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진(희성) 군주)] |||||| '''{{{#ece5b6 진(晉)나라 11대 국군[br]{{{+1 문후}}}[br]文侯}}}''' || |||| '''[[성씨|{{{#ece5b6 성}}}]]''' || 희(姬) || |||| '''[[본관|{{{#ece5b6 씨}}}]]''' || 진(晉) || |||| '''[[휘|{{{#ece5b6 휘}}}]]''' || 구(仇) || |||| '''{{{#ece5b6 아버지}}}''' || [[진목후]](晉穆侯) 비왕(費王) || || '''{{{#ece5b6 생몰 기간}}}''' || 음력 || 기원전 805년 ~ 기원전 746년 || || '''{{{#ece5b6 재위 기간}}}''' || 음력 || 기원전 780년 ~ 기원전 746년 || [목차] [clearfix] == 개요 == 중국 [[춘추시대]] [[진(희성)|진(晉)나라]]의 11대 국군. 진문후는 [[정나라]]의 [[정환공]]과 함께 서주(西周)가 견융족에게 망한 뒤 동주(東周)로 중흥하는 데 공로를 세운 진나라 군주다. == 생애 == 진문후는 원래 [[진목후]]의 태자다. 그런데 진 목후가 죽자마자 목후의 동생인 가보가 구를 쫓아내고 찬탈하니 그가 진 상숙이다. 그러나 구는 쫓겨난 동안 힘을 길러서 진상숙 4년(기원전 780년), 상숙을 기습해 죽이고 진후(晉侯) 자리에 오르니 그가 바로 진문후이다. 세월이 흘러 진문후 10년(기원전 770년), [[유왕]]이 죽고 [[평왕]]이 즉위했다. 진문후가 병사를 이끌고 구원에 나서 [[정무공]], [[진양공(영성)|진양공]](秦襄公)과 함께 평왕의 동천을 돕는 공로를 세웠다. 그런데, 이 틈을 타서 다른 왕족인 희여신(姬余臣)이 왕을 자칭하니 그가 [[휴왕]]이다. 그리하여 주나라는 이분되었다. 진문후 21년([[기원전]] 761년), 청화간(清華簡)[* [[칭화대학]]에서 소장하고 있는 죽간이라는 뜻으로, 도굴로 나온 것을 칭화대학 동문이 구매 후 기증했다.]의 기록에 의하면 휴왕은 이 해에 진문후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같은 사건을 《[[죽서기년]]》에서는 진문후가 휴왕을 죽였다고만 나온다. 그리고 주 왕실은 다시 하나가 되었다. 이것을 역사에서는 '''문후근왕'''(文侯勤王), 즉 '진문후가 왕을 도와 공을 세운 사건'이라고 말한다. 같은 해에 진문후는 낙양 동천을 도왔을 뿐만이 아니라 평왕의 지위를 공고하게 한 공로를 세웠다. 진문후가 이런 큰 공을 세웠기 때문에 평왕은 진문후에게 거창[* 왕실의 제사에 쓰는 술.]과 규찬[* 왕실의 제사에 쓰는 옥으로 만든 술잔류.]을 내렸는데, 거기에 '진후지명'(晉侯之命)이라는 문구를 새겼다.[* 참고로 이것들이 [[구석]]을 이루는 것들이 맞다.] 그후 진문후는 분수 유역으로 세력을 떨쳐 진나라의 영토를 넓혔다. 물론 이것은 평왕에게 승인을 받고서 한 일이었다. 진문후 25년(기원전 757년) 문후는 [[한나라(동음이의어)|한(韓)나라]]를 쳐서 멸망시켰다.[* 전국시대의 [[한(전국시대)|한(韓)나라]]와는 다르다. 이때 멸망한 한나라는 무왕의 아들이 봉해진 나라고 전국시대의 한나라는 곡옥환숙의 아들이자 곡옥장백의 동생인 한만이 앞서 언급된 한 땅에 봉해져서 한을 씨로 사용하게 되고 후대에 제후로 자립하여 세워진 나라이다.] 진문후 35년(기원전 746년), 문후가 사망하자 아들 백이 뒤를 이으니 그가 [[진소후]]이다. == 사후 == 진문후가 죽은 뒤 진나라는 2개로 갈라지게 되었다. 아들인 [[진소후]]가 숙부인 성사[* 참고로 진 목후가 진문후의 이름을 구(仇)라 짓고, 곡옥 환숙인 성사의 이름에 성(成)이 들어갔으니 진 문후의 후손이 곡옥 환숙의 후손에게 먹힐 것이라는 말이 있었고,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진다.]를 곡옥의 백작에 봉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나라는 이때부터 수십년 동안 펼쳐질 내전에 돌입하는 바람에 천하의 대세에 간여할 수 없었다. 이 사건을 일컬어 '''[[곡옥대진]]'''(曲沃代晉)이라 한다. 진 소후는 그 신하인 반보에게 살해되었고, 그 다음 군주인 진 효후도 곡옥 환숙의 아들인 [[곡옥장백]]에게 살해되었다. 효후의 동생인 진 악후는 곡옥으로 쳐들어가 그곳의 곡식을 불살라 없앴는데, 진 악후 때 만큼은 곡옥에게 밀리지 않았으나, 6년만에 죽어버렸고, 곡옥 장백은 그 틈을 타서 진나라의 수도 익을 쳤으나 서괵 공의 공격을 받아 물러나게 되었다. [* 이것은 《사기》의 기록이고 《춘추좌씨전》에 나오는 내용을 요약하면 곡옥 장백은 주나라의 지원을 받아 진나라을 쳐서 악후를 몰아냈고, 장백이 주나라를 배반하자 주나라는 곡옥을 치면서 [[진애후]]를 즉위시킨다. 한편 쫓겨난 진후는 이미 애후가 주나라의 승인을 받고 제후가 되었기에 수도로 돌아가지 못하고 악 땅에 거주했으며 거기서 죽어서 진 악후가 되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 일로 곡옥은 큰 타격을 입었는데, 곡옥 장백이 죽고 [[진무공|곡옥무공]]이 그 뒤를 이어 즉위하여,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진애후]]에게 화평을 요청했고, 진 애후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이후 곡옥 무공은 진 애후를 사로잡았고, 익에서 [[소자후]]를 즉위시키자 무공은 기원전 708년, 소자후를 평화협정을 하자는 구실로 불러 죽여버렸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진후 민]]이 즉위했다. 기원전 679년, 곡옥 무공은 익을 쳐서 진후 민을 몰아냈다. 일설에 진후 민은 무공에게 죽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진나라는 곡옥에게 병탄되었고, 곡옥 무공은 주 희왕에게 뇌물을 바쳐 진후로 인정받으니 그가 [[진무공]]이다. == 평가 == 진문후의 등장은 초기 진나라에 걸출한 군주가 등장했다고 평가할 수 있는데, 그 까닭은 군주 자리를 빼앗은 숙부인 상숙을 죽인 뒤 그 자리를 되찾아 나라를 안정시키고[* 구체적인 기록이 없어서 추측의 영역임을 밝힌다.] 국력을 키워 견융족으로부터 평왕을 보호하며, 그 뿐만 아니라 가짜 왕인 [[휴왕]]을 제거해 동주 왕실의 권위가 더 실추되지 않도록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韓)나라를 포함한 분수 유역의 소국을 합병하는 등 세력을 키워 훗날 [[진문공|문공]]이 패업을 이룰 기반을 마련했다. [각주] [[분류:진(晉)나라의 군주]][[분류:기원전 805년 출생]][[분류:기원전 746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