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고려사)] [목차] 智祿延 (1069? ~ 1126) == 개요 == 고려 중기의 관료. == 생애 == 지녹연의 조상은 [[제2차 여요전쟁]]때 [[현종(고려)|현종]]을 끝까지 호종한 1등 공신 [[지채문]]으로, 조상 덕에 지녹연은 [[음서]]로 종8품의 내알자(內謁者) 관직에 나갔다. 제15대 [[숙종(고려)|숙종]]때 동북면 병마판관을 역임했고 숙종 9년([[1104년]])에는 [[여진족]]을 정벌한 공로로 전중시어사로 승진했다. 제16대 [[예종(고려)|예종]] 시기에도 동북면에 자주 파견되었다. 예종 즉위년([[1105년]])에는 내시지후로서 주부동정 은원충, 사천소감 허신경, 최자호 등과 함께 동계의 산천을 둘러봤으며, 이듬해인 [[1106년]]에는 분도에 임명되어 장주(長州, [[평안북도]] [[정주군]])로 파견되었다. 이후 시어사에 임명되었다가 예종 2년([[1107년]]) 안무사가 되어 경상도와 진주도에 보내졌으며, 양계로 돌아가 예종 9년([[1114년]])과 13년([[1118년]])에는 동북면 병마사를, 15년([[1120년]])에는 서북면 병마사를 역임했다. === 한안인 당여와의 관계 === >然取友不端拓俊京等謀毀李汝霖智祿延等毀斥朴景升永亦與焉. 《[[고려사]]》에서는 <이영 열전>에, 《[[고려사절요]]》에서는 제18대 [[인종(고려)|인종]] 1년([[1123년]]) 1월 기사에 실린 문장인데, 끊어 읽는 방식에 따라 지녹연의 행적에 차이가 있다. * A: 然取友不端, 拓俊京等謀毀李汝霖, 智祿延等毀斥朴景升, 永亦與焉. 그러나 (이영은) 친구 사귀는 것이 바르지 않았는데, [[척준경]] 등이 이여림을 비방하려는 모의나, '''지녹연''' 등이 박경승을 헐뜯는 것에 이영이 또한 함께 했다. * B: 然取友不端, 拓俊京等, 謀毁李汝霖·智祿延等, 毁斥朴景升, 永皆與焉. 그러나 (이영은) 친구 사귀는 것이 바르지 않았는데, [[척준경]] 등이 이여림과 '''지녹연''' 등을 비방하려는 모의나, 박경승을 헐뜯는 것에 이영이 또한 함께 했다. [[한안인]]은 예종의 총애를 받으며 이자겸과 권력을 놓고 다투던 권신이었다. 그 당여인 이영은 한안인의 매부였고, 이여림은 한안인으로부터 배척을 받아 기용되지 못하다가 역모에 엮여 예종 7년([[1112년]])에 유배되었다. A에 따르면 지녹연은 이영과 함께 박경승을 헐뜯었고, B에 따르면 이여림과 지녹연, 박경승은 함께 이영으로부터 비난을 받는다. 한안인의 세력은 [[인종(고려)|인종]] 즉위년([[1122년]]) 12월 [[이자겸]]에게 숙청되었는데, 지녹연은 유배되지 않았고 인종 시기에도 관직이 바뀌었다. 박경승이 어떤 인물인지는 알려진 바 없지만, A든 B든 이영과 한마음으로 박경승을 비난한 척준경이 훗날 한안인과 반대되는 이자겸과 함께 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A처럼 해석해도 지녹연이 한안인의 당여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B의 경우를 생각하면 훗날 지녹연이 척준경 등을 제거하려고 한 이유를 이때의 원한에서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 반이자겸 쿠데타 미수 === 인종 3년([[1125년]]) 12월의 정기 인사에서 지녹연은 동지추밀원사에 임명되었다. 이때 관직이 바뀐 사람들을 보면, [[평장사]]에 임명된 척준경, [[참지정사]]에 임명된 [[박승중]], [[이자덕]], [[김인규]], 지문하성사에 임명된 [[허재(고려)|허재]], 지추밀원사에 임명된 [[이지미]] 등 재추의 태반이 이자겸의 당여로 채워졌다. 인종을 가까이서 모시는 지후 김찬, 녹사 안보린 등 두 명의 내시는 동지추밀원사 지녹연에게 접근했다. 지녹연 등 세 사람은 인종에게 이자겸을 제거할 뜻을 밝혔고, 인종은 평장사들의 반대하는 말을 듣지 않으면서 지녹연 등의 정변 모의를 승인했다. 쿠데타에는 병력이 필요했으니, 지녹연은 병부상서 [[척준신]]에게 불만을 품은 장군들에게 접근했다. 상장군 [[최탁]]과 [[오탁]], 대장군 권수, 장군 고석 등은 인맥 때문에 벼락출세해 자신들의 상관이 된 척준신을 질투하고 있었으므로 지녹연의 계획에 함께할 것을 약속했다. 인종 4년([[1126년]]) 2월 25일 초야(初夜, 7~9시경)에 이르자 지녹연과 장군들은 병사들을 이끌고 궁궐에 난입했다. 궁에 있었던 척준신 등이 먼저 죽임을 당했는데 그만 일부 인원을 놓쳐 궁중 내에서의 변고가 이자겸과 척준경에게 전달되고 말았다. 이자겸은 당황해 발을 구르고 있었지만 실전 경험이 풍부했던 맹장 척준경은 급하게 수십 인을 데리고 궁성 남문으로 뛰어갔다. 척준경 등이 성벽을 넘어 문을 열고 들어가 신봉문 밖에서 소리를 질렀는데, 이에 놀란 지녹연과 장군들은 이자겸과 척준경이 벌써 대규모의 병력을 이끌고 왔다고 착각했으며 두려움에 문 밖으로 나와보지도 못했다. 백관을 자택에 소집한 이자겸이 정변에 가담한 장군들이 누군지 파악하고 그 처자와 노비들을 인질로 잡은 후, 그들의 집을 불태우니 지녹연 등의 사기는 땅에 떨어져버렸다. 2월 26일 새벽에 척준경과 [[의장(고려)|의장]] 휘하의 친이자겸파 병력까지 모여들어 전황이 불리해지자 지녹연 등은 궁궐 안으로 숨어들었다. 당시 궁궐 안에 들어가 동생과 아들이 비참하게 죽은 참상을 목격하고, 격노한 척준경은 이자겸에게 궁궐을 불태울 것을 통보하고는 소부감과 장작감에 모아둔 장작더미를 동화문에 쌓아 불을 질러버렸다. 하루 뒤인 2월 27일 새벽에는 인종이 남궁으로 빠져나와야 할 정도로 불길이 거세졌고, 궁궐의 건물 깊이 숨어있었던 지녹연과 장군들도 더이상 버틸 수 없게 되었다. 척준경의 명령을 받은 낭장 장성이 돌입해 정변에 가담한 장군과 관료들을 전부 죽였고, 지녹연은 산채로 결박되어 순천관에서 이자겸의 아들인 이지보에게 매질을 당했다. 지녹연은 반죽음 상태에서 충주로 유배되었고, 이자겸의 당여인 윤한이 지녹연을 압송했다. 지녹연은 충주에 도착하자 거동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이르러게 되었다. 이에 윤한은 지녹연의 팔다리를 자르고 그를 길가에 파묻은 뒤 개경으로 돌아갔다. 한편 지녹연의 처자식들은 적몰되어 외관 주(州), 군(郡)의 노비가 되었다. 훗날 이자겸이 패망한 뒤 지녹연의 아들과 사위의 관직이 한 등급 높아졌다. == 평가 == >지녹연은 사람됨이 거칠고 제멋대로였으며, 배움과 품행이 없었는데 스스로 계책이 있다고 했으며, 이자겸과 척준경을 제거하려다가 도리어 화를 입었다.[* 祿延爲人荒恣, 無學術行檢, 自謂有智計, 欲除李·拓, 謀拙, 反陷於禍.] >---- >《고려사》 권97, <지녹연 열전>. >사람됨이 거칠고 제멋대로이며 배움은 없었지만 스스로 지혜가 있다고 했는데, 옹졸한 모의를 하다가 도리어 화를 입었다.[* 爲人荒恣無學術, 自謂有智, 而謀拙, 反陷於禍.] >---- >《고려사절요》 권9, 인종 4년 2월 계해일. == 성격 == 평가 문단에서도 볼 수 있듯이 자기 마음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음을 알 수 있다. == 가족관계 == 지녹연의 아들이었던 지지용은 부친의 원수인 이자겸이 패망한 뒤 노비의 지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심(고려)|이심]]과 변란을 일으키려다가 덜미가 잡혀 제18대 [[의종(고려)|의종]] 2년([[1148년]])에 옥사했다. [[분류:고려의 인물]][[분류:살해된 인물]][[분류:대한민국의 객사한 인물]][[분류:1069년 출생]][[분류:1126년 사망]][[분류:봉산 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