며, 평범한 생활을 살았다. 1987년 페를라스카에게서 도움을 받은 헝가리계 [[유대인]]들이 결국 그를 수소문하여 찾아낸 것을 계기로 페를라스카의 이야기는 전 세계로 퍼지게 되었다. [[이스라엘]]에서는 그에게 세계의 의인이란 칭호를 주었으며, [[이탈리아]], [[스페인]], [[헝가리]], 이스라엘에선 그에게 훈장을 추서했다. [[1992년]]에 향년 82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 매체에서 == 이탈리아에선 그를 기리는 《Perlasca, un Eroe Italiano》[* 번역하자면 '페를라스카, 이탈리아의 영웅']란 영화가 [[2002년]] 개봉되기도 하였다. [[분류:스페인 내전/군인]][[분류:홀로코스트/의인]][[분류:이탈리아의 기업인]][[분류:1910년 출생]][[분류:1992년 사망]][[분류:롬바르디아 주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