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진(통일왕조) 군주)] |||||| '''{{{#ece5b6 진(秦)나라 15대 국군[br]{{{+1 애공}}}[br]哀公}}}''' |||||||||| |||| '''[[성씨|{{{#ece5b6 성}}}]]''' |||| 영(嬴) || |||| '''[[본관|{{{#ece5b6 씨}}}]]''' |||| 조(趙) || |||| '''[[휘|{{{#ece5b6 휘}}}]]''' |||| 적(籍) / 원(元) || |||| '''{{{#ece5b6 아버지}}}''' |||| [[진경공(통일왕조)|진경공]](秦景公) 영석(嬴石)[* 기록마다 이름이 다르다 문서참조] || || '''{{{#ece5b6 생몰 기간}}}''' || 음력 || 기원전 ???년 ~ 기원전 501년 || || '''{{{#ece5b6 재위 기간}}}''' || 음력 || 기원전 536년 ~ 기원전 501년 || [목차] [clearfix] == 개요 == [[진(통일왕조)|진(秦)나라]]의 제15대 [[군주]]. [[진경공(통일왕조)|진경공]](秦景公)의 아들. [[진혜공(통일왕조)|진혜공]](秦惠公)의 할아버지. [[초소왕]]이 이끄는 [[초(춘추전국시대)|초나라]]를 도와 [[오(춘추시대)|오나라]]를 물리쳐서 초나라를 부흥시키는 역할을 한다. 기록에 따라서 시호가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데, 사기 진시황본기에는 진필공(秦畢公), 사기색은(史記索隱)에서는 진필공(秦㻫公), [[오월춘추]](吳越春秋)에서는 진백공(秦栢公)으로 기록되어 있다. == 재위 기간에 일어난 일 == 진 애공 원년(기원전 536년), 이 당시 초나라는 [[초장왕]] 때에 [[전성기]]를 이룬 국력을 초 장왕의 아들인 [[초공왕]] 때부터 조금씩 깎아 먹기 시작하더니[* 그 대표적 사례로 [[진(춘추오패)|진(晉)나라]]와의 전투에서 고전했다.] 손자인 [[초평왕]] 때에 이르러서는 국력이 쇠약해졌다. 진 애공 10년(기원전 527년), 초 평왕은 그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진 애공의 여동생인 맹영(孟嬴, 백영伯嬴이라고도 함)을 태자비로 삼아 도움을 받고자 했는데, 간신 비무기의 농간 때문에 결국 맹영은 초 평왕이 [[NTR|대신 차지했고]] 건에게는 맹영을 따라온 제나라 출신 시녀를 진나라 공주라고 속여 맺어주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비무기는 태자 건과 그 스승인 오사, 그리고 오사의 아들인 오상과 [[오운]](伍員) 형제까지 해치려 했다. 오사와 오상 부자는 도망치지 않고 처형당했지만, 오운은 태자 건과 그 아들 공자 승을 데리고 [[정나라]]로 갔다. 그러나 태자 건이 정나라 군주룰 죽이려다가 오히려 들켜서 잡혀 죽었다. 그리하여 오운 즉 오자서는 오나라로 달아나 공자 광의 신임을 받아 오왕 료를 죽이고 공자 광이 왕이 되니 그가 바로 [[합려]](闔閭)다. 합려는 오자서는 물론 대병법가 [[손무]](孫武)와 초나라에서 망명한 [[백비]](伯嚭) 등을 등용해 국력이 매우 커졌다.[* 이 과정이 전부 진 애공 10년의 일은 아니다. 그저 요약일 따름이다.] 진 애공 31년(기원전 506년), 합려가 초나라를 쳐서 초소왕은 달아나고 영도가 점령되어 노략질로 개판이 된다. 신포서는 진나라로 가서 구원을 요청하는데, 진 애공은 초나라는 신의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하려 했다. 그러나 신포서가 7일 동안 정성으로 요청을 하니[* 아예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한다. 몇 몇 소설은 한층 더 각색해 자신은 개돼지만도 못하다며 자책한 신포서가 발가벗고 자기가 머무는 관저에서 돌아다닌다는 말을 들은 진 애공이 몰래 찾아가 확인하고 감격해 마음을 바꿨다는 내용도 있다.] 결국 진 애공은 그 정성에 굴복해 결국 초나라에 원군을 보내 초나라는 다시 서게 되었다.[* 물론 합려의 동생인 부개가 반역을 한 까닭도 있다.] 진 애공 36년(기원전 501년), 진 애공이 병으로 죽었고, 아들인 평(平)이 일찍 죽었는데, 그는 [[진이공]](秦夷公)으로 추증되었고, 그 뒤를 이은 것은 손자인 영녕이었다. 그가 바로 진 혜공이다. [각주] [[분류:진(秦)나라의 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