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송나라/인물]] [[분류:1236년 사망]] [[분류:전쟁 사망자]] [include(틀:송사)] [목차] == 소개 == 曹友聞, ?~1236년 자는 윤숙, 동경 율정(지금의 감숙 휘현) 사람으로, 남송의 명장이다. 송초 명장 조빈의 13세 손이라고 한다. 사천 지역에서 동생 조만과 함께 끝까지 싸우다 장렬히 전사하였고, 시호는 의절이다. == 생애 == === 사천의 명장 === 남송(南宋) 보경(寶慶) 2년(1226년) 중진사로 면죽현위(面竹縣位)에 임명되었다가 이듬해 천수군(天水軍) 교수로 부임하면서 [[칭기즈칸]]은 [[서하]] 수도 중흥부(中興府)[* 오늘날 닝샤후이족 자치구의 인촨 시]를 포위 공격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있었다. 당시 중흥부는 뚫리지 않았지만 시간문제였고, 서하가 망국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게 되자[* 1227년 서하가 망하고, 흥경부의 서하인들이 도륙당하게 된다.] 칭기즈칸은 군대를 남송 관내로 진입시켜 계주(지금의 감숙 무도 동쪽)를 일거에 장악하고 천수군(지금의 감숙 성 톈수이 시)을 포위했다. 이때 조우문은 아직 부임하지 않아 천수군의 함락 여부는 그와 전혀 관계가 없었는데, 하물며 문관(文官)이라면 충분히 제자리에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어려움에 직면했다는 소식을 듣고 단발로 군성으로 들어가 수비신 장유와 함께 군민을 조직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칭기즈칸이 육반산에서 병사하자 몽군은 철수하고 군성은 보존하였다. 그 후 사천제치사는 조우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큰 깃발을 그에게 수여하였다. 서기 1230년 7월 천산지형을 장악하려는 몽군은 당시 사천제치사 계여연(桂如淵)이 범처럼 두려워하는 틈을 타 천산지선을 삼관문(三關門), 오주(五州)를 울타리로 삼아 오주(五州·성주·봉주·천수군·계주·서화주)·보(保) 삼관문(7관·선인관·선인관)을 유린했다.이 전투에서 송군 장수는 대부분 땅을 버리고 떠났지만, 조우만이 가재를 털어 5천 명을 모집했고, 그제야 천수군을 잃지 않게 하였다. 사후에 사천제치사는 조우문이 대담할 뿐만 아니라 확실히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를 칠방관문을 지키게 하였다. 조우문은 이번 몽군의 진격 전 이미 무익대부, 각문선찬사인, 이주 주둔어전 제군까지 모두 통제하여 사천의 4대 주력 금군(금군·면융·흥원·금주·이주)의 통수권자를 차지하였다. 청야전술 이후 활단이 대군을 이끌고 대안군을 공격했으나 조우문에게 밀렸고, 그 덕에 조정에서 무덕대부(武德大夫), 좌효기대장군(左曉奇大將軍)으로 승격된다. === 대표 전투 === 이종 단평 2년(1235년) 초 [[오고타이]]는 몽골, 서하, 토번과 몽골에 투항한 한군을 집결시켜 50만 대군(大軍)으로 남침했다.[* 1234년 남송은 금이 망하자 낙양, 개봉으로 진군해 이 두 도시를 수복하나 몽골군에 다시 빼앗겼다.] 몽골의 대군병은 두 갈래로 나뉘어 동로는 셋째 아들인 쿠추가 이끌고 양한(楊漢)을 침공했으며, 서로는 오고타이의 차남인 활단(活端) 등이 이끌고 사천(四川)으로 출정했다. 사천의 활단 군은 춘궁을 먼저 공격하여 천수를 에워쌌다. 조우문은 홀로 천수 수장 장유(張維)등과 수성요략(守城要略)을 계획하고, 7천여 명의 병사를 모집했으며, 그의 동생 조만(曹萬)과 함께 선인관(仙人關)·칠방관(七防關)·백수강(白水江) 등의 요새를 지켰으며, 매 전투마다 친히 사졸을 지후하였다. 천수군에 임명되었다. 몽골군은 계주를 공격하였다. 그는 군대를 이끌고 달려와 적을 협공해 물리친 뒤 석문(石門·현 산시 요양현 서북쪽)에 머물며 칠방관(七防關·현 강현 운대진) 일대를 지키는 역할을 맡았다. 송 이종 단평 3년(1236년) 봄, 몽골군은 다시 남침했다. 면주(지금의 섬서면현)를 단숨에 공략한 뒤 청야원(靑野原, 지금의 감숙 휘현 남)을 포위했다. 송군이 갇히자 병사를 구조하여 포위를 풀 것을 청하였다. 조우문은 청야가 촉의 목구멍이라 늦출 수 없다는 소집부의 말을 전해 들었다. 조만이 군대를 이끌고 가릉강을 통해 보급품을 전했고 여섯 주까지 오솔길을 질러 청야원으로 직행한다. 조우문은 정병을 이끌고 달려와 수비군과 함께 안팎으로 협공하여 몽골군을 물리쳤고, 공로를 인정받아 무덕대부(武德大夫), 좌효대장군(左曉大將軍)에 올랐다. === 피투성이가 된 선인 === 단평 원년(1234년) 이후 몽골군은 금우(현 대안진), 대안(현 당도향 강고대 일대)을 누볐는데, 조우문과 동생 조만이 결사 항전했다. 1235년 제1차 송(宋)전쟁이 일어나면서 서로군은 사천(四川)으로 직행했다.이 해 12월 몽골군은 면주(지금의 요양)를 함락시켜 대안(大安)을 압박했다. 조우문은 군사를 이끌고 선인관을 지키며 몽골 병사들이 서하, 여진, 회회, 토번, 발해군과 함께 내범하는 것을 탐지하고 조만에게 다짐했다. >나라의 안위가 이 한 방위에 있으니 중과부적이니 어찌 파도를 치겠느냐.오직 높은 험지에 올라 기이한 병사를 내거하여 적을 매복시키고 진지와 함께 멸망할 것을 맹세한다. 조우문이 파견한 군대는 계관협, 양평관으로 급행한다. 배치가 확정되자마자 수만 명의 몽골군이 양평관까지 돌진하자 출격을 명령했다. 또 친수 장병과 배토군이 돌출해 좌우로 달려가 적을 물리쳤다. 그는 몽골군의 공세를 예상하였고, 후에 몽군은 과연 보병만으로 좁은 입구를 맹공하였다. 그는 영을 듣고 곧장 앞으로 나아가나 적에게 좌우로 협공당해 10여 리나 패퇴하였다. === 순국 === 단평(端平) 3년(1236) 8월, 몽골군이 흥원부(興元府, 지금의 한중시)를 함락하고 대안(大安)을 노렸다. 남송 제치사 조안나는 조우문으로 대안을 제어하여 촉의 입구를 보호하였다. 조우문은 자만하고 있었다. >면양촉의 험준한 병사가 여기에 있으니 적이 뒤를 돌볼 염려가 있으니 반드시 면양을 넘어 촉에 들어올 수 없고, 또 조만과 왕선이 수미응응하여 대첩을 보장할 수 있다.대안(大安)은 지대가 넓고 평평하여 함락되지 않고 적 기병의 소장을 발휘하였는데, 우리 보병이 짧고 중과부적이니 어찌 평지에서 통제할 수 있겠는가. 조 씨는 대수롭지 않게 여겨 하루에도 일곱 번씩 다급하게 움직였다. 조우문은 적은 수로 많은 사람을 치는데, 밤을 틈타 기이한 병사가 안팎으로 나와 협공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조만, 조우양에게 명령하여 군사를 계관애에 올리고 여러 장의 깃발을 올려 아군의 굳은 의지를 적에게 보여주었다. 조우문은 정예부대 1만 명을 선발해 야간에 가릉 강을 건너 유구(流溝)로 은밀히 매복했다. 적이 오면 안에서 북을 치고 불을 지르는 것을 약속하고, 밖으로는 살성을 지르며, 양쪽으로는 몽골군을 협공한다.배치가 이미 정해졌는데, 9월 22일, 몽고병이 과연 범행을 감행하자, 조만이 진을 치고 나와 맞섰다.적장 팔도로가 만여 무리를 거느리고, 천 명을 거느리고, 왕래하며 싸웠고, 화살과 돌이 비 오듯 하였다. 조만은 만신창이가 되어, 마침내 여러 군대에 불을 지르도록 명령하였다. 9월 27일, 조우문은 모든 군대와 전면적으로 맞섰다는 소식을 듣고, 또 친히 정병 3,000명을 거느리고 질주하였다. 뜻밖에 하늘도 무심코 진군하는 길에 폭우가 쏟아졌다 .제장들은 비가 갠 뒤 싸우자고 요청했으나 조우문이 거절했다. >적들이 나의 복병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늦으면 반드시 좋은 기회를 놓친다. 조만은 용미두(龍尾頭)에 들어가고, 조우는 오고(五鼓)가 울리는 것을 듣고, 닭벼락을 뚫고 조우문과 합류하여, 내외 양군이 목숨을 걸고 싸우며 적군을 협공하여 20리 피 흘리고, 몽골인의 진채는 송군에 의해 수십 개 연파되었으며, 시신은 양평관[* 삼국지에 나오는 그 양평관 맞다.] 밖에 산더미처럼 쌓였다. 철갑 대신 솜털이 많은 서천의 군대는 갑옷이 비에 흠뻑 젖어 도보 전투에 불리했다. 28일 여명(麗明)에서 적장 왕세현이 몽고군을 거느리고 몰려와 철기로 송군을 포위하자 조우문은 끝까지 싸울 의지를 다진다. >이게 하늘이 정한 일이냐. 나라를 위해 전사할 뿐이다. 이에 자신이 타고 있던 전마를 죽여 순국 결심을 다졌다. 혈전이 더욱 격렬해지자 조우문은 동생 조만과 함께 전사하고 전군이 모두 전멸당했다. 조우문의 분전은 적장인 [[왕세현]][* 몽골 왕고부족 출신으로, 초기에는 금 소속이었다가 금 멸망 뒤 몽골에 투항했다. 사천 방면에서 여러 차례 남송과 교전한 몽골의 명장이자, 남송의 사천 방어 체계에 맞서고, 이후 사천 지역에서 제2차 [[몽송전쟁]] 때 송군을 격파하는 등 용맹을 떨치나, 1259년 [[조어성 전투]]에서 전사하는 [[왕덕신]]의 아버지.]의 칭찬을 받을 정도였다. 조우문 사후 촉에 야전이 가능한 군대가 없어 몽골군이 촉 지역으로 쉽게 들어올 수 있었고, 이후 성도(成都)·이주(利州)·동천(同川) 등 사천의 20여 주가 몽고군에 의해 함락됐다. 조정에서 용도각 학사·대중대부(大中大夫)를 추증하였으며, 시호를 '의절(毅節)'이라 하였다. == 사후 평가 == 상술했듯, 조우문의 군대가 모두 전멸당한 이후 적장 왕세현에게도 극찬받았다. >촉 장수여, 진정한 남아로구나. 원대 유인서(劉仁瑞)는 조우문을 칭찬하였다. >안탑은 향본일유(香本一儒)라 불리며 몇 번을 전구(前區)로 삼았다.원융은 세상에 적을 두고, 교수는 세상에 군사를 거느리지 못하더라. 화석협은 악전고투하며 분발하고, 물소령은 사경을 헤치고 살아간다. 영풍과 절개를 누가 감당할 수 있겠는가? 천재는 대장부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