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신라 국왕)]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3A2646, #4a2d5b 20%, #4a2d5b 80%, #3A2646)" {{{#FBE673 '''진성여왕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신라의 왕녀/태종 무열왕 ~ 경순왕)] ---- [include(틀:후삼국시대 군주)] ---- [include(틀:역대 신라 상왕)] ---- }}}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3A2646 0%, #4A2D5B 20%, #4A2D5B 80%, #3A2646); color: #fbe673" '''신라 제51대 국왕[br]{{{+1 진성왕 | 眞聖王}}}'''}}} || ||<-2>{{{#!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양산 진성여왕릉.jpg|width=100%]]}}} || ||<-2> {{{#fbe673 {{{-2 양산 진성여왕릉 전경.}}} }}} || ||<|2> '''출생[br]{{{-3 (음력)}}}''' ||[[865년]] ~ [[868년]] || ||[[신라/후삼국시대|신라]] [[서라벌|금성]][br](現 [[경상북도]] [[경주시]]) || ||<|2> '''퇴위[br]{{{-3 (음력)}}}''' ||[[897년]] [[6월 1일]][* 《[[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grpId=&itemId=BT&gubun=book&depth=5&cate1=Z&cate2=&dataGubun=최종정보&dataId=ITKC_BT_0002A_0040_030_0040|고운집]]》과 《[[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grpId=&itemId=BT&gubun=book&depth=5&cate1=Z&cate2=&dataGubun=최종정보&dataId=ITKC_BT_1365A_0360_010_0220|동문선]]》 기록.] || ||[[신라/후삼국시대|신라]] [[서라벌|금성]][br](現 [[경상북도]] [[경주시]]) || ||<|2> '''사망''' ||[[897년]] [[12월 31일]][* 음력 [[12월 4일]]] (향년 29~32세) || ||[[신라/후삼국시대|신라]] [[서라벌|금성]] [[북궁]][br](現 [[경상북도]] [[경주시]]) || || '''능묘''' ||황산(黃山)[* '황산'이란 지명은 대체로 지금의 [[경상남도]] [[양산시]]를 가리키고 있고, 실제로 양산시에 [[https://www.yangsan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79648|진성여왕릉]]으로 추정되는 능이 있는데 [[문화재청]]이 인정한 곳은 아니다.] || ||<|4> '''재위기간[br]{{{-3 (음력)}}}''' ||'''{{{#fbe673 제51대 국왕}}}'''|| ||[[887년]] [[7월]] ~ [[897년]] [[6월 1일]] {{{-2 (9년 11개월)}}} || ||'''{{{#fbe673 신라 태상왕}}}'''|| ||[[897년]] [[6월 1일]] ~ [[897년]] [[12월 4일]] {{{-2 (5개월)}}}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경주 김씨]] || || '''휘''' ||만(曼)[*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성왕- 기록.] / 탄(坦)[* [[최치원]] 문집에 실린 <사사위표> 기록.] / 만헌(曼憲)[* 《[[삼국유사]]》 <왕력> 기록.][* 참고로 원문은 '金氏名曼憲 即定康王之同母妹也'(성은 김이고 이름은 만헌이니, 즉 [[정강왕]]의 동복 여동생이다)인데, 이를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헌강왕]]~진성여왕 세 남매의 어머니가 바뀌는 골때리는 상황이 연출된다. 우선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진성여왕의 다른 이름이 '만헌'이고, 정강왕의 동모제라 해서 헌강왕을 [[경문왕]]의 첫째 부인 [[영화부인]] 소생으로, 정강왕과 진성여왕을 둘째 부인 [[차비 김씨]] 소생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 한편, 위의 한자 원문은 '헌'(憲)과 '즉'(即)의 위치가 뒤바뀐 오류라고 보아(즉 이 견해에 따라 시정하면 '金氏名曼 即憲定康王之同母妹也' : 성은 김이고 이름은 만이니, 즉 헌·정강왕의 동복 여동생이다) 헌강왕~진성여왕 남매를 모두 영화부인(혹은 차비 김씨) 소생으로 볼 수도 있다.] || || '''부모''' ||부왕 [[경문왕]][br]모후 [[문의왕후]] || || '''형제자매''' ||[[헌강왕|김정]], [[정강왕|김황]] || || '''국서''' ||[[김위홍]][* 1차 사료인 《[[삼국유사]]》 <왕력>에 진성여왕의 배우자가 '위홍'이라고 명시되어 있으며, 이에 대한 여러 역사학자들의 해석이 있다.] || || '''자녀''' ||김양정[* 《[[삼국유사]]》, 《[[고려사]]》에서만 등장. 《삼국유사》에서는 글자가 비슷한 '양패'로 나온다.] || || '''종교''' ||[[불교]] || || '''신장''' ||약 160cm 이상[* 신라인의 평균키가 [[http://www.whabaeg.com/news/articleView.html?idxno=3420|160cm]]였는데, 정강왕이 여동생 진성여왕에 대해 "골격이 흡사 건장한 사내와 같다"라고 말한 것을 보면 진성여왕의 키는 160cm 이상으로 추정된다.] || || '''시호''' ||'''진성대왕(眞聖大王)'''[* [[http://db.history.go.kr/id/gskh_005_0010_0290_0030|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탑비]] 기록] || ||<|3> '''별호''' ||[[마립간|매금지존]](寐錦之尊)[*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에서 발췌. 모든 신라 국왕을 칭하는 것일 수도 있음.] || ||찰니나제(刹尼那帝) || ||북궁공주(北宮公主)[* <봉위헌강대왕결화엄경사원문>(奉爲獻康大王結華嚴經社願文) 기록.] || || '''골품''' ||[[진골]](真骨) ||}}}}}}}}} || [목차] [clearfix] == 개요 == >근년 이래 백성이 곤궁하고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나니, 이는 내가 부덕한 탓이다. 어진 이에게 왕위를 넘겨주기로 나의 뜻은 결정되었다. >近年以來, 百姓困窮, 盗賊蜂起, 此孤之不徳也. 避賢讓位, 吾意決矣. >---- >《[[삼국사기]]》에서 진성여왕이 조카 [[김요]]에게 양위를 선언한 말.[[https://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sg&levelId=sg_011r_0070_0240&types=r|#]] [[신라]]의 제51대 [[국왕]].[* [[통일신라]] 최후의 임금이기도 하다. 다음 왕인 [[효공왕]]부터는 [[신라/후삼국시대|후삼국 분열 후 신라]]의 [[군주]]이다.] 신라와 [[한국사]]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여왕]]으로 [[진덕여왕]]이 승하한 [[654년]] 이후에 233년 만에 등장한 여왕이다. 한국사의 여왕들 중 유일하게 [[남매]] 계승을 했다. == 생애 == === 즉위 배경 === 제48대 [[경문왕]]과 [[영화부인]] 사이의 2남 1녀 중 셋째이자 [[고명딸]]로, 제49대 [[헌강왕]]과 제50대 [[정강왕]]의 여동생이었으며, 두 오빠에게는 서자인 [[효공왕]](제52대)을 제외하고는 아들이 없었다. 정강왕 김황은 왕위에 오르고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병이 들었는데, 승하하기 전에 "누이동생 만이 총명하며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의 전례도 있으니 잘할 것이다."라며 후계자로 지명했으나 '총명하다=좋은 군주'는 아니었다. 외모에 대해서는 오빠 정강왕이 남긴 [[https://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pre_page=1&setId=-1&totalCount=0&prevPage=0&prevLimit=&itemId=sg&types=r&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sg_011r_0060_0060&position=-1|유조]]에 따르면 "골격이 흡사 건장한 사내와 같다"라고 적혀 있다. 어지간한 남자들 못지않게 체격이 컸던 듯하다. 이와 같이 [[신라]]의 왕통은 [[왕자]]에게만 이어지는 것이 아니고 [[공주]]에게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왕자가 없는 경우에 공주나 왕서(王壻, 군주의 [[사위]])가 계승하는 것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제2대 [[남해 차차웅]] 승하 직후 아들 [[유리 이사금|유리]]와 사위 [[탈해 이사금|석탈해]]가 왕위 계승을 두고 다투고 있는 것에서부터 신라의 왕위 계승을 보면 이러한 사실이 추측된다. 따라서 진성여왕은 정강왕 사후 왕위 계승 1순위로 즉위했기에 그 당시 기준으로는 충분히 가능한 즉위였지만, 후대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관점에서는 여자가 왕이 된다는 것이 매우 이례적인 상황이었고, 마침 나라가 무너져가는 시기가 진성여왕과 맞물렸기에 [[망국]]의 원인 중 하나를 진성여왕에게서 찾게 되었다. 다만 더 앞 시대의 [[헌안왕]](제47대)이 친딸이 둘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위 [[김응렴]]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비록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의 전례가 있지만 본받을 만하지 않다."라고 선포한 기록을 보아, 9세기 신라 사회에서도 [[여왕]]에 대한 찬반 논란은 존재했다고 봐야 한다. 논란을 떠나서 여왕 자체가 아예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 [[조선]]과는 차원이 다르긴 하지만, 신라 사회 역시 남녀가 완전히 계승권이 대등한 상황은 아니었다. 뭣보다도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의 왕위 계승은 '여자가 오를지언정 성골이 아니면 안 된다'라는 뿌리 깊은 신라 [[골품제]]가 우선 순위가 더 높았던 예시로 보는 게 더 옳을 것이며, 성골이 완전히 씨가 마른 진덕여왕 사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진골이 왕위를 이어받을 수 있게 된 셈이다. 게다가 두 여왕은 [[삼국시대]] 신라였고, 이때는 [[통일신라]]인데, 여왕이 존재하지 않았던 [[고구려]]와 [[백제]] 계통 지방인들이 더욱 여왕을 부정적으로 보았을 가능성 역시 제기되고 있다. 진성여왕 시호의 '진'([[眞]])자 역시 옛날 두 여왕의 전례를 따른다는 진성여왕의 컨셉과 관련이 있는데, 이 글자는 통일 이전 [[중고]]기 왕실의 [[진흥왕]], [[진지왕]], [[진평왕]], [[진덕여왕]] 때의 [[불교]]적 시호에 집중적으로 쓰였고[* 그리고 '성'([[聖]]) 자 역시 종교적 색채가 강하다.] 이후로는 한 번도 쓰인 적이 없다가 진성여왕에 갑자기 들어갔다. 이는 여왕의 즉위라는 특수 상황을 설명하고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종교적 권위 및 과거 두 여왕이 존재했고 나라가 강해지던 중고기 전성기 시절의 향수를 이용하려 했다는 것이다. 부왕 [[경문왕]]과 [[문의왕후]]가 860년에 혼인한 것으로 미루어 봤을 때 865년~868년 사이에 출생한 것으로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803713|추측]]해볼 수 있는데, 19세~22세 정도의 젊은 나이에 즉위했다는 의미이다. === 재위 전반기의 국정 운영 === 《[[삼국유사]]》에는 "진성여왕이 즉위한 지 몇 년 만에 진성여왕의 [[유모]] 부호부인과 [[부호부인]]의 남편 [[김위홍|위홍]] 등이 실권을 잡고, 정치가 어지러워졌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김위홍이라는 사람의 [[신분]]은 경문왕의 동생이자 진성여왕의 숙부이므로 신라의 [[왕족]]이다. 그런데 진성여왕은 유모 부호부인의 남편 겸 자신의 숙부가 되는 위홍과 [[불륜]] 관계에 빠졌다고 전해진다. 《[[삼국사기]]》에는 "[[임금]]이 평소 [[각간]] 위홍과 [[간통]]했는데 그가 죽자 '혜성대왕'(惠成大王)으로 봉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위홍 사후 임금이 은밀히 [[미소년]]과 미장부 2~3명을 [[경주 월성|궁]]에 끌어들이니 음탕하고 문란하게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심지어는 그들에게 정치를 맡겼다는 기록도 있을 정도.[* 《[[삼국유사]]》 <왕력>의 다른 기록에 따르면 위홍 대각간(大角干, 한편 <진성여왕조> -거타지-에서는 잡간(匝干)으로 나온다)은 왕의 남편으로 사후 '혜성대왕'(惠成大王)으로 [[추봉]]되었다고 한다.][* 이 기록에 대해서는 여러 학자들의 추측이 난무하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위홍은 아내 부호부인이 [[사망]]한 후에 조카 진성여왕과 재혼한 것으로 보았다.[[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A%B9%80%EC%9C%84%ED%99%8D&ridx=0&tot=1|출처]] [[이배용]] 교수는 위홍이 진성여왕 즉위 이전까지는 여왕과 정식 혼인관계가 아니었다가 여왕이 즉위한 후 정식 남편이 되었다고 보았다. 전기웅 교수는 위홍이 진성여왕 즉위 후부터 그녀와 공공연한 관계를 드러냈으나 정식 혼인은 아니라고 보았으며, 김창겸 교수는 위홍이 본래 진성여왕의 사통하는 정부였다가 여왕 즉위 뒤에 남편이 되었다고 보았다. 한편 권영오 교수는 진성여왕 근처 시기를 다룬 《삼국유사》 <왕력>의 기록들이 전반적으로 부정확하다는 이유로 김위홍이 여왕의 남편이라는 기록의 신뢰도 역시 낮다고 보았다. 다만 권 교수는 《삼국사기》의 김위홍과 여왕이 '통'(通)했다고 한 기록을 서로 [[섹스|검열삭제]]하는 관계였다고 해석하는 것 또한 부정했다. 이러한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모아놓은 글로는 [[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1810073&cid=49243&categoryId=49243|문화원형백과 위홍 문서]]가 참고된다.] 그러나 왕이 [[후궁]]을 거느리는 것이 당대에도 후대에도 일반적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소년과 미장부 두 셋을 끌어들였다는 사실만으로 마냥 [[암군]]이라고 칭하기는 어려운 편이다. 진짜 문제는 그들이 권력을 잡게 하여 왕경 [[서라벌]]의 정치를 어지럽게 한 것이다. 진성여왕 3년(서기 889년) 국내의 여러 주•군이 공물을 바치지 않아 재정이 궁핍했다는 기록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즉위 직후 주(州)·군(郡)에 1년간 조세를 면제하고, [[황룡사]]에 백좌강경(百座講經)[* 인왕백고좌회, 약칭 '백고좌회'를 의미한다. 《인왕반야경》을 읽으면서 국가의 번영과 안정을 기원하는 대표적인 호국불교 행사다. 주로 [[신라]] 시대에 행해졌으며, 마지막 기록은 [[고려]] [[원종(고려)|원종]]이 [[강화도]]에서 행한 것이다.]을 한 것 외에는 민심 수습을 위한 노력은 찾아볼 수 없다. <[[효녀 지은]] 설화>가 진성여왕 시대의 일인데, 당시 가난을 이기지 못해 구걸하고 다니거나 부잣집의 종으로 전락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신라구]]의 전성기이기도 한데, [[현춘]]이라는 인물은 895년 배 100여 척, 병력 2,500여 명을 이끌고 일본 [[규슈]] 지역을 약탈하다 사로잡히기도 했다.[* 현춘은 자신을 보낸 이가 신라 왕이라 주장했는데, 이때의 왕이 진성여왕이다. 현춘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면 진성여왕이 [[대마도]]를 약탈해오라 지시했단 말이 된다. 물론 어떤 지방 호족이 진성여왕의 명령이라 사칭해서 현춘을 대마도로 가게 했을 가능성이나 현춘 스스로가 블러핑을 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 일각에선 재정난에 시달리던 신라 조정이 반독립적인 신라구 세력을 사주해서 대마도의 물자로 재정난에서 벗어나려 한 게 아닌가라는 추측하기도 한다. 그러나 889년 [[원종·애노의 난]]과 더불어 [[적고적]]이 창궐하고, 896년 적고적이 서라벌 근처까지 쳐들어 와서 본진이 불타려는 판국에 작은 섬의 약탈 물자로 뭔가를 시도했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 그 외의 업적으로는 888년 군주가 각간 [[위홍]]에게 명해 [[대구화상]]과 함께 [[향가]]를 수집하여 책으로 엮게 하니, 그 책 이름을 《[[삼대목]]》이라 하였다는 것이 있는데, 이 책은 안타깝게도 남아 있지 않다. 연회장에서 불리는 향가의 가사가 조금씩 달라 국가 공인 '[[노래방]] 가사집'을 만들려 한 것 아닐까 하는 추측도 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12/11/2009121101173.html|#]] 다만 아버지 경문왕이 [[화랑]] 출신이고, [[향가]]는 화랑도나 [[승려]]가 주로 지었다거나, <[[찬기파랑가]]>나 <[[모죽지랑가]]>처럼 여러 화랑들을 칭송하는 향가들이 존재하는 점을 감안하면 《삼대목》 편찬도 단순히 문화적 동기가 아니라 '''경문왕가 신성화 작업=왕권 강화책의 일환'''이라는 해석도 있다. 즉 훗날 조선에서 《[[용비어천가]]》를 지은 것과 같은 목적으로, 단순한 노래 수집 여흥이 아니라 흔들리는 하대 왕권을 다잡아보기 위한 정치적 행동이었다고 볼 수 있는 셈이다. 그 단서로 숙부 김위홍과 함께 승려 [[대구화상]]에게 향가를 수집하도록 했는데, 대구화상은 《[[삼국유사]]》에서 [[요원]]랑, [[계원]]랑, [[숙종]]랑 등 화랑들에게 경문왕을 칭송하는 노래를 만들게 한 기록이 있다. 물론 《삼대목》에는 적어도 대구화상이 관여한 이 노래들은 분명히 들어갔을 것이다. 참고로 학습 만화 《신라 왕조 1000년》에선 진성여왕이 [[제4의 벽|"내 유일한 업적인 《삼대목》이 전하지 않다니."]]라고 외치며 대성통곡하는 장면이 있다. 실제로 진성여왕의 재위 중 그녀가 제대로 뭘 했다는 기록이 설화를 제외하면 이거 하나뿐이니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른다. === 난세의 개막 === ||<-7> '''한국의 군주''' || ||<-4> [[통일신라]] ||<-3> [[후삼국시대|후삼국시대]] || ||<|3><#dcdcdc,#1F2023> 50대 [[정강왕]] 김황(신라) ||<|3> {{{+1 ←}}} ||<|3><#ffffff,#1F2023> '''51대 진성여왕 김만'''(신라) ||<|3> {{{+1 →}}} ||<#dcdcdc,#1F2023> 52대 [[효공왕]] 김요(신라) || || [[태봉]] 1대 [[궁예]] || || [[후백제]] 1대 [[견훤]] || 진성여왕이 즉위한 시점에서 이미 [[신라]]는 [[혜공왕]](제36대) 때를 [[시발점]]으로 해서 국력도 쇠락하고 민심도 흉흉해 서서히 무너지던 망국이었다. 888년에 누군가가 정치를 비방하는 방을 써 몰래 길거리에 붙이는 사건이 일어났다. >제51대 진성여왕은 임금이 된 지 몇 해 만에, 유모 부호부인과 그의 남편 위홍 잡간 등 서너 명의 총신들이 권력을 마음대로 하여 정사를 어지럽히니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나라 사람들이 이를 근심하여 다라니(陀羅尼) 은어를 지어 길 위에 던져두었다. >---- >《[[삼국유사]]》 제2<기이> -진성여대왕- 이미 진성여왕 재위 하반기에는 왕실 측근을 비방하는 다라니 유포 사건에서 볼 수 있듯 왕경 서라벌 사람들(國人)의 여론도 진성여왕과 [[경문왕]]계를 거세게 비판할 정도로 민심이 악화돼 있었다. 신라 지방에서 불만이 폭발하는데 중앙에서도 당연히 문제 의식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나무망국 찰니나제 판니판니소판니 우우삼아간 부이사바아 >南無亡國 刹尼那帝 判尼判尼蘇判尼 于于三阿干 鳧伊娑婆訶 >---- >《[[삼국유사]]》 <진성여왕조> -거타지- 《삼국유사》에 의하면 저기서 '나무망국'은 신라가 망한다는 뜻이었으며, '찰니나제'는 여왕,[* [[산스크리트어]] 단어 [[크샤트리아]]의 음역어인 '찰제리'(刹帝利)를 비튼 말로 보인다.] '판니판니소판니'는 [[소판]](잡간) [[위홍]], '우우삼아간'은 여왕의 총신 3명[* 진성여왕 치세에 아찬 관등을 달고 있는 사람은 병부시랑 김처회, 혜성군(현 [[당진시]]) 태수 김준, 그리고 진성여왕의 막내아들로 전하는 김양정이 있다.], '부이'는 여왕의 [[유모]] [[부호부인]]을 뜻했다. 이에 [[왕거인]](王巨仁)이라는 사람을 범인으로 붙잡았지만 그날 저녁 구름과 안개가 덮이고, 번개가 치며 우박이 떨어져 여왕이 두려워 그를 풀어주는 사건이 있었다. 우박이 떨어졌다는 이야기는 왕거인이 __뒤에 정치적인 [[인맥]]__이 컸거나, 아니면 __진범이라는 증거를 잡지 못했다__거나, __서라벌 내 국인(國人), 즉 사람들의 여론이 왕거인을 풀어주라는 쪽으로 항의하는 데 모였다__는 뜻이라는 해석이 있다. <[[태조 왕건]]>에서는 6화에서 [[도선대사]]가 조정의 주최로 열린 백고좌에서 법문을 구실로 신라 조정을 비판하며 천둥과 번개가 일어났을 때 갇혀 있던 왕거인이 홀연히 빠져나가는 [[판타지]]스러운 각색을 넣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왕거인은 감옥에서 시를 지었다고 한다. >연단[* 형가를 보내 [[시황제|진시황]]을 암살하려 했던 [[연(춘추전국시대)|연나라]] 왕자.]의 피눈물에 무지개가 해를 뚫었고 >추연[* [[연나라]] 소왕의 스승이며 소왕의 아들인 혜왕이 즉위하자 모함을 받고 감옥에 갇혔는데, 그 때가 여름이었지만 감옥에 서리가 내렸다는 전설이 있다.]이 품은 슬픔은 여름에도 비를 내리네 >지금 나의 불우함 그들과 같으니 >황천은 어이하여 아무 상서로움도 없는가 >---- >《삼국유사》 <진성여왕조> -거타지- 889년 결국 사벌주(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시]])에서 [[원종·애노의 난]]이 일어났다. 진성여왕은 영기(令奇)에게 군사를 주고 토벌을 명령했는데, 영기는 막상 가 보니 [[반란군]]의 규모가 커서 겁을 먹고 진군하지 못했고, 정작 중앙군이 제 역할을 못할 때 지역 촌주 우연(祐連)이 싸우다가 전사했다. 이에 진성여왕은 영기의 목을 베고 우연의 아들을 촌주로 삼았다. 이후 원종과 애노의 난이 진압되었는지는 확실히 기록에 남아있지 않아 알 수 없지만, 나중에 [[아자개]]가 이곳을 근거지로 삼아 거병하는 걸 봐선 언젠가 다른 반란군에 흡수되거나 자멸한 듯하다. 아무튼 원종과 애노의 난은 더 이상 신라 정부가 지방을 통제할 능력이 없는 것을 인증하는 사건이었고, 곧이어 전국에서 반란군이 일어나 난세가 시작되었다. 5년(서기 891년) 10월 북원(北原)의 군벌 [[양길]]이 [[궁예]]에게 100여 명의 [[기병]]을 맡겨 북원(北原) 동부락과 명주(溟州) 관내를 습격하는 사건이 터졌고, 6년(서기 892년) [[견훤]]이 무진주(武珍州, 지금의 [[광주광역시]])를 점령하고 왕을 자칭하니[* 900년에 완산주([[전라북도]] [[전주시]])를 점령하기 전까지는 공식적으로 [[후백제]]를 자칭하지는 않았다.] 무주 동남의 군현이 항복하여 그에게 소속되어 버렸다. 이후 8년(서기 894년) 10월에 궁예가 600명의 병력으로 북원에서 하슬라(지금의 [[강원도]] [[강릉시]])를 침범해오니, 그 무리가 3,500여 명에 달하고, 궁예는 스스로 장군이라 칭했다는 기록과 9년(서기 895년) 8월 궁예가 저족(猪足), 성천의 두 군을 취하고 [[철원군|철원(鐵圓)]] 등 10여 군현을 쳐서 공취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아직 궁예와 견훤이 [[후고구려]]와 [[후백제]]를 공식적으로 선포하지는 않았지만 [[후삼국시대]]의 기틀은 진성여왕 시대에 거의 다 잡힌 것이다. 893년 [[견당사]] 김처회는 [[당나라]]에 가던 도중 서해 바다에 빠져 죽었고, 894년 [[최치원]]을 당나라에 보내려다가 도적이 많아 길이 막혀 가지 못했다고 하는데, 이 또한 [[해적]]이 많아 [[황해]]를 건너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897년 최치원은 결국 다시 시도해 당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다. 890년대는 아직 후삼국 정립 이전 과도기이기 때문에 신라의 통제력이 닿는 지역이 전국에 여럿 있었고, 상황이 유동적이었다.] === 재위 후반기의 행보 === 894년 2월에 [[최치원]]이 <시무(時務) 10조>를 올리자 여왕이 기꺼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최치원을 [[아찬]]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시무 10조>의 내용은 기록에 직접 남아있지 않지만 당시의 정치를 개혁하자는 내용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의 시대 상황과 최치원의 사상을 감안하면 <시무 10조>의 내용은 [[진골]] 중심의 [[골품제]] 타파, 전제왕권 강화, [[호족(한국사)|호족]] 억제책, 인사 행정과 조세 제도 개혁 등이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이기백(1924)|이기백]], <골품체제하의 유교적 정치이념>, 《신라시대의 국가불교와 유교》, 한국연구원, 1978, p. 164~166] 이 제의는 받아들여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진골 귀족의 반대로 시행되지 않았다고 보는 경우가 많다. <시무 10조>의 조항 중 일부는 시행됐는지 어떤지는 확실치 않지만[* 가령 [[후삼국시대]] 각 호족들이 실제로 자칭했던 [[성주]], [[장군]] 등의 호칭은 각 호족들이 자칭했다는 설과, 신라 정부가 부여했다는 설이 있다. 후자의 경우 [[통일신라]] 정부는 본래 전국 [[9주 5소경]] 450군현에 지방관을 파견해 직접통치의 비중이 높았으나, 9세기 후반에 이르러 더 이상 지방을 직접 통치하기 어렵다 판단한 신라 중앙 정부가 [[당나라]]의 지주군주사를 모방한 지주제군사(知州諸軍事) 제도를 시행해, 지방 세력가에게 경제적, 군사적 독립성을 일부 인정하고, 대신 왕실에 대한 충성을 약속받았다는 것이다. 최치원 본인은 [[고병]]의 종사관으로 머물며 당나라 말의 지주군주사 제도를 충분히 접할 수 있었고, 당나라가 [[절도사]]의 난립을 100여 년 동안 겪으면서도 어찌저찌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에, 균형만 맞는다면 왕조의 수명을 늘릴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다. 그러나 후삼국시대가 너무 빨리 [[궁예]]와 [[견훤]]이란 두 큰 세력으로 정리되면서 9세기 당나라의 상황과는 다르게 흘러간 것이 문제였다. 다만 [[견훤]]처럼 자칭일 가능성이 높은 케이스가 보이기 때문에 자칭과 신라 조정의 인정 둘 다 존재했을 가능성도 있다.][* 한편 [[부산대학교]] 전기웅 교수는 [[소판]] 왕지본, [[잡찬]] [[소충자]] 등 성씨로 보아 진골이 아닌 지방 세력가가 진골의 관등을 가진 것도 자칭이 아니라 진성여왕 대에 이르러서 지주제군사에게 진골의 위계를 정식으로 수여한 것이라고 보았다. 이미 늦었지만 후삼국시대에 이르러서는 뒤늦게나마 골품제의 벽을 일부 개방했다는 것이다.] 일단 그의 다른 저작에서 나타나는 최치원의 성향상 분명히 들어갔다고 볼 수 있는 [[6두품]] 중심의 [[유교]]적 개혁과 관련한 내용은 결국 관철되지 못했다. 이는 1,000년의 세월간 고착화된 신라의 정치 체제로서는 실현이 거의 불가능했다. 물론 이 개혁이 실패로 돌아감으로써 [[신라]]는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걸었지만, 이미 [[양길]]과 [[견훤]]이 독립한 상황이니 개혁을 제대로 시도했더라도 성과를 기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진성여왕은 당대 민중에게 종교적 영향력을 가진 [[선종(불교)|선종]] 고승들을 수도 서라벌로 불러들이기 위해 노력했는데, 현대와 달리 [[후삼국시대]]에는 [[불교]]의 영향력이 컸고 [[궁예]]나 훗날의 [[왕건]], [[견훤]]이나 [[김해]]의 [[소충자]] 등 여러 호족들도 앞다퉈 이름 높은 선승을 자기 지역으로 초빙하려고 노력하는 상황이었다. 아무튼 진성여왕의 이런 시도는 전국 각지의 고승비에 그 기록이 남아있다. 무염선사가 [[열반]]에 들자 그를 위도 [[부도]]뿐만 아니라 당시 최고의 문장가 [[최치원]]에게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제작을 맡겼으며, 월광사 원랑선사의 비를 세우는 데도 도움을 주었다. 이런 노력으로 일부 고승들은 후삼국시대 신라 조정에 협력했으나 그 외 여러 고승들은 중앙보다는 지방 세력에 더 눈을 돌렸다. 봉림산문의 심희 선사처럼 진성여왕의 소환령을 거절하는 경우도 있었다. 896년에는 [[적고적]]이라는 붉은 바지로 의상을 통일한 도적단이 나라 서남쪽에서 나타나 [[서라벌]] 바로 옆 모량리까지 노략질하기도 했다. 나라가 망해가니 적고적 같은 도적 떼가 창궐하고 호족의 반란과 자연의 이상 현상이 잦았다는 듯하다. 제법 똑똑했다고도 하는데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재위 9년(서기 895년) 10월에 큰오빠 [[헌강왕]]의 [[서자]]인 요(嶢)(뒷날의 [[효공왕]])를 [[태자]]로 봉했다. === 자진 퇴위와 최후 === '''11년(서기 897년) 6월에 결국 지방 도적들의 반란이 자신이 부덕한 탓이라고 후삼국시대 개막의 책임을 지고 자진 퇴위했다.''' 태자 김요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북궁|북쪽 궁궐(北宮)]]로 거처를 옮긴 뒤 반 년 동안 [[태상황|태상왕]]으로 있다가 같은 해 12월에 승하했다. 당시 나이는 29세~32세 사이로 추정되는데, 상당히 젊은 나이에 죽었다. 신라 역사상 유례 없이 특이하게도 자진 [[퇴위]]한 데다 요절했다는 이러한 정황으로 봐서 자연스러운 양위가 아니라 [[쿠데타]]나 그에 준하는 원인 때문이고, 그 배후에 이후 즉위하는 [[신덕왕]], 그리고 신덕왕의 양아버지 [[박예겸]] 등 박씨 세력이 있다는 설도 있다. 박예겸은 [[헌강왕]](제49대) 재위 전반기까지는 [[시중]]으로서 국정에 참여했지만 헌강왕 후반기부터 [[경문왕]]계가 중앙 정계를 장악하면서 잠시 밀려났었다. 그러나 위와 같이 경문왕계의 통치가 후삼국시대라는 파국을 맞았고, 서라벌 사람들조차도 진성여왕과 김위홍을 은어로 비난하는 상황이 되었다. 꼭 쿠데타 같은 어떤 사건이 아니라도 자연스레 경문왕계 및 경문왕계와 밀접한 김효종 대신 대안으로서 박예겸의 박씨 세력이 부상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진성여왕 재위 후반기 어느 시점에 [[신덕왕|박경휘]]와 헌강왕의 딸이 혼인해, 김효종과 마찬가지로 왕의 사위로서 신라 법도상 왕위를 계승할 자격을 충족해 명분을 쌓기 시작했다. 이어 즉위한 효공왕 김요는 [[서자]]라는 혈통상 약점이 있는 데다 10대의 어린 나이로 실권이 없었고, 박예겸의 딸을 왕비로 맞았다. 늦어도 진성여왕 하반기에 이르면 박씨가 실권을 쥐었다고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진성여왕이 갑작스레 붕어한 것도 박씨가 배후가 아닐까 의심하기도 하지만, [[문의왕후|어머니]], [[경문왕|아버지]]와 [[헌강왕|두]] [[정강왕|오빠]], 뒤를 이은 [[효공왕|조카]]가 모두 단명하였음을 고려하면, 당시 [[의학]]으로는 잡아낼 수 없는 가족력이었을 가능성도 높은 편이다. 누대에 걸쳐 [[근친혼]]을 거듭해온 신라 왕실 특성상 [[유전병]]이 발병했었어도 이상할 게 없기 때문이다. 제38대 열조 [[원성왕]]부터 제48대 [[경문왕]]의 직계 조상들은 모두 근친혼을 6번 했다. 김충공-귀보부인(김인겸 또는 김헌정의 딸), 희강왕-문목부인(김충공의 딸), 김균정-[[정교부인]](김충공의 딸), 김균정-[[조명부인]](김충공의 딸), 김계명-광화부인(제45대 [[신무왕]]의 딸), 그리고 경문왕-[[영화부인]](제47대 헌안왕의 딸). 둘 사이의 소생이 [[경문왕]]의 직계 조상인 것만 넣은 거라서 애는 안 낳고 결혼만 한 것까지 추가하면 훨씬 늘어난다. 이러면 신라 후대에 암군들이 연속적으로 나타나는 것도 설명 가능하다. 《삼국사기》에는 황산(黃山)에 장사 지냈다고 하는데[* 《[[삼국사기]]》에서 '황산'이란 지명은 대체로 지금의 [[경상남도]] [[양산시]] [[물금읍]] 지역을 가리키기 때문에, 진성여왕릉이 양산에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다만 멸망 이후에 묻힌 [[경순왕]]을 제외한 모든 신라왕릉이 [[경주시]] 지역에 있는데 진성여왕릉이 뜬금없이 양산에 있을 가능성이 낮다는 점과, 다른 몇몇 문헌들을 근거로 진성여왕릉이 양산에 있다는 것을 반박하는 의견도 있다. 황산이란 지명이 여러 곳이었을 수도 있다.] 《[[삼국유사]]》 <왕력>에는 "[[화장(장례)|화장]]하여 뼈를 연량(年梁)의 서훼(西卉) 또는 미황산(未黃山)에 뿌렸다"라고 되어 있다. * 참고 자료: 《[[http://mtcha.com.ne.kr/king/sinra/king51.htm|삼국사기]]》 == 평가 == 진성여왕의 재위 중에 농민 [[반란]]이 일어나는 등 신라가 분열되었기에 후대에는 대표적인 [[암군]]으로 여겨졌다.[* 진성여왕 치세에 [[최치원]]이 작성한 『성광사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聖住寺 朗慧和尙 白月光塔碑)』에 의하면 "은혜가 바다같이 넘쳤다"라며 [[명군]]으로 묘사가 되어 있지만 당연히 당대 군주를 대놓고 [[폭군]]으로 묘사할 수는 없었을 것이므로 기록을 전적으로 신뢰하기는 어렵다.] 다만 [[동양]] 전통 역사관에서 [[멸망]]한 전조의 혼란상을 평가할 때 당시 재위한 군주와 몇몇 [[신하]]들에게 책임을 묻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당대 [[정치]]적 혼란상을 혼자 뒤집어썼다는 견해도 있다.[* 대표적으로 [[백제]] [[의자왕]]의 타락이 있다.] 진성여왕 당시에는 [[원종·애노의 난]]이 일어나고 [[견훤]]이 [[광주광역시|무진주]]를 점령한 뒤 스스로 칭왕하며, [[도적]]이 들끓는 등 혼란스러웠던 것이 사실이지만 모조리 진성여왕의 탓이라고는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계속 쌓인 신라 자체의 문제가 진성여왕 시대에 터져 나온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일 듯하다. 일단 [[경문왕]] 시절에도 잘 수습하기는 했지만 이런저런 [[재난]]들이 있었고, 헌강왕 시절에도 심상치 않은 조짐은 있었다. 확실한 점이라면 당시 혼란스러웠던 신라의 상황을 수습해 재정비하지 못했던 점,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신라의 멸망이 가속화되었던 점으로 보면 그런 상황을 수습할 만한 역량은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전대의 [[정강왕]] 때까지만 하더라도 [[경주시|경주]]에서 먼 [[한산주]]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했을 정도로 그나마 지방 통제력이나 여력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진성여왕 시기에 이르러는 [[국고]]가 텅 비고 [[적고적]] 같은 도적 떼가 들끓는데도 힘이 없었는지 손 놓고만 있었다. 중앙군이 겁을 먹어서 싸우지 못하자 [[호족(한국사)|호족]]이 대신 [[전투]]를 벌였을 지경이다. 이러한 걸 보면 진성여왕에게 그럴 힘은 물론 [[능력]]도 없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맞을 듯하다. == 기타 == * [[한국사]]를 통틀어 젊은 [[여왕]]은 진성여왕뿐이었다. 현대에는 젊고 아름다운 여왕에 대한 환상이 있는지 [[선덕여왕(드라마)|드라마 <선덕여왕>]] 등 일반적으로 창작물에서 신라의 여왕이 젊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은 여러 정황상 즉위 시점에서는 이미 최소한 40대~50대로 [[중년]] 혹은 [[할머니]]였다. [[일제강점기]]만 해도 40대 후반~50대 초반을 노년의 시작이라 칭한 기록이 엄청나게 많은데(60대~70대 [[독립운동가]]를 체포했다가 살 날이 얼마 안 남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그냥 풀어준 적도 생각보다 꽤 많다) 그보다 1,000여 년 전인 그 시대라면 40대는(혼인 여부와 무관하게) 할머니로 고려될 수밖에 없었다. *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이 각각 '선덕왕', '진덕왕'이라고 적혀 있듯이 진성여왕 역시 [[삼국사기]] 기록에는 [[女|여(女)]] 자가 빠진 '진성왕' 내지는 '진성대왕'이라고만 적혀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그냥 '진성왕'인 반면 [[삼국유사]]에서는 '진성여왕'으로 표기된다.] 한국사와 [[세계사]]를 막론하고 역사상 여왕은 상당히 예외적인 사례이기 때문에 여성임을 강조하기 위해 여왕이라 부르는 것일 뿐이다.[* 선덕여왕의 경우 제37대 왕인 [[선덕왕|선덕왕 김양상]]과의 구분을 위해서 따로 구분을 하고 있기도 하다. 선덕여왕은 善(착할 선), 선덕왕은 宣(베풀 선)자로 서로 [[한자]] 표기법이 다르다.] * 문란한 사생활로 대중들에게 인지도가 높은 편인데, 이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된 [[근친상간]]과 집단 [[성행위]] 때문이다. * 먼 훗날 2013년 [[대한민국]] [[박근혜]] [[대한민국 대통령|대통령]]이 취임하기 전까지, [[한국사]]의 마지막 [[여성]] [[국가원수]]였다. == 대중매체에서 == * 1940년 [[김동인]]의 소설 《[[견훤/대중매체#s-1.1|견훤]]》에서는 음란하고 요사스런 [[성격]]의 여인으로 묘사된다. 주인공인 [[견훤]]보다는 1세 연상으로 등장하는데, 작중의 묘사에 따르면 젊은 [[나이]]임에도 대인 교제에 능숙한 점은 40세의 부인과 같지만 [[외모]]는 20세 정도의 처녀처럼 보일 정도라고 한다. 당시 25세였던 [[청년]] 시절의 견훤을 [[궁궐]]로 불러내 그를 유혹하고는 강제로 하룻밤을 동침한다. 작중에서 초인적인 [[체력]]의 소유자로 묘사되는 견훤조차도 진성여왕과 동침하고 돌아온 후에는 [[피로]]를 느꼈다고 묘사된다. * 1969년 개봉한 영화 <[[천년호]]>에서는 배우 [[김혜정]][* KBS드라마 [[삼국기]]에서는 [[선덕여왕]]을 연기했다.]이 연기했다. 작중에서는 [[주인공]]인 장군 원랑을 흠모해 그의 부인인 여화를 죽이려 하나 여화가 천년 묵은 [[여우]]에 씌이게 되어 되려 목숨이 위험해진다. 상당히 음란하고 방탕한 모습으로 묘사되나 [[상대등]]을 위시한 [[귀족]]들에게 위협당하고 [[신분]] 때문에 혼인하지 못해 외로워하는 모습을 보인다. [[정준호]], [[김효진(배우)|김효진]] 주연의 2003년 [[리메이크]]판 <[[천년호(2003년 영화)|천년호]]>에서는 배우 [[김혜리(배우)|김혜리]][* 2000년 [[KBS]]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연화(태조 왕건)|강비]] 역.]가 연기했는데 요녀의 [[이미지]]가 강하다. * 1983년 [[김성한]]의 소설 《[[태조(고려)/대중매체#s-1.2|왕건]]》에서는 나름대로 재평가를 해서 무너져가는 [[나라]]를 일으키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하지만 시대적인 한계와 [[진골]] 귀족층의 반대를 감당하지 못하고 자멸하는 비운의 [[군주]]로 묘사했다. * 2000년 [[KBS]]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배우 [[노현희]][* "골격이 흡사 건장한 사내와 같다"라는 기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마른 편인 노현희가 맡은 게 고증오류. 당시에 체격이 크고 연기 경험이 풍부한 젊은[여왕 배역을 담당할 만한 배우를 찾기 힘들었을 것이고 굳이 체격 고증을 일부러 할 만큼 비중이 높은 인물도 아니었다. 그리고 노현희의 연기력이 준수하여 배역과 잘 맞기도 했고.]가 연기했다. 완전히 전형적인 암군의 모습을 보여서 정치에는 관심없고 [[최치원]]의 충언에도 심드렁하기까지 했으며 오직 향락에만 치중한다. 각지에서 발생하는 반란을 두고 "모두 저절로 사라질 거에요!"라며 말하는 장면이 가관이다. 백성들은 공공연히 "대왕은 무슨, 암탉이지!"라며 조롱하고 [[도선(태조 왕건)|도선]]은 제자인 [[경보(승려)|경보]]에게 "백고좌를 해도 왕 마음이 콩밭인데 해서 뭐하냐!"라고 하고 그 백고좌 자리에서는 대놓고 진성여왕과 [[김위홍]]을 비판한다. 작중에서는 그저 평범하게 살기를 원하던 여인이 원치 않게 옥좌에 올라 그에 대한 환멸로 김위홍에 의존하며 향략을 즐기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김위홍에 대한 사랑은 거의 순애보급. 김위홍의 마지막 출연이 된 제7화 마지막 부분에서 두 사람이 나누는 꽁냥꽁냥한 대사는 특히 압권. 물론 이미 처도 있는 숙부와 어린 조카 간의 로맨스는 비밀이었으나 나이 든 숙부 김위홍이[* 실제 김위홍의 나이는 죽을 당시 40대 초반 정도였는데, 그 정도 나이는 삼국시대라도 노인으로 취급할 정도는 아니었다. 사실 김위홍이 궁예와 대화가 파토난 뒤 헤어지고 나서 몸 상태가 좋지 않음을 보였다. 김위홍을 한심하게 여기던 궁예도 작별하기 전 "지금이라도 벼슬을 버리고 산으로 들어가야 살 수 있다"라고 경고했는데 이는 단순히 권력에 집착하지 말라는 충고일 수도 있지만 의술을 배운 적이 있는 만큼 요양을 하라는 의도도 포함됐을 수 있다.] 무리를 하는 바람에 복상사를 당한 뒤 여왕 측에서 숙부가 자신의 지아비였다는 사실을 제8화에서 [[커밍아웃]]해 버린다. 그러면서 "난 분명 상대등 위홍을 사모했다"느니 "신라 왕실이 근친혼을 한 게 언제부터인데 그러냐"느니 하는 [[정신승리]]가 묘하게 당당하다[* 다만 극중의 묘사로 보면 한심한 모습이지만, 그래서 역사적으로 어땠느냐 하면 여왕의 말이 맞긴 하다. [[근친혼#s-4.4.4|항목]] 참고.]. 이후 [[견훤(태조 왕건)|견훤]]이 [[광주광역시|무진주]]를 장악하자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건지는 몰라도 대책을 강구하라 하는데 신료들도 "답이 없다" 하니 "아니, 힘없는 나보고 뭐 어쩌라고"라며 답답해 하는 장면으로 나오는 게 마지막. 아이러니한 것은 만취했다지만 견훤을 보자 "[[장군]]직을 주겠다"라며 입을 턴 장본인이 진성여왕이고 기어이 견훤을 무진주로 보낸 장본인은 바로 김위홍이라 결국 둘이 아주 쌍으로 놀며 흔들리던 [[통일신라]] 최대의 적국을 만드는데 간접적인 도움을 준 격. <태조 왕건>에서는 [[궁예(태조 왕건)|궁예]]가 [[경문왕]]의 버려진 [[서자]]라는 설을 따랐기에 둘은 이복남매가 되는데 백고좌가 펼쳐진 [[황룡사]]에서 궁예가 멀리 있는 진성여왕을 잠시 응시했다가 시선이 마주치려고 할 때 궁예가 슬쩍 시선을 피한 것이 전부로 둘이 직접 대면하는 장면은 없었다.[* 김위홍의 대사에서 "오죽하면 어린 네 누이로 왕통을 이었겠느냐"라는 대사로 잠깐 언급되기도 한다.] * [[이현세]]의 [[만화]] 《늑대의 피》에도 나오는데 말 그대로 변태 [[치녀|색녀]]로 나온다. * [[역사]]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다루는 [[채널A]] <[[천일야사]]>에서는 배우 이장미가 연기했다.[[https://www.youtube.com/watch?v=rieLgn1OZ8Q|#]] * [[전지적 독자 시점]]에서 미희왕 민지원의 배후성인 성좌 '매금지존'으로 등장한다. == 《[[삼국사기]]》 기록 == [include(틀:삼국사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42723&cid=49625&categoryId=49798|《삼국사기》 <진성왕 본기>]]''' 一年秋七月 진성왕이 즉위하다 一年秋七月 [[죄수]]를 [[사면]]하고 주군의 조세를 면제해 주다 一年 [[황룡사]]에 백고좌를 베풀고 설법을 듣다 一年 [[겨울]]에 눈이 내리지 않다 二年春二月 소량리의 돌이 저절로 움직이다 二年 삼대목을 편찬하다 二年 [[위홍]]이 죽자 혜성대왕으로 [[추존]]하다 二年 왕이 [[미소년]]과 음란한 행위를 하다 二年 거인이 정치를 비방하는 글로 곤욕을 치르다 二年春三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二年 죄수에 대한 사면과 [[승려]]에 대한 도첩을 수여하다 二年夏五月 [[가뭄]]이 들다 三年 [[원종(신라)]]과 [[애노]]가 반란을 일으키다 四年春一月 햇무리가 5겹 생기다 四年春一月十五日 [[황룡사]]에서 연등 행차를 보다 五年冬十月 [[궁예]]가 북원과 명주관내를 습격하다 六年 [[견훤]]이 [[후백제]]를 세우다 七年 병부 시랑 김처회가 [[당나라]]에 가던 도중 익사하다 八年春二月 [[최치원]]이 시무 10여 조를 건의하다 八年冬十月 [[궁예]]가 스스로 [[장군]]이라 칭하다 九年秋八月 궁예가 10여 군현을 깨뜨리다 九年冬十月 요를 태자로 책봉하다 十年 서남쪽에 [[적고적|도적]]이 일어나다 十一年夏六月 진성왕이 태자 요에게 왕위를 물려주다 十一年冬十二月四日 진성왕이 죽다 《[[삼국사기]]》 11권은 [[문성왕]]부터 시작되어 진성여왕에서 끝난다. == 둘러보기 == [include(틀:진성여왕)] ---- [include(틀:신라 왕실)] [각주] [[분류:진성여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