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제12대 국회의원/전국구)] [include(틀:민주정의당 제12대 국회 전국구)] [include(틀:역대 건국대학교 총장)]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ffffff '''{{{+1 조일문}}}'''[br]'''趙一文'''}}}}}}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조일문.jpg|width=100%]]}}} || || '''이명''' ||조일민(趙逸民) || || '''본관''' ||[[한양 조씨]][* [[https://rokps.or.kr/profile/profile_view.asp?idx=222&page=1|#]]] || ||<|2> '''출생''' ||[[1917년]] [[12월 17일]] || ||[[함경남도]] [[영흥군]] 순녕면 흥남리 93번지[br](현 [[함경남도]] [[금야군]] 영풍리) || ||<|2> '''사망''' ||[[2016년]] [[10월 7일]] (향년 98세) || ||[[대전광역시]] || || '''학력''' ||[[난징대학|남경 국립중앙대학]] 법상학원 {{{-2 ([[정치학]] / [[학사]])}}} || ||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477호 || ||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교수]], [[정치인]]. 제8대 [[건국대학교]] 총장, 제12대 [[민주정의당]] [[국회의원]] 역임. [[한국광복군]]에서 활동한 공적을 인정받아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받았다. == 생애 == 1917년 12월 17일 [[함경남도]] [[영흥군]] 순녕면 흥남리 93번지(현 함경남도 [[금야군]] 영풍리)에서 태어났다. 일본 이름은 나카하라 스스무(中原進)이다. === 초기 및 광복군 복무 시절 === 일본인 교사의 추천으로 1940년 8월 난징국립중앙대학[* 이 당시 난징국립중앙대학은 진링대학 터에 자리잡은 일본괴뢰국 왕징웨이 정부의 중국국립대학이다.] 법학과 입학하게 된다. 난징국립중앙대학에서 [[송지영]](宋志英)·[[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254|이일범]](李一凡)·박철원(朴哲遠)·[[이정선(1921)|이정선]](李正善)[* 여정순(呂正淳)]·[[신영묵]](申榮默)·박익득(朴益得) 등과 접선이 되었고, 이들 남경중앙대학 한인유학생들과 한족 동맹(韓族同盟)이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하고 중국인 동창이자 기숙사 룸메이트인 [[쑤징허]](蘇景和) [* 쑤젠궈(蘇建國)] 적극적인 협조로 >① 애국 청년 규합 공작 >② 일본군 동태 탐사 >③ 초모 인원 후송 공작 등의 임무를 전개하고 있었으며, 특히 초모된 애국 청년들의 후송 임무는 왕하이칭(王海靑)·[[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9590|쑤징허]](蘇景和) 등, 중국인 동창이 책임을 지고 충칭(重慶)과 시안(西安) 및 제3 전구 지역을 내왕하고 있었는데, 이 무렵[[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9590|쑤징허]](蘇景和)은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481|신영묵]]·박익득을 안내하여 서안 광복군 제2 지대에 도착하여 난징(南京) 지구 지하 공작 상황을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4273|이범석]](李範奭) 지대장에게 보고하였으며, 이범석 지대장은 다시 임시정부 및 광복군 총사령부에 전보(轉報)함으로써 조일문·이일범 등은 난징(南京) 주재 공작 특파원에 임명되었다. (관련기사:[[https://www.youtube.com/watch?v=3mXFvnQyiRI]]) 1943년 6월, 충칭(重慶) 임시정부에서 밀파되어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1327|송지영]] 등과 접촉한 바 있는 [[http://www.grandculture.net/yongin/toc/GC00901167|김병호(金柄豪)]][* 1955년 10월, 특무대장 김창룡이 함정을 파놓은 이승만 대통령 암살음모자로 누명받아 명예복권이 안된 상태이다. 관련자료: https://youtu.be/CMkIzHBta_8?si=3EBZ-a5ymbkxpxQP]가 상하이(上海)의 일본 영사관 경찰에 체포됨으로써 조일문도 임시정부의 비밀 공작원이라는 사실이 탄로나고 말았다.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1327|송지영]]도 상하이에서 체포되었다.[* 김용의 회고에 따르면 송지영은 최상교의 밀고로 일본영사관 형사에게 검거되었다. 김용, 나의 길을 찾아, 도서출판 이화, 2012, p.90 ] 그리하여 당시 난징(南京)에 있던 일본 헌병대와 영사관 경찰에서는 이같은 사태를 중대시하고 난징중앙대학에 재학중이던 모든 한국인 학생의 숙소를 수색하고 이들의 신변을 압축하였다.[* 이때 체포된 인원은 김병호, 송지영, 김덕원, 이일범, 조일문, 이정선이다.] 만약 일제 헌병과 경찰의 행동 앞에서 결연한 행동의 선택이 없는 한, 모든 한국 학생은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1327|송지영]](宋志英)의 뒤를 이어 구속될 수 밖에 없었다. 이 때 한국 유학생들은 일제의 쇠사슬보다 죽음을 무릅쓴 탈출과 항일투쟁에의 길을 선택하였다.[*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6권, pp.853~857] 송지영, 이일범은 각각 17년형을 선고받고, , 조일문은 난징중앙대학 궈광완리(國光萬里)교수의 노력으로 남경특무기관(南京特務機關) 근무를 조건으로 석방됨 1944년초부터 일본군 특무부대 통역병으로 복무하게 된다.[* 한족동맹의 군자금을 지원하던 정윤관의 항일운동 공적서] 박철원(朴哲遠)으로부터 난징중앙대학사건 발생의 소식을 상세하게 전해들은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1099|유기석]]은 왕진 의사로 위장하고 난징(南京)에 잠입한다.[* 당시 상황에 대해 유기석은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오래지 않아 우리들은 난징(南京)방면으로부터 전해온 희소식을 들었다. 일부 적군 속에 일하는 조선 청년들이 기의를 준비하는데, 후방으로 가서 항일운동에 참가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433|이정선]]은 적의 공군에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254|이일범]]은 헌병대에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234|조일문]]은 특무기관에 있었다. 그들은 아직 후방으로 가는 길과 연락 지점이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잠시 기의를 일으킬 수 없었으며 후방에서 동지를 파견하여 기의작업을 지도하는 것을 책임지었으면 하고 희망했다. 이것은 나를 흥분하게 하는 소식이었다."(유기석, 삼십년방랑기-유기석회고록, 국가보훈처, p.331, 난징에서 유기석과 중앙대학 학생들과 접선 과장에 대한 내용은 p. 313~316)] 혁명 동지와의 연락 및 초모 공작을 위하여 자신이 위험을 무릅쓰고 난징(南京)으로 잠입,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254|이일범]]·[[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234|조일문]]·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361|유익배]](柳益培)·[[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259|김해일]](金海一) 등과 비밀히 접선하여 완난(晥南)[* 안후이성 남부를 의미하는 명칭이다.] 징시안(涇縣) 마오린쥔(茂林鎭)으로 탈출로를 알려주었다.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234|조일문]](越一文)은 탈출할 때 난징 주둔 일본군이 보관하고 있는 기밀문서를 대량 탈취 휴대하고 왔는데 이 기밀문서 중에는 >① 일본군 병력 배치 상황 >② 연합군의 기습 상륙 작전을 방어하기 위한 작전 계획 >③ 중국 연해안(沿海岸) 탐측량(探測量) 군용 지도 >④ 기타 기밀문서[* "나카하라 스스무(中原進)[* 조일문의 일본이름]는 적군 연락부에서 1주일 동안 몰래 탐지하다가 결국 한 무더기 중요한 기밀 자료를 훔쳤는데, 칭따오(靑島)에서 샤먼(廈門)연해에 이르는 정국 방어지도나 광호(光號)작전계획(미군의 상륙에 대처하는 작전계획), 현재의 적 정황도, 중국에 있는 조선인 반일분자 활동정황조사 등이 포함되어있었다.적에게는 이것은 심각한 타격이다. 왜냐면 그들의 전략부서, 방어계획 그리고 군사사업이 모두 누설되었기 때문이다. 적이 다년간 계획한 해상과 지면의 배치는 한 번에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만일 태평양 전쟁과 중국대륙에서 항일 전쟁이 무기한으로 연장되면 작전계획의 발각으로 말미암아 적의 세력은 더욱 피동적인 위치해 쳐해 있을 것이다."라고 회상한다. 유기석, 삼십년방랑기-유기석회고록, 국가보훈처, 2010, p.319] 등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러한 기밀문서는 곧 제 3 전구 사령장관 [[https://zh.wikipedia.org/zh-tw/%E9%A1%A7%E7%A5%9D%E5%90%8C|구주통]](顧祝同) 상장[* 중장에 해당한다.]에게 보내지고, 이어 중국 군사위원회에 전보(轉報)됨으로써 대일 작전 수행에 크게 이바지 했던 것이다. 중국측과의 교섭으로 대원들의 보급 문제 등이 해결됨에 따라 전지공작대의 공작 활동이 활기를 띠게 되었다.[* 한교전지공작대 정보주임 김해일(金海一) 증언 ] 이후 그는 한국광복군 제 2지대 제 3구대 제 3분대 강남분대(=[[한교전지공작대]])에 편입되어 특파원으로 전방 및 적 후방 공작활동을 했다. 그 뒤 중국군사위원회는 기밀 문서들을 접수받은 뒤 조일문에게 직접 와줄 것을 요청했고, 이때 제3전구 전지공작대를 한국광복군 제5지대로 편성하기 위한 임무를 전달받아 중경 광복군 총사령부로 가던 중 [[8.15 광복]]을 맞이하였다. === 해방 후 === 귀국 후 1946년 [[숙명여자대학교]] 조교수에 임용되었고, 1947년 [[조선민족청년단]] 선전부장을 역임하고 [[정인보]], [[조소앙]] 등과 중앙훈련소에서 청년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1948년 [[엄항섭]] 등과 [[김구]]의 남북협상을 수행하였으며, [[한국독립당]] 당원으로 활동하였다. 김구 암살 사건 이후 1952년 [[박용직]] 등과 함께 원외 자유당 상무집행위원에 선출되었고, 1955년 [[건국대학교/학부|건국대학교 법정대학]] [[정치학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4.19 혁명 후 [[계훈제]] 등과 대한교원노동조합을 결성해 위원장에 선임되었으나 정부의 승인을 받지 못하였다. [[5.16 군사정변]] 후에는 저술 및 후학 양성에 매진하며 건국대학교 학생처장, 기획조정실장, [[건국대학교 대학원|행정대학원]]장 등을 역임하였고 1980년 제8대 건국대학교 총장이 되었다. 건국대학교 총장 재직 시 1981년 대학육상경기연맹 회장에 추대되었고, 한국평생교육연맹 초대 부회장을 역임하였다. 1983년 정년퇴임과 동시에 총장직을 퇴임하였고,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퇴임 직후 [[천관우]]에 이어 민족통일중앙협의회 의장에 선출 되었다. 1984년 한중문화협회 회장, 영남학원 이사장을 역임하였고,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민주정의당]] 전국구 국회의원에 선출되었다. 국회의원 임기 중 [[6.29 선언]] 및 [[제13대 대통령 선거]] 이후 민정당에서 발족한 민주화합추진위원회[* 민주정의당은 창당 이후 혁신, 재야 인사 영입에 관심이 많았다. 우당 [[이회영]]의 손자인 [[이종찬(1936)|이종찬]] 의원의 주도하에 야당 정치인이던 [[이재형(정치인)|이재형]], [[의열단]] 출신 독립운동가인 [[유석현]]을 모셔왔고, 조일문의 동지이자 [[조선일보]] 주필이던 [[송지영]], [[윤보선|윤]][[천관우|천]][[지학순|지]][[강원용|강]]이 친여 색채를 띈 것도 이와 연관되어있다. 노태우 정부 역시 민주화합추진위원회를 통해 혁신, 재야인사를 영입하고자 하였고, 독립운동가이자 혁신 인사인 이강훈, [[이동화]], [[신민당(1967년)|신민당]] 고문이자 다선 의원인 [[김원만]] 전 의원 등을 영입하였다.] 추진위원장을 맡았다. 1988년 [[영남대학교]] 부정입학 사건에 책임지고 11월 영남학원 이사장직을 사퇴하였다. 1989년 [[김신]] 전 [[공군참모총장]]에 이어 제2대 [[독립기념관]] 이사장이 되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독립운동가 출신 국가원로로서 상해임시정부청사 복원사업, 중국인으로 광복군에 협조한 [[쑤징허]]의 건국훈장 애족장 서훈에 힘을 썼다. 이후 독립기념관 이사, 건국대학교 이사 등을 역임하였고, 2016년 10월 7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그의 유해는 2016년 10월 11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에 안장되었다. == 주요저서 및 번역 == * 갑신일록[* 김옥균의 갑신정변 회고록 번역] * 새정당론 * 한국민족운동사 연구논총 * 한국독립운동문류 * 별이 지면 동트리라 * 춘풍추우 * 상허 유석창 전기[* 건국대학교 설립자 [[유석창]]박사 전기] * 흑판에서 돌아본 인생 * 서안사변과 [[장학량]] * 마지막 황제 [[푸이]]의 비사 == 여담 == * 건국대학교 교수 시절 강의한 '정당론'은 다른 대학 청강생들 까지 들을 정도로 명강의로 통했다. 정당정치 관련 권위자로 1971년 집필한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71111400239105008&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71-11-14&officeId=00023&pageNo=5&printNo=15569&publishType=00010|새정당론]]은 출간 당시 국내 최초로 정당관련 이론 및 자료를 체계적으로 집대성한 책으로 알려졌다. * [[https://kusf.konkuk.ac.kr/jsp/Intro/intro_04_04.jsp|건국대학교 교가]]를 작사하였다. * 총장 재임 시 주 2회 특별강의를 하였다. 정년 퇴임 전인 1982년 12월 4일 '독립운동의 핵심체로서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제목으로 한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82120600329202007&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2-12-06&officeId=00032&pageNo=2&printNo=11443&publishType=00020|정년퇴임 고별강의]]를 하였다. 고별강의에는 [[윤치영]] 전 국회부의장, 의열단 출신인 유석현 민정당 고문, 서울 시내 각 대학 정치학 교수 및 건국대 학생, 교직원 등 700 여 명이 참석하였다. * [[노태우]] 정부 초기 동사무소에서 독립유공자 추석 선물을 받아가라는 통보를 받았는데 기존 보훈처를 통해 선물을 전달받던 관행과 달리 담당 공무원의 고압적인 태도 및 도장을 들고 와 선물을 받아가라는 통보에 청와대 비서실을 통해 항의하였고, 이에 구청장, 보훈처 담당관, 동장이 엎드려 빌었다고 한다. * 은퇴 후 저술활동에 매진하는 한편 수 백 점의 수석 작품을 전시하여 그 수익금을 광복군 동지들에게 나눠 주는 등 베푸는 삶을 실천하였다. * 문장력이 수려하고 필력이 뛰어나 많은 저술을 남겼다. 정치학 관련 도서 외에 중국저서 번역, 독립운동 회고록 등을 다수 서술하였다. * 말년에는 알츠하이머로 고생하였고, 장남인 조철오 카이스트 명예교수가 있는 대전으로 내려가 대전 시립 제1 요양병원에 수 년간 요양하였다고 한다. == 선거 이력 == || 연도 || 선거종류 || 소속정당 || 득표수(득표율) || 당선여부 || 비고 || || 1985 || [[제12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 '''[[민주정의당]]''' || '''-''' || '''당선 (14번)''' || || == 참고자료 == * 독립운동사 제6권 *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Merit&mngNo=8234|독립유공자 공훈록]] * [[http://news.unn.net/news/articleView.html?idxno=164409|부음기사]]. 한국대학신문. 2016년 10월 8일자.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한국광복군/군인]][[분류:대한민국의 사회과학 교수]][[분류:대한민국의 남성 정치인]][[분류:제12대 국회의원]][[분류:민주정의당 국회의원]][[분류:금야군 출신 인물]][[분류:한양 조씨]][[분류:1917년 출생]][[분류:2016년 사망]][[분류:건국대학교 재직]][[분류:숙명여자대학교 재직]][[분류:건국훈장 애국장]][[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