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도정궁 주인)] ---- ||<-3> {{{#gold '''조선 중종의 11대손 | 도정궁 10대 사손'''[br]{{{+1 '''진안군 | 晉安君'''}}}}}} || ||<-2> '''[[봉호|{{{#gold 봉호}}}]]''' ||<(> 진안군(晉安君)[* 봉호는 [[경상남도]] [[진주시|진주군]](晋州郡)에서 유래했다.] || ||||<:> '''[[본관|{{{#gold 본관}}}]]''' ||<(> [[전주 이씨]] || ||||<:> '''[[이름|{{{#gold 이름}}}]]''' ||<(> 언식(彦植) || ||||<:> '''[[자(이름)|{{{#gold 자}}}]]''' ||<(> 원방(元邦) || ||||<:> '''{{{#gold 생부}}}''' ||<(> [[이풍(1727)|이풍]] || ||||<:> '''{{{#gold 생모}}}''' ||<(> 정경부인 [[진주 강씨]](晉州 姜氏) || ||||<:> '''{{{#gold 부인}}}''' ||<(> 덕수군부인 덕수 장씨(德水 張氏)[br]창원군부인 창원 황씨(昌原 黃氏)[br]거창군부인 거창 신씨(居昌 愼氏) || ||||<:> '''{{{#gold 자녀}}}''' ||<(> 2남 2녀[* 후술하겠지만 1남은 [[양자(가족)|양자]]이다.] || ||<|2><:> '''{{{#gold 생몰[br]기간}}}''' ||<:> '''[[음력|{{{#gold 음력}}}]]''' ||[[1752년]] [[8월 13일]] ~ [[1819년]] [[8월 9일]] || ||<:> '''[[태양력|{{{#gold 양력}}}]]''' ||[[1752년]] [[9월 20일]] ~ [[1819년]] [[9월 27일]]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의 [[왕족]], [[문신]]. [[도정궁]]의 제10대 사손(嗣孫)[* 제사를 받드는 후손이란 뜻이다.]이자 제11대 주인이다. == 생애 == 1752년([[영조]] 28년)[* 영조는 진안군의 증조할아버지 뻘이다. 즉, 이언식은 [[순조]]와 같은 [[항렬]]이다.] 8월 13일에 [[한성부]] 서부 인달방 [[도정궁]]에서 [[덕흥대원군]]의 9대 사손인 판돈녕부사[* 判敦寧府事.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친인척을 관리하던 돈녕부에 둔 종1품 판사(判事)다.] [[이풍(1727)|이풍(이례)]]과 통덕랑 강주직의 딸 정경부인 [[진주 강씨]]의 [[적장자|적장남]]으로 태어났다. 당시로서는 비교적 늦은 나이인 30살이던 1782년([[정조(조선)|정조]] 6년)에 음직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해 [[사도세자]]의 무덤인 영우원[* 1789년([[정조(조선)|정조]] 13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기면서 현륭원으로 개칭. 1899년([[광무]] 3년) [[사도세자]]가 장조황제로 추숭된 이후 [[융건릉|융릉]]으로 재개칭.] 참봉(永祐園 參奉)을 거쳐 1783년(정조 7년) 동부(東部)의 도사(都事)[* 조선시대의 관직으로 처음에는 사무 위주였으나 뒤에는 관리의 감찰 규탄을 주로 맡아보았다.]와 봉사(奉事)[* 조선시대 종8품의 문관직.]를 역임했다. 이후 지방으로 내려가 [[증산군|증산]]현령과 [[합천군|합천]][[군수]]직을 맡은 뒤 [[남원]], [[황주군|황주]][[부사]]와 [[전주시|전주]] 판관 직을 수행했다. 1795년([[정조(조선)|정조]] 19년)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도정궁]] 사손이 되었다. 3년 뒤 [[도정궁#s-4.1|덕흥대원군 사손]]에게 대대로 내려오는 통정대부 '돈녕도정'(通政大夫 敦寧都正)에 제수받았으며 1799년(정조 23년)에는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가 되었다. 이후에도 [[사옹원]] 부제조 및 오위도총부 부총관[* 五衛都摠府副摠管. 조선시대 오위를 총괄하던 최고 군령기관.]으로 임명받았으며, 원래 [[정조(조선)|정조]]의 건릉 공사를 책임지는 수릉관(守陵官) 직을 맡던 안춘군을 대신하여 수릉관 대행을 맡다 곧 정식으로 역임하는 등 요직을 맡았다. 1819년([[순조]] 19년) 순조가 그를 '진안군(晉安君)'으로 봉했다. 이언식의 직계에서 마지막으로 왕을 했던 사람은 [[중종(조선)|중종]]이었기에 중종의 4대손인 이언식의 8대조 [[응천군(1579)|응천군 이돈]]까지는 왕족으로 대우받고 그 이후로는 일반 양반이었다. 그래서 원칙적으로 이언식은 군 작위를 받을 수 없었다. 그런데 순조가 그에게 군 작위를 수여한 것은 왕실 후손이 점점 사라져가는 상황을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효종(조선)|효종]]의 남계 후손들은, 순조 직계를 제외하면 [[은언군]]의 자손들밖에 없었고 그나마도 아들없이 죽었거나 역모에 엮였기 때문에 저대로 냅뒀다가는 왕실의 대가 끊길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꼈던 것. 그래서 일종의 [[보험]] 개념으로 '''대원군가 적장손에 한해 군 작위를 수여하여 대대로 왕족 지위를 세습시켜주려고 한 것'''이었다. >대원군 봉사손에게 봉작하는 것에 대하여 하교하다 >---- >하교하기를, > >"종성(宗姓) 가운데 오직 판돈녕(判敦寧) 이언식(李彦植)이 대원군(大院君)[* [[덕흥대원군]].] 의 제사를 받들고 있어 다른 종성인(宗姓人)과 체통이 다르므로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으로 의의(擬議)할 만하다. 그러나 우리 왕조에서는 봉작이 아니면 종실로 대우하지 않는데, 이것이 과연 어떠한가? 대원군의 사손(祀孫)이 도정(都正)을 세습하는 것은 바로 [[선조(조선)|선묘(宣廟)]]의 성교이다. 지금 만약 판돈녕을 위시하여 제사를 맡은 사람이 2품의 품계에 오르는 경우 공신의 적장례(嫡長例)에 의하여 곧 봉작을 내리면 성조(聖祖)의 제도에 어긋나지 않고 역시 오래도록 돈목(敦睦)을 펴는 뜻도 되며 목전의 대례(大禮)에도 의식이 갖추어질 수 있다. 그 가부를 다시 앞서의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하나를 지적하여 헌의(獻議)하게 하라." > >하였다. >---- >《[[순조실록]]》 22권, 순조 19년(1819) 1월 26일 기미 1번째기사[[http://sillok.history.go.kr/id/kwa_11901026_001|#]] 그래서 신하들 중 반발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시수 등이 대원군 봉사손에게 봉작하는 문제를 헌의하다 >---- >영부사 이시수(李時秀), 판부사 김재찬(金載瓚)·한용귀(韓用龜), 우의정 남공철(南公轍), 홍문관 제학 김이교(金履喬) 등이 대원군 봉사손에게 봉작하는 문제에 관하여 헌의(獻議)하기를, > >"현재의 사세는 이를 버리고는 달리 변통할 방법이 없습니다." > >하였고, 예조 판서 이만수(李晩秀), 참판 윤익렬(尹益烈), 참의 한기유(韓耆裕)는 말하기를, > >'''"종친의 4대 뒤에 단지 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만을 인습하게 하는 것은 이미 정해진 법제가 있고, 공신의 적장(嫡長)으로서 2품에 오른 뒤에 봉작을 이음도 또한 타당치 않습니다.''' 당(唐)나라 개원례(開元禮)[* [[당나라]] [[현종(당)|현종]] 때에 정한 예문.] 의 황태자 관례시에 종정경(宗正卿)이 주인(主人)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왕조의 《오례의(五禮儀)》는 실로 개원례에 따른 것입니다. 만약 이언식(李彦植)을 종부시 제조(宗簿寺提調)로 삼아 종정경의 일을 행하게 한다면, 역시 한때의 임시 변통하는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 >하였으며, 규장각 직제학 박종훈(朴宗薰)이 말하기를, > >'''"대원군의 제사를 받드는 사람이 돈녕부 도정을 대대로 이음은 《속대전(續大典)》에 있는 바가 또한 매우 명백합니다. 현재 이를 변통하는 것을 갑자기 논의하기란 아마도 어려운 듯싶습니다."''' > >하니, 하교하기를, > >"여러 의논들이 비록 들쭉날쭉하나 또한 모두 어긋나는 것도 아니다. 봉작은 비록 불가할 것이 없으나 공신 적장의 예는 인용할 수 없으니, 세습의 타당 여부를 역시 반드시 의논하여 정해야 할 것이다. 예조 당상의 의논 가운데 종정경 문제는 봉작하는 일과 어느 것이 편의한가? 다시 논의하여 아뢰라." > >하였다. >---- >《[[순조실록]]》 22권, 순조 19년(1819) 2월 6일 무진 2번째기사[[http://sillok.history.go.kr/id/kwa_11902006_002|#]] 그럼에도 순조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성사시켰다. 이 때부터 [[한일합방]] 때 까지 [[도정궁]]의 사손은 [[완성군|군 작위를]] [[완창군|받으며]] [[경원군(1842)|왕실의]] [[창산군|주요 종친]]으로 활동했다. [[종친]]이 된 그 해 [[효명세자]]의 [[결혼]] 때 주 관리자로 활약했고 도총관에 임명되어 봉직했다. 같은 해 여름과 가을에 [[종묘]]의 향제 헌관으로 여러 번 차출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거절했다. == 죽음 == 결국 해를 넘기지 못하고 1819년([[순조]] 19년) 8월 9일 도정궁에서 별세했다. 향년 68세.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동]] 수락산 덕릉마을 내 덕흥대원군묘 권역에 있다. == 가족 관계 == * 부 : [[이풍(1727)|이풍]](李灃, 1727 ~ 1795) * 생모 : 정경부인 [[진주 강씨]](貞敬夫人 晋州 姜氏, 1727 ~ 1795) - 통덕랑 강주직(通德郞 姜柱直)의 딸 * 동생 : 이민식(李民植, 1753 ~ 1817) - 숙부 [[달선군]] 이영(達善君 李泳)에게 출계 * 동생 : 이중식(李重植, 1756 ~ 1809) * 동생 : 부사 [[배천 조씨|조현]](府使 趙鉉)의 처 * 동생 : [[해평 윤씨|윤치민]](尹致敏)의 처 * 동생 : [[달성 서씨|서유민]](徐有敏)의 처 * 계모 : 정경부인 [[전의 이씨]](貞敬夫人 全義 李氏, 1736~1816) - 오위장 이기폐(五衛將 李技蕟)의 딸 * 정부인 : 덕수군부인 [[덕수 장씨]](德水郡夫人 德水 張氏, 1750 ~ 1770) - 봉사 장지중(奉事 張至中)의 딸 * 양자 : [[완성군]] 이희(完城君 李爔, 1771 ~ 1830) - 동생 이민식(李民植)의 장남 * 장녀 : 풍남군 [[풍양 조씨|조함영]](豊南君 趙咸永)에게 출가 * 계부인 : 창원군부인 [[창원 황씨]](昌原郡夫人 昌原 黃氏, 1750 ~ 1775) - 황정(黃棖)의 딸 * 계부인 : 거창군부인 [[거창 신씨]](居昌郡夫人 居昌 愼氏, 1757 ~ 1832) - 지사 신이복(知事 愼爾復)의 딸 * 첩부인 : 성씨 미상 * 서장남: 이완(李烷, 1791 ~ ?) * 서장녀: 군수 [[반남 박씨|박종염]][* 박준원(朴凖源)의 아들, [[수빈 박씨]]의 동생](郡守 朴宗琰)에게 출가 [[분류:조선의 왕족]][[분류:조선의 왕자군]][[분류:도정궁 종주]][[분류:1752년 출생]][[분류:1819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