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송사)] ||<-2> '''{{{#ece5b6 대송의 황족[br]초영헌왕(楚榮憲王)[br]{{{+1 趙似 | 조사}}}}}}''' || || '''[[시호|{{{#fff 시호}}}]]''' ||영헌(榮憲) || || '''[[작위|{{{#fff 작위}}}]]''' ||화국공(和國公) → 보녕군왕(普寧郡王) → 간왕(簡王) [br] → 채왕(蔡王) → 한왕(韓王) → 초왕(楚王)^^추봉^^ || || '''{{{#fff 성}}}''' ||조(趙) || || '''{{{#fff 이름}}}''' ||사(似) || || '''{{{#fff 생몰}}}''' ||1083년 ~ 1106년 || ||<^|1><-2><:>{{{#!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fff 부황}}}''' ||[[신종(송)|신종]] || || '''{{{#fff 모후}}}''' ||[[흠성황후]] || || '''{{{#fff 형제}}}''' ||[[철종(송)|철종]][br][[휘종(송)|휘종]] ||}}}}}}}}}|| [목차] [clearfix] == 개요 == 중국 [[북송]]시대의 황족으로 제6대 황제인 [[신종(송)|송신종]]의 13남이다. 모후는 [[흠성황후]][* 조사가 태어날 당시에는 당시 덕비 신분이었다.]로 제7대 황제인 [[철종(송)|송철종]]과 동복형제 관계이며, 제8대 황제인 [[휘종(송)|송휘종]]과는 이복형제 관계가 된다. == 상세 == 조사는 1084년에 검교태위, 집경군(集慶軍) 절도사로 제수되었고, 화국공(和國公)이라는 작위를 받았다. 형인 [[철종(송)|철종]]이 즉위한 뒤에는 작위가 보녕군왕(普寧郡王)이 되었으며, 1098년에는 간왕(簡王)으로 책봉되었다. 1099년에 철종의 유일한 아들인 헌민태자 조무가 죽고, 1100년에는 철종마저 후사 없이 죽으면서, 북송 황실은 신종의 남은 아들들 중에서 후계자를 선발해야 했다. 철종이 사망한 1100년을 기준으로 볼 때, 신종의 남은 아들들은 조사를 비롯하여 신왕 [[조필(송)|조필]], 단왕(端王) 조길(趙佶), 신왕(莘王) 조우(趙俁), 목왕(睦王) 조시(趙偲)였다. 여기서 신왕 조필은 눈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후계자 후보에서 제외되었고, 재상 [[장돈]]이 내세운 인물이 바로 조사였다. 철종의 친동생인 조사가 멀쩡히 살아있고 개인적인 흠결도 없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조사가 무리 없이 즉위할 수 있었겠지만, 당시 황태후였던 [[흠성헌숙황후]]는 모두 신종의 아들들이니 차별을 받으면 안된다는 논리를 내세우며 단왕 조길을 후계자로 주장하였다.[* 흠성헌숙황후가 단왕 조길을 후계자로 내세운 것은 신왕 조필 다음으로 장성한 면이 있겠지만 단왕 조길에 대한 흠성헌숙황후의 개인적인 총애도 한몫하였다. 게다가 흠성헌숙황후는 흠성황후(덕비)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도 한몫하였다.] 결국 흠성헌숙황후의 주장이 관철되어 조사는 제위에 오르지 못하였다. 단왕 조길이 즉위한 뒤, 조사는 채왕(蔡王)으로 다시 책봉된다. 조사는 휘종으로부터 제위를 빼앗으려 한다는 의심을 받았지만, 휘종은 조사를 용서하였다. 조사는 이후 1106년에 사망하여, 태사(太師), 상서령(尚書令) 겸 중서령(中書令), 기주목(冀州牧), 한왕(韓王)으로 추증되었다가 초왕(楚王)으로 다시 추증되고 영헌(榮憲)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분류:송나라/인물]][[분류:1083년 출생]][[분류:1106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