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일본군의 전쟁범죄)]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POWs_Burma_Thai_RR.jpg]] 강제노동을 당한 [[오스트레일리아]], [[네덜란드]] 포로들.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에 비견될만 하다. [목차] == 개요 == || [[태국어]] || ทางรถไฟสายมรณะ || || [[일본어]] || 死の鉄道 || || [[영어]] || Death Railway || 건설기간 : 1942년 9월 16일 ~1943년 10월 17일[* 원래는 1943년 12월로 준공일을 예상했으나 2개월 더 빨리 완공되었다] "죽음의 철도"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며, [[제2차 세계대전]] 도중 [[일본 제국]]이 군대와 무기의 수송을 위해 건설한 길이 415km의 철도이다. 당시 [[태국]]의 [[방콕]]과 [[버마국]]의 [[양곤]]을 연결하고 있었으며, 일본 측에서 부르던 명칭은 태면련접철도('''[ruby(泰緬連接鉄道, ruby=たいめんれんせつてつどう)], 태국-미얀마 연접철도선''')이다. 일본어 위키백과 제목은 泰緬鉄道로 되어 있다. 연합군 전쟁 포로와 끌려온 민간인들의 피와 땀으로 건설했다는 게 과장이 아닐 정도로 많은 사상자를 냈다. 최대 약 25만명 정도로 추정되는 규모의 연합군 포로들은 건설 내내 강제 노동에 시달렸으며, 철도 건설 과정에서 발생한 사망자는 약 '''10만 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이를 증명하듯 당시 공사 현장에서는 “枕木1本、死者1人(받침목 하나에 사망자 한 명)”이라는 말도 있었다고 한다. 착공시점인 1942년 9월 당시에는 버마방면군(緬甸方面軍)이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일본 육군 [[남방군]] 지휘하에 공사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공사중인 1943년 3월경 버마방면군이 창설되었는데, 당시 버마방면군 초대사령관은 [[가와베 마사카즈]]로서, [[가와베 마사카즈]]는 이후 죽음의 철도 완공시까지 공사를 지휘하였다. 운행 구간은 [[태국]]의 농 플라 둑(Nong Pla Duk)역에서 [[버마국]]의 탄비류자얏(Thanbyuzayat)역까지였다. == 역사 ==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이 철도는 태국과 미얀마 사이에 위치한 험한 산지를 정면으로 돌파하기 때문에 난공사 구간이 많았다. 일단은 일본의 설계 상으로는 이 철도는 궤간 1000mm의 미터 궤간에, 최소 곡선 반경이 200m 이며, 최대 구배는 20퍼밀로 상정하고, 기관차는 일본제 [[C56형 증기 기관차]][* 이 중 31호차는 개통식에서 사용되었다는 이유만으로 태국에서 퇴역한 이후 일본 [[야스쿠니 신사]]에 [[후안무치|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를 사용하였다. 하지만 당시 [[일본 제국]]의 열악한 사정 때문에 설계에 따라 건설되기는커녕 최소한의 열차가 달릴 수 있을 정도로만 다급히 공사했기 때문에 최급구배 20퍼밀, 최소 곡선 반경 200m로 설계했던 철도가 막상 공사를 완료하고 보니 최급구배는 설계상의 2배인 40퍼밀을 찍지 않나, 최소 곡선반경 또한 설계상에서 더 줄어든 160m 로 부설되었다. 이렇게 굉장히 험한 곳을 지나는 철도였던 데다가 일본군 감독관들의 학대 때문에 그야말로 지옥도가 펼쳐졌는데, 전쟁 포로 6만여 명, [[태국]]·[[인도네시아]]·[[미얀마]]·[[말레이시아]] 같은 아시아에서 끌려온 노동자 20만 명이 동원되었으며 이 중 11만 6천여 명이 질병·부상·영양실조·과로 등으로 사망했다.[* 그래서 전임 사령관인 카와베도 이걸 염두에 두고 있었고 그것 때문에 공사 계획을 중간에 취소했다.] 특히 가장 공사 난이도가 높았던 탐파이(Tampii)역과 힌 톡(Hin Tok)역 사이에 있던 암석질 언덕을 절개하여 선로를 낸 구간은 철도 부설 노역자들이 잠을 자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밤에도 모닥불을 피웠던 것에 유래하여 '''[[https://en.m.wikipedia.org/wiki/Hellfire_Pass#|지옥불 구간(Hellfire Pass)]]'''이라는 명칭이 붙을 정도였다. 얼마나 악명이 높았으면 A급 전범으로 사형에 처해진 7명 중 1명인 버마 방면군 사령관 [[기무라 헤이타로]]는 학살에 직접적으로 연루되었다는 증거가 없음에도[* 사실상 한국 한정으로 유포되던 버마 민간인 100만 명 학살설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극동국제군사재판]] 당시에 죽음의 철도에 가까이 있으면서 강제노동 과정에서의 포로 학대에 대해 몰랐을 리가 없다는 책임만으로 ''''버마의 도살자''''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였다[* 실제로 영미법계의 국가에서는 무거운 보호책임이 있는 사람이 고의 또는 부주의로 타인을 죽게 한 경우 모살·고살로 판결된다.][* 참고로 기무라는 죽음의 철도 완공 '''후'''에 버마에 부임해서 죽음의 철도와는 관련이 없으며, 이 때문에 이 혐의는 해당 지역 총사령관으로써 책임을 묻게 하는 상징적인 의미에 가까운 기소에 가까웠다고 한다. 다만 기무라는 이 외에도 많은 죄를 저질렀는데,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의 개전에 '''모두''' 관여했으며, 버마에서는 겉으로만 포로 학대를 자제하라고 명령했으면서 실제로는 포로 학대를 묵인했고, 덤으로 [[도미나가 교지]]도 가볍게 능가하는 [[탈영]] 기록을 세우고는 뻔뻔하게 육군 [[대장]]으로까지 승진했다.]. [[태평양 전쟁]]이 끝난 뒤에는 개보수 없이는 노선을 이용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애초에 설계한 대로 공사되지 않았던 부실한 철도가 연합군의 폭격까지 맞았으니 더더욱 개판이 된 것.[* 종전 직후에는 폭격에 의해 전복되고 파손된 열차의 잔해들이 연선 곳곳에 널부러져 있었다고 한다.] 더군다나 전쟁이 끝나자 원래의 목적을 상실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구간은 그대로 [[폐선]]되었다. 태국측 철도 중 [[방콕]]에 가까운 구간은 전쟁 이후 1957년에 복구되어 로컬 노선으로 활용 중이다. 현재 운행 중인 구간은 130km로 농 플라 둑(หนองปลาดุก)에서 남톡사이요크노이(น้ำตกไทรโยคน้อย)역까지의 구간이다. 원래는 남톡(น้ำตก)까지만 철도가 들어왔는데 인근에 있는 사이 요크 노이(Sai Yok Noi) 폭포가 관광지로 유명해지자 2003년에 기존 노반을 그대로 활용하여 추가로 연장한 것이다. 현재 [[태국국유철도]]에서 하루 4회, 왕복 2회 열차가 운행중이다. == 복구 논의 == 1987년에 버마 철도의 폐선 구간을 복구하고 [[증기 기관차]]를 달리게 관광 노선으로 부활하게 하려는 계획이 있던 적이 있다. 이 계획은 태국 정부가 [[일본]]에게 돈을 받아 복구하려고 했기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 때 포로로 버마 철도의 건설에 연행된 [[호주]] 재향 군인회와 네덜란드의 옛 포로들은 '''"버마 철도의 복구는 [[아우슈비츠]]를 유원지로 만드는 것과 같다!"''' 며 엄청나게 화냈다. 그 이후 [[21세기]]에 접어든 현재까지 딱히 그렇다 할 움직임은 없다, 그나마 추진이 있는 곳은 2003년 완공된 남톡사이요크노이(น้ำตกไทรโยคน้อย)역까지의 연장 구간 뿐. 폐지 이후 미얀마와 태국을 잇는 철도는 연결되어 있지 않지만 [[2010년대]] 들어 [[중국]]의 일대일로 영향으로 태국 북부 [[치앙마이]]와 [[핏사눌록]] 중간쯤의 지점과 미얀마 [[양곤]]과 [[네피도]] 중간쯤의 지점을 연결하는 [[고속철도]]가 추진되고 있다. 기존 버마 철도가 방콕에서 직빵으로 산을 넘어 양곤으로 넘어갔던 것과 달리 훨씬 북쪽을 통하여 연결되는 셈. 2차 대전 당시 죽음의 위험한 산길 철도가 안전한 터널 고속철도로 계승되는 셈이다. == 미디어에서의 묘사 == 영화 [[콰이 강의 다리]]에서 그 모습이 나왔다. 하지만 실제에 비해 너무나 미화하고 일본군을 정상적으로 묘사했다. 원래 이 영화의 콘셉트 자체가 어떤 의미로는 꼭 닮은 영국군과 일본군의 멘탈 대결이었다. 또한 영화에서 나온 일본군 수용소장의 모델인 부소장 [[사이토 리사부로]] 중령은 실제로도 일본군치고는 적군 포로를 정상적으로 대해줬다.[* 영국 런던에 있는 미대에 입학하고 전과하여 공대를 졸업한 사람으로 등장한다. 따라서 일본군치고는 말이 통하는 것.] 영화 《[[레일웨이 맨]]》(2013)에서도 다뤘다. 이 영화는 1995년 출간된 동명의 [[http://book.interpark.com/product/BookDisplay.do?_method=detail&sc.shopNo=0000400000&sc.prdNo=217251217|책]]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는데, 책에는 "침목 1개당 포로 목숨 1개"라는 말이 반복해서 나오며 당시 그 끔찍한 상황이 잘 묘사되어 있다. 저자는 영화 [[콰이 강의 다리]] 보고 엉터리라고 말했는데 이유는 "저렇게 살찐 포로가 어디있어?"라고... [[탑기어]] 버마 스페셜에서 이 철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당시 3MC들은 미얀마에 있는 영연방 장병들의 추모묘소를 들렀고, 중고트럭 3대를 구입해 강에다 대나무로 다리를 만드는 미션을 수행했다. 3MC가 이동할 때 너무 힘들었다고 말하자 담당PD가 "당신들이 고물트럭을 타고 이동할 때 죽음의 철도를 만들었던 영연방 병사들은 걸어서 이동하고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끔찍하게 혹사당했으니 닥치세요." 답했고 일순간 숙연한 분위기가 되었다. [각주] [[분류:1942년/사건사고]][[분류:1943년/사건사고]][[분류:1943년 건설]][[분류:일본의 전쟁 범죄]][[분류:태평양 전쟁/전쟁범죄]][[분류:태국의 철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