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송사)]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2e8b57 0%, #2e8b57 0%, #2e8b57 80%, #2e8b57)" '''{{{#ece5b6 남송의 대신[br]{{{+1 朱勝非 | 주승비}}}}}}'''}}} || || '''{{{#ece5b6 시호}}}''' ||충정(忠靖)|| || '''{{{#ece5b6 성}}}''' ||주(朱)|| || '''{{{#ece5b6 이름}}}''' ||승비(勝非)|| || '''{{{#ece5b6 재상임기}}}''' ||4년|| || '''{{{#ece5b6 자}}}''' ||장일(藏一)|| || '''{{{#ece5b6 생몰연대}}}''' ||1082년 ~ 1144년 || || '''{{{#ece5b6 출신}}}''' ||[[북송]] 채주(蔡州) || [목차] [clearfix] == 개요 == [[남송]] 초기의 재상. 자는 장일(藏一), 시호는 충정(忠定). == 생애 == === [[정강의 변]] 이전까지 === [[북송]] 채주(蔡州)에서 1082년에 태어난 주승비는 1103년에 진사로 급제하였다. 1126년 동도(東道) 부총관(副總管)이 되어 응천부(應天府) 지부(知府)를 대행하였다. 당시 [[북송]]의 정세는 1125년 [[요나라]]가 멸망한 이후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고, 금나라가 북송을 침공하자 주승비는 금나라의 공격을 피해 달아났다가, [[한세충]]의 부장인 양진(楊進)이 적을 물리친 덕분에 다시 응천부로 돌아와서 직무를 수행하였다. [[정강의 변]] 이전까지만 해도 주승비의 행보는 평범한 편이었다. === [[정강의 변]] 시기 === >남경(南京)은 [[태조(송)|예조]](藝祖)[* 예조는 송나라의 초대 황제인 [[태조(송)|태조]]를 달리 부르는 칭호이다.]께서 힘을 다하여 나라를 다스리셨던 땅이니, 그곳으로 가서 대계를 도모하시길 청합니다. >---- >{{{#!wiki style="text-align: right" '''『[[송사]](宋史)』'''}}} [[정강의 변]] 이후 주승비의 행보에는 변화가 찾아왔다. 1127년, 북송의 수도인 개봉이 함락되고 [[휘종(송)|휘종]]과 [[흠종]]이 금나라에 포로로 잡히자, 주승비는 제주(濟州)에 있는 휘종의 서자인 강왕 조구에게 남경으로 가서 대계를 도모하기를 주청하였다. 한때 [[철종(송)|철종]]의 황후이기도 했던 [[소자성헌황후 맹씨|맹 황후]]도 강왕 조구에게 송나라의 제위에 오르라는 편지를 보냈기 때문에, 강왕 조구는 강남에서 황제에 올라 간신히 [[남송|송나라의 명맥을 이었다]]. 이가 바로 송나라의 제10대 황제인 [[고종(송)|고종]]이다. === 남송의 재상 === 건염 원년 주승비는 중서사인으로 임명되고 직학사를 대리하였다. 주승비는 고종에게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렸다. >인의란 천하를 좌우하는 큰 권력으로, 중국이 이것을 가지면 오랑캐들이 복종하고 제후가 우러러보며, 단지 권력을 잃어버리면 사이(四夷)가 여러 차례 침입하는 근심을 끊지 못합니다. 우리나라가 [[거란]]과 결연을 맺고 백여 년이 지나, 일단 거란의 어지러움에 타서 멀리 [[금나라]]와 교유하여 요나라를 협공할 계획을 세웠으니, 이것은 중국이 그 권력을 잃은 것이고, 밖으로는 모멸을 불러온 것입니다. 폐하께서 즉위하셨으니, 마땅히 처음의 도리를 올바르게 밝히고, 그것이 인의에 맞는지 생각하고 행하시며, 맞지 않는 것은 버리신다면, 사이를 물리치고 대업을 계승하여 회복하실 수 있습니다. >---- >{{{#!wiki style="text-align: right" '''『[[송사]](宋史)』'''}}} 또한 총제사(總制使) 전개(錢蓋)가 승진하자, 주승비는 전개가 전개가 섬서(陝西) 제치사(制置使)로 있을 때 군대를 버리고 나라를 그르쳤으니 임명 조서를 전개에게 돌려보내야 한다고 주청하였고, 결국 전개는 면직되었다. 1128년 주승비는 상서우승(尚書右丞)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재상의 자제들이 음서로 관직에 진출하는 권한이 남발되자 주승비는 이를 문제삼기도 하였다. === 묘부와 유정언의 쿠데타 === 1129년, 금나라가 다시 남송을 침공하여 고종이 남쪽으로 대피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주승비는 고종의 명으로 진강부에 남아있었고 공액사(控扼使)로 임명되었다가 다시 선봉대부(宣奉大夫), 상서우복야(尚書右僕射) 겸 어영사(御營使)로 임명되었다. 당시 왕연(王淵)이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 겸 어영사도통제(御營司都統制)로 있었고, 환관들이 다시 제멋대로 권력을 부리자, 이를 불만스럽게 생각한 묘부(苗傅)와 유정언(劉正彥)이 자신의 무리인 왕균보(王鈞甫), 마유길(馬柔吉), 왕세수(王世修)와 모의하여, 왕연이 환관들과 연결하여 모반했다고 무고하였다. 유정언은 왕연을 참수하고 환관들을 살해하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주승비는 쿠데타 소식을 듣고 묘부와 유정언에게 쿠데타에 대해 타일렀다. 묘부와 유정언은 고종에게 퇴위를 압박하였고, 태후인 [[소자성헌황후]]에게 유일한 아들인 [[조부(남송)|조부]]를 안고 수렴청정을 하라고 압박하였다. 묘부와 유정언이 불손하게 나오자, 결국 고종은 어쩔 수 없이 조부에게 양위를 하였고 예성궁으로 물러나 거처하였다. 하지만 주승비는 묘부와 유정언이 학식이 부족함을 그들의 부하인 왕균보로부터 알아냈고 이를 역이용하여, 묘부와 유정언을 안심시키는 척하면서 몰래 쿠데타 일파를 평정할 계략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결국 주승비의 계략이 성공하여 묘부와 유정언의 쿠데타는 순식간에 평정되고 고종은 복위한다. 쿠데타가 평정된 뒤 주승비는 관문전(觀文殿) 대학사, 지홍주, 강서안무대사(江西安撫大使) 겸 지강주(知江州)를 역임하였다. === 말년의 행적 === 1131년 강주(江州)가 함락당하자, 시어사 심여구(沈與求)는 주승비의 수비가 너무 느슨했다고 비판하였고, 이로 인해 주승비는 중대부(中大夫)로 좌천되었다. 1132년, 여이호(呂頤浩)는 주승비가 시독(侍讀)을 겸임하도록 추천하였고, 또한 도독강회형절제군사(都督江淮荊浙諸軍事)로 천거하였다. 급사중(給事中) 호안국(胡安國)과 시어사 강제(江躋)가 반발하기도 하였지만 여이호의 강력한 추천으로 주승비는 다시 남송 조정에 복귀하였다. 주승비는 조정에서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를 역임하였다. 뒤에 장맛비가 극심해지자 주승비는 여러 차례 자신의 면직을 청하였고 자신이 파면되어야 하는 이유 11가지를 들어 파면을 청하기도 하여, 고종이 주승비의 면직을 받아들였다. 1135년 주승비는 지호주(知浩州)로 기용되었지만 병을 핑계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뒤에 [[진회]]가 재상이 되자 진회를 싫어했던 주승비는 병을 핑계로 관직에서 물러나 은거하였고, 1144년에 사망하였다. 사후의 시호는 충정(忠靖). == 기타 == 주승비는 [[장방창]]과 동서 사이였지만, 장방창이 참위한 뒤에는 장방창이 보낸 사자를 유폐시키기도 하였다. [[분류:송나라/인물]][[분류:1082년 출생]][[분류:1144년 사망]][[분류:주마뎬시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