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상위 문서, top1=조선)] [목차] === 아시아 === ==== [[조명관계]]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조명관계)] [[공민왕]]때 막 원을 몰아내고 불안한 처지이던 [[명나라]]에 곧 칭신하여 명 태조 [[주원장]]의 호감을 샀다. 공민왕은 사신을 보내가며 명나라에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는데, 사실 이는 요동 정벌을 위해 시간을 벌기 위한 준비였다. [[홍무제]]가 [[요동]] 문제 등을 두고 이성계가 세운 조선은 고려와 다르게 명의 지배 질서에 순순히 따름으로써 대체적으로 큰 정치적 갈등을 겪지 않았다. 16세기 말 [[임진왜란]] 때는 변경 안정을 위해 조선의 원병 요청에 응하여 대규모 군대를 파병하여 조선의 군사권 및 일본과의 평화협상을 주도하였고, 이후 한동안 요동아문 등이 조선이나 대[[에도 막부|일]], 대여진 교섭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후금]]이 요동을 정복하고 [[정묘호란]] 등을 일으켜 명과의 관계를 갈라놓고자 했고, 마침내 [[병자호란]]에서 승리함으로써 조선과 명의 위계적인 [[국교|관계]]를 [[국교단절|단절]]시켰다. ==== [[조선-여진 관계|조여관계]]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조선-여진 관계)] 조선과 [[여진]] 제부족 간의 관계는 시대에 따라 급격하게 변화했다. 과거 원나라의 [[다루가치]] 시절 함경도를 지배했던 [[전주 이씨|조선 왕실]]은 여러 여진 부족들에 대해서도 간접적인 지배력을 행사했다. 이후로도 많은 여진 부족들이 조선에 [[사대]]하여 조공을 바쳤으며 조선 역시 이들을 교린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동시에 적대적인 부족들과는 여러 차례의 전쟁을 벌여 그들이 성장하는 것을 방지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16세기 말 [[임진왜란]]으로 조선과 명나라의 국력이 약해진 틈을 타 건주부를 중심으로 여진이 통일되었다. 이로써 형성된 만주족은 결국 [[후금]]과 [[청]]을 세워 조선을 군사적으로 제압하고 상국이 된다. 이후의 양국 외교사는 아래 문단에서 서술한다. ==== [[조청관계]]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조청관계)] 1610년대 후반 [[후금]]이 급격하게 성장하자, [[광해군]]은 비밀 외교로 친후금적 행보를 보이며 후금과의 충돌을 피하고자 하였으나, 이 과정에서 지지 세력의 부재와 그에 따른 공론 형성의 실패 그리고 신료들과의 갈등으로 국정이 혼란해졌으며, 반대 세력이 그 틈을 타 [[인조반정|계해정변]]을 일으켜 집권하였다. [[인조]] 정권은 반정의 명분으로 광해군의 배명 행위를 내걸었기 때문에 사대부의 여론에 따라 '친명배금' 노선을 견지할 수 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은 [[모문룡]]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졌으며, 후금과의 사개 왕래를 중단함으로써 [[홍타이지]]를 자극했다. 홍타이지 및 아민은 1627년 [[정묘호란]]을 일으켜 각각 [[강도맹약]]과 [[평양맹약]]을 맺어 단절됐던 조선과의 관계를 수립했다. 이후 1636년에 이르러 홍타이지는 자신의 존호례 동참에 대해 극렬하게 거부하는 조선의 여론을 확실히 깨닫고 조선을 기망하다가 이듬해 기습적으로 유린함으로써, 명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시키고 조선에게 [[삼궤구고두례|신속]]을 강요했다. 그렇게 조선은 청에게 막대한 세폐를 조공으로 바쳐야 했으며, [[소현세자]] 및 [[봉림대군]] 등이 인질로 잡혀간 심양관을 통한 내정 개입으로 인조의 왕권은 크게 실추되었다. [[효종]]은 [[김자점]]을 비롯한 친청파를 숙청하고 일본 방어를 빌미로 군사력을 강화하고자 하였으나 청의 감시 및 간섭으로 성과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효종과 [[송시열]]의 죽음 이후 [[북벌론]]은 유명무실해졌으며, 이후 [[강희제]]가 [[남명]] 세력들을 제압함으로써 조선에게는 일말의 반기를 들 여지 조차 사라졌다. 강희제가 [[준가르]] 등을 축출하여 더이상 조선에 대한 견제가 필요없어지자 강희 후반부터 양국 관계를 상당히 안정될 수 있었다. 거기다가 [[건륭제]]가 조선의 주문(奏文) 위식을 문제삼은 것을 계기로 [[정조]]가 사대부의 대명 의리를 무릅쓰고 전례를 왜곡하여 별사까지 파견하는 등 지극정성으로 사대한 끝에 건륭제의 칠순 진하에서 그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아편전쟁]]으로 [[난징조약]]이 체결되자, 서양의 통상 요구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던 조선은 [[도광제]]에게 [[난징조약]]의 범위에 자국을 포함해줄 것을 요청했으며, 청은 그에 따라 영국 선교사 및 상인 등에게 조선의 출입을 자제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톈진조약]]으로 청이 사실상 완전히 개항되어 버리자, 청 측은 서양인들의 조선 출입 요구에 대해 중국은 속국에게 봉교(奉敎) 여부를 강요할 수 없다고 불개입 의사를 보였다. 그런데 이를 빌미로 청의 [[종주권]]을 부정하며 [[병인양요]]가 발발하자, 조선은 문인들은 본격적으로 청의 관원들과 접촉해서 국제 정세와 그들의 권고를 수집했다. 청 측은 원병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님을 알리면서 열강과의 타협을 권고했으며 [[신미양요]] 당시에도 미국에게 조선에 접근하지 말 것을 권고할 뿐이었다. 청일수호조규와 이후의 [[조일수호조규]] 체결 과정에서 청 측은 조선의 외교에 개입하지는 않지만 조선을 암중의 보호할 수 있다는 의지를 피력하며 종주권을 관철하고자 하였다. 1880년대 초 여서창(丁日昌), 하여장(何如章) 등의 건의가 채택되어 청이 조선에게 열강과의 조약을 권고하였지만, 조선은 여전히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하여장이 [[김홍집]]에게 《[[조선책략]]》을 건내자 조미조약이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한편 하여장을 비롯한 청 외교관들은 유럽 속방들을 모방해서 조선에 대한 개입을 강화할 것을 요망했다. 1882년 [[임오군란]]이 발발하자 청은 조선의 파병 요구에 응하여 조선의 내정에 개입해 군란을 진압하고 군대를 주둔했다. 나아가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경제적 이권을 장악하고 조선의 속방 지위를 국제법적 방식으로 명문화했다. 청이 조선의 자주권을 침해한다고 반발한 [[김옥균]]과 [[박영효]] 등 친일 개화파가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켜 조공 관계를 철폐했으나 3일만에 진압당해 실패했다. 다음해 청은 무역장정에 의거하여 [[원세개]]를 상무위원으로서 주찰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駐紮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로 파견하였는데, 원세개는 조선 내정에서 국왕에 비견할만한 막대한 권력을 행사했다. 그리고 조선의 외교권을 통제하고자 상국의 윤허 후 출국을 관철했으며, 나중에는 '영약삼단'을 제시하여 청의 종주권을 드러내고자 했다. [[동학농민운동]]의 세가 커지자, 민씨 척족은 청에게 다시 한 번 원병을 청했는데, [[이홍장]]의 우려대로 일본이 조선의 주도권을 선점함으로써 [[청일전쟁]]이 발발했다. 청은 결국 일본에게 패전하여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했는데, 이때 조선은 청으로부터 완전무결한 자주 독립을 보장받았다. 이후에도 청 측 인사들은 조선을 속국으로 취급했으나 실질적인 종주권이 탈각된 이상 별로 의미 있는 주장은 아니었다. 이후 [[한청통상조약]]이 체결되면서 양국은 평등한 [[국교]]를 수립했다. ==== [[조일관계]]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조일관계)] [[일본]]과는 기존의 교린 관계를 맺어왔다가 [[임진왜란]] 이후 관계가 악화되었으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막부 정권이 수립된 후 통신사 파견을 통해서 관계가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 이후 [[이토 히로부미]], [[사이고 다카모리]] 등이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하고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 조약]]을 계기로 불평등한 조일 관계가 수립되었고 문호 개방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계기로 일본의 간섭을 받게 되었으며 [[구한국]] 체제가 들어선 이후인 1905년에는 [[을사조약]]으로 [[조선통감부]]의 감독을 받는 처지가 되었다가 1910년에는 마침내 일본의 식민 지배권에 들어갔다. ==== 조태관계 ==== [[태국]]과는 14세기 섬라곡국([[아유타야 왕국]]) 시절 최초로 친선 관계를 맺었다. 아유타야는 조선 건국 후 최초로 외교 사절을 보낸 국가이기도 했다. 이때 온 사절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 바로 [[화교]] 출신 외교관이자 상인이었던 [[진언상]]이다. 조선 역시 이에 회답사를 보내고 태국과의 우호관계를 수립하려 했으나, 동중국해 일대에 날뛰고 있던 [[왜구]] 때문에 실패한다. ==== 조조관계 ==== [[인도네시아]]의 조와국([[마자파힛 제국]])과도 조선 전기 태종 시기에 몇 차례 사신이 오간 기록이 남아 있다. 이 시기 마자파힛의 사신으로 왔던 인물 역시 상술한 화교 상인 [[진언상]]이다. 마자파힛과의 외교 역시 [[왜구]]의 발호로 인해 동아시아의 바닷길이 엉망이 되어 얼마 지나지 않아 끊어지고 만다. ==== 조유관계 ==== 유구국([[류큐 왕국]])과는 15세기 ~ 16세기 경 우호 관계를 맺었다. 앞선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달리 류큐와의 외교와 무역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류큐 사신단은 주기적으로 조선을 왕래했고 조선 측에서도 [[신숙주]]가 사신으로 파견되어 [[해동제국기]]를 남기기도 했다. 류큐의 사신들과 상인들은 조선이 후추와 설탕을 비롯한 각종 동남아시아산 사치품과 [[각궁]]의 재료인 [[물소]] 뿔을 수급하는 주된 통로였다. 양국의 관계는 [[임진왜란]] 이후로도 계속 이어졌으나, [[병자호란]] 이후 국가 대 국가 관계로서는 단절된다. 그러나 이후에도 청나라를 통해 간접적으로 교류하였다. === 유럽 === ==== [[조러관계]]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조러관계)] [[러시아 제국]]은 조선과 국경을 접한 유일한 유럽 열강이다. 과거 [[나선정벌]] 당시 최초로 접하였으나 서로가 누구인지는 알지 못한 채 단발적인 충돌로 끝났다. 본격적인 접점은 러시아가 1860년 [[연해주]]를 점령한 이후부터이다. 외교 관계의 시작은 1884년 맺어진 [[조러수호통상조약]]이었다. 러시아 제국의 남하는 19세기 말 조선의 운명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친 사건이었다. 러시아의 남하에 위기감을 느낀 조선 정부는 개항을 통해 근대화를 추진했으나, 한편으로는 [[명성황후]]가 일본을 견제할 목적으로 다소 긴밀한 관계를 맺은 적이 있으며 1896년 고종의 [[아관파천]]을 계기로 더욱 가까워졌다. 러시아는 정동에 [[주한러시아공사관]]을 두었고, 대한제국 역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주러대한제국공사관을 두었다. 그러나 1904년에 일어난 [[러일전쟁]] 때 러시아가 일본에게 패전하게 되고 대한제국이 일본에 의해 [[을사조약]]을 강제로 맺게 되면서 관계가 끊어졌다. ==== 조영관계 ==== [[대영제국]]과는 여러 차례의 이양선을 통해 처음 접하였다. 본격적인 외교 관계는 1883년의 [[조영수호통상조약]]으로 인해 맺어졌다. 이로써 당대 최고의 선진 열강이었던 영국을 통해 많은 문물이 조선과 대한제국에 들어왔으나, 국가 간의 관계로서는 가까운 편은 아니었다. 러시아와 갈등을 빚고 있던 영국은 1885년 [[거문도 사건]]을 일으켜 조선의 영토를 침탈하였고, 러시아-프랑스 연합과 독일 제국의 극동 해군력 증강에 맞서 [[일본 제국]]을 후원했다. 강력한 영국 해군으로도 이미 극동의 패권을 확고하게 장악하기에는 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영국은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용인하면서 간접적으로 [[경술국치]]에 기여한다. 영국은 조선의 수도 한양에 [[주한영국공사관]]을 두어 외교 업무를 처리했고, 조선과 그 후신 대한제국 역시 [[런던]] 켄싱턴에 주영대한제국공사관을 두었다. ==== 조불관계 ==== 조선과 [[프랑스]]는 좋지 못한 악연으로 시작하였으나 외교관계 수립 이후 가까워진 케이스다. 조선의 개항 이전에는 [[파리 외방전교회]] 출신의 [[프랑스인]] 선교사들이 다수 조선에 진출하여 [[가톨릭]]을 포교했다. 이렇듯이 [[한국 가톨릭]]의 확장과 성장에는 프랑스가 크게 기여하였다. 하지만 이로 인해 벌어진 종교 박해는 양국 간의 군사적 충돌인 [[병인양요]]로 이어졌으며 이 과정에서 많은 문화재들이 침탈당했다.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을 통해 양국이 외교 관계를 수립한 이후 많은 프랑스 문화와 문물이 조선에 들어왔으나 정치적으로는 가톨릭 문제로 인해 충돌이 잦았다. 하지만 1895년 청일전쟁 이후 프랑스가 러시아 및 독일과 함께 [[삼국간섭]]을 일으켜 일본의 팽창을 저지하면서 본격적으로 가까워지기 시작했는데, 이 시기 다수의 프랑스인 관료들이 조선과 대한제국에 고문으로 들어왔기 때문. 영일동맹에 맞서고자 했던 프랑스는 마이너 파트너로서의 대한제국의 가치에 주목하였다. [[프랑스군]] 역시 러시아 제국군과 함께 [[대한제국군]]의 현대화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1904년 벌어진 러일전쟁으로 일본이 한국을 점령하며 외교 관계는 깨어지게 된다. 프랑스는 조선 수도 한양에 [[주한프랑스공사관]]을 두었으며, 대한제국 역시 프랑스 파리에 주불대한제국공사관을 설치했다. ==== 조이관계 ==== 서세동점의 시기 이전에도 [[이탈리아]]는 간접적으로 조선에 문화적인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다. 중국에 파견된 [[이탈리아인]] [[예수회]] 선교사들을 통해 서구의 사상과 기술, 그리고 [[가톨릭]]이 동아시아에 전파되었기 때문이다. 서학이라 불린 이 새로운 조류는 조선의 실학자들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19세기 중반 통일전쟁으로 태어난 신생 [[이탈리아 왕국]] 역시 여러 차례 함선과 사신들을 보내어 조선과의 통상조약을 맺고자 시도하였으나 조선 측의 거절로 한동안은 고배를 마셨다. 양국이 본격적으로 관계를 맺은 것은 1884년 조선과 이탈리아 왕국이 [[조이수호통상조약]]을 맺은 이후부터다. 이탈리아는 1901년 한성에 [[주한이탈리아공사관]]을 세웠다. 다만 양국 간의 교류는 비교적 활발하지는 않았고, 1904년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며 관계가 끊어졌다. ==== 조독관계 ==== [[독일]]과의 관계는 독일이 완전히 통일되기 이전 [[북독일 연방]] 시절인 1866년에 시작되었다. [[프로이센 왕국]]의 상인이었던 오페르트가 남연군의 묘를 [[오페르트 도굴사건|도굴하면서]] 본격적으로 양국이 접촉한 것이었다. 이 사건은 격노한 조선이 쇄국을 더욱 강력하게 밀어부치게 된 계기였다. 양국의 본격적인 외교관계는 [[독일 통일]] 이후인 1883년 [[조독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며 수립되었다. 식민지 경쟁의 후발주자였던 [[독일 제국]]은 아시아에 보유한 정치적 이권이 사실상 전무한 국가였으므로 오히려 문화적, 경제적 측면에서 조선에 깊게 침투할 수 있었다. 독일계 무역회사인 [[세창양행]]은 조선이 서양 문물을 들여오는 주요 창구로 기능했으며 독일인 고문 [[묄렌도르프]]는 조선의 외교 고문으로 활약했다. 다수의 독일인 상선사관들 역시 조선과 대한제국 선적 선박의 항해사나 선원으로 고용되어 활약했다. [[독일 제국군]]의 각종 무기들 역시 조선으로 흘러들었으며 특히 크루프 사의 야포는 조선군과 대한제국군 포병의 제식 무기로 사용되었다. 작곡가 [[프란츠 에케르트|에케르트]] 역시 대한제국의 애국가를 작곡하기도 했다. 독일은 조선 수도 한양에 [[주한독일공사관]]을 세워 외교 업무를 처리했다. 조선과 대한제국 역시 주독 공사를 임명하였으나 독일에 공사관을 두지는 않았다. 정치적으로 독일은 1895년의 [[삼국간섭]]을 통해 일본의 확장을 저지하였다. 1897년 독일이 한국과 인접한 청나라의 [[키아우초우|칭다오 조계]]를 확보한 이후에는 좀 더 많은 접점이 있었다. 왕자이자 해군 군인이었던 [[하인리히 폰 프로이센]]과 [[아달베르트 폰 프로이센]]이 방한하였으며, [[의화단 전쟁]] 당시 독일 제국 해군 함선들이 친선 우호 목적으로 제물포에 기항하여 휴식을 취하기도 했다. 양국의 외교는 1904년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며 끝났다.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일본의 불법적 주권 침해에 반발한 고종의 외교적 호소에 호응했고, 조선 왕조의 비자금을 도이체방크에 입금해주었다. 이 비자금의 절반은 일본이 인출하였으나 나머지 절반은 현재 행방이 묘연한 상태다. ==== 조오관계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역시 여러 차례 함선과 사절단을 보내어 조선과 외교 관계를 맺고자 시도했다. 1880년대 조선의 개항으로 인해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상인들 역시 여럿이 제물포로 건너가 호텔을 여는 등 상업 활동에 종사하였으나, 양국 간의 외교 관계가 수립되지 않아 이들은 큰 불편을 겪었다. 때문에 당시 오스트리아인들과 관련된 업무는 독일 제국 공사관에서 대행하였다. 1892년 [[조오수호통상조약]]으로 조선과 오스트리아는 외교 관계를 맺었으나 크게 많은 영향을 서로 주고받지는 않았다. 오스트리아는 당시 조선과 수교했던 열강들 중 유일하게 조선에 상주 공사관을 두지 않았고, 주일오스트리아공사관에서 업무를 처리했다. 조선과 대한제국 역시 주오스트리아특명전권대사를 임명했으나 빈에 상주 외교공관을 설치하지는 않았다. 다만 의화단 전쟁에 참전했던 [[오스트리아 제국 해군]] 함선 몇 척이 제물포에 기항했던 기록은 남아 있다. 그리고 수교 당시 고종이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 양국 우호의 선물로 보낸 [[두정갑]]은 아직도 오스트리아에 잘 보존되어 있다. ==== 조정관계 ==== [[덴마크]]와 조선의 관계는 1889년 조선에 해관원으로 들어온 한 덴마크인으로부터 시작한다. 1897년 세워진 덴마크 동아시아 회사 (현 EAC Invest A/S) 역시 조선 측에 통상을 요구하였고, 결국 1902년 양국 간에 [[한정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다. 이 조약은 대한제국이 맺은 최후의 외교 조약이기도 하다. [[https://m.khan.co.kr/opinion/readers-opinion/article/201202272143245|#]] 덴마크 역시 조선 및 대한제국과 자주 교류한 국가는 아니었으나 큰 영향을 하나 남겼는데, 바로 [[전신]]선 설치이다. 19세기 후반 덴마크 북부전신회사(Det Store Nordiske Telegraf-Selskab)는 극동을 포함한 전 세계에 전신선과 [[해저케이블]]을 부설하고 있었고 조선도 주요 고객 중 하나였다. 이 내용은 조선왕조실록 및 덴마크 북부전신회사의 [[https://www.kb.dk/e-mat/dod/113414050345_bw.pdf|기록물]]에[* 조선 관련 보고서는 160p부터 서술된다.] 모두 기록되어 있다. 1880년대 후반 덴마크 전신회사가 조선에 전신선을 부설한 후 조선이 이전처럼 타국보다 늦게 외국 소식을 접하는 일들은 없어졌다. ==== 조백관계 ==== 조선의 후신인 대한제국과 [[벨기에]]는 1901년 [[한백수호통상조약]]을 통해 수교하였다. 조약 내용은 프랑스와 맺었던 [[조불수호통상조약]]과 거의 동일하다. 벨기에는 1903년 조선에 [[주한벨기에영사관]]을 세워 외교 업무를 맡겼다. ==== 그 외 ==== [[노르웨이]]의 경우 공식 수교를 맺지는 않았다. 하지만 여러 노르웨이인 상선사관들이 조선 및 대한제국 국적 선박들의 항해사로 고용되어 있었으며, 대한제국의 해관에도 여럿 근무했다. 이 중 한 명이 바로 1987년 [[노벨화학상]] 수상자인 [[찰스 피더슨]]의 아버지, 브레데 피더슨(Brede Pedersen)이었다.[[https://m.koreatimes.co.kr/pages/article.asp?newsIdx=71288|#]] === 아메리카 === ==== 조미관계 ==== [anchor(조미관계)][[미국]]과는 수호통상조약 요청을 계기로 대면한 적은 있지만 [[흥선대원군]]의 반대로 맺어지지 않았고 미국 상선 제네럴 셔먼 호가 평양 입항을 시도하다가 화재가 발생하게 되고 1871년 [[신미양요]]가 일어나면서 다소 악화되었으나 결국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에 따라 미국과의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다. 그러나 1905년 [[을사조약]]에 따라 단교되었다. === 관련 문서 === * [[조러관계]] * [[조일관계]] * [[조명관계]] * [[조청관계]] * [[조선-여진 관계]] [각주]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조선, version=3879)] [[분류:조선]][[분류:대한민국의 외교]][[분류:과거의 외교 관계]][[분류:나무위키 외교 프로젝트]][[분류:나무위키 한국사 프로젝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