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趙曮}}} [[1719년]]([[숙종(조선)|숙종]] 45년) ~ [[1777년]]([[정조(조선)|정조]] 1년) [목차] == 개요 ==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 조씨|풍양]](豊壤), 자는 명서(明瑞), 호는 영호(永湖)이다. [[정조(조선)|정조]]의 외조부인 [[홍봉한]]의 [[매제]]이자 [[신정왕후]]의 증조부이다. == 생애 == 1719년 종1품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를 지낸 아버지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1866|조상경]](趙尙絅)과 어머니 [[이(성씨)|부평 이씨]](富平 李氏) 이정태(李廷泰)[* 1687년(숙종 13) 식년시 진사시에 3등 40위로 입격하였으며[[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b_1687_015683|#]], 종5품 대구부판관(判官)을 지냈다.]의 딸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1738년]]([[영조]] 14) 식년시 [[진사|생원]]시에 3등 64위로 입격하고[[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c_1738_021394|#]], 정8품 세자익위사시직(世子翊衛司侍直)에 재직하다가 [[1752년]](영조 28) 정시(庭試) 문과에 을과 2위로 급제하여[[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MN_6JOc_1752_009362|#]] 이듬해 정6품 [[사간원]]정언(正言)에 제수되었다. [[1763년]] [[조선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왔는데, 이때 '''[[고구마]]를 국내에 최초로 들여왔던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본인이 [[대마도]]에서 겪은 일들을 기록한 해사일기(海槎日記)에 고구마의 재배법과 보관법 등 각종 정보들을 담음으로써 국내의 고구마 재배는 일시적으로 끝나지 않고 현대까지 이어지게 된다. 이렇듯 조선의 [[구황작물|구황(救荒) 작물]] 도입에 큰 역할을 했으나, [[문익점|목화를 들여온 분]]에 비해 언급이 덜되는 편이다.[* 아마 [[풍양 조씨]] 세도 정치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놀랍게도 그에게는 고구마 알러지가 있었다. 그래서 그들의 후손들에게도 고구마 알러지가 유전되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gdCR9tzEvlc)]}}} || || [[천일야사]]에서 묘사한 조엄의 고구마 재배기. [* 영상에서는 드라마적 각색이 크게 이루어졌기에 고구마 도입과 통신사 행렬의 구체적인 방문 과정은 해사일기를 참고하는것이 낫다. 지금도 그렇지만 사신은 한 나라를 대표하는 외교관으로, 특히 조선과 일본같은 대등한 외교적 관계의 국가끼리는 속으로 멸시할지언정 외교관을 함부로 하지도, 함부로 행동을 보이지도 않았다. 고구마 도입은 재배를 위한 조엄의 노력과는 별개로 해사일기에선 한 문단으로 끝날정도로 쉽게 이루어졌으며 외교적인 문제가 벌어지지도, 조엄이 무릎을 꿇지도 않았다.] || 사후 조엄의 [[신정왕후 조씨|증손녀]]가 [[효명세자]]의 세자빈이 되면서, [[조만영]], [[조인영]] 형제를 중심으로 한 [[풍양 조씨]]의 [[세도정치]]가 열리게 된다.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에 그의 묘소와 기념관이 있으며 그의 이름을 딴 조엄 밤고구마라는 브랜드가 있고 '''조엄로'''[* 지정초등학교에서 [[원주기업도시]]로 진입하는 도로다.]라는 도로명이 있다. --서원주 역세권-- [각주][include(틀:문서 가져옴,title=조엄,version=56)] [[분류:조선의 문관]][[분류:1719년 출생]][[분류:1777년 사망]][[분류:풍양 조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