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송사)] ---- ||<-2> '''{{{+1 陳宜中[br]진의중}}}''' || || '''성씨''' ||진(陳) || || '''이름''' ||의중(宜中) || || '''자''' ||여권(與權) || || '''생몰''' ||1218년 ~ 1283년(향년 65세) || || '''출신''' ||온주(溫州) 영가현(永嘉縣) || || '''주군''' ||[[이종(송)|송이종]][br][[도종(송)|송도종]][br][[공종(송)|송공제]][br][[단종(송)|송단종]][br][[송소제]] || [목차] [clearfix] == 개요 == 중국 [[남송]] 말기의 대신이다, 자는 여권(與權). == 생애 == 진의중은 온주(溫州) 영가현(永嘉縣)에서 태어난 인물이다. 진의중의 집안은 어린 시절에 가난했지만 성품이 특히 준수하고 빼어났으며, 한 상인이 진의중의 출생을 미루어 나중에 지위가 크게 높아질 것이라고 생각해 자신의 딸을 진의중에게 시집 보냈다. 뒤에 진의중은 문학에서 좋은 평판을 얻었다. [[이종(송)|이종]] 보우(寶祐) 연간[* 1253년~1258년]에 당시 권신이었던 [[정대전]]이 환관 노윤승(盧允升)·동송신(董宋臣)과 결탁하고 [[이종(송)|이종]]으로부터 총애를 받아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로 발탁되며 횡포를 부리자, 진의중은 태학 동문인 황용(黃鏞)·유불(劉黻)·임측조(林測祖)·진종(陳宗)·증유(曾唯)와 함께 정대전을 규탄하였다. 정대전은 자신의 측근을 이용하여 진의중 등 6명을 모두 탄압하였고, 진의중은 이때 건창군(建昌軍)으로 유배되기도 하였다. 당시 정대전을 싫어하던 남송의 선비들은 정대전을 규탄한 진의중 등 6명을 6군자라 부르며 칭찬하였다. 정대전이 몰락한 뒤, 오잠(吳潛)은 정대전을 규탄하다가 탄압을 당한 진의중 등 6명의 복귀를 주청하였다. 당시 남송의 재상은 [[가사도]]였는데, 가사도도 마찬가지로 진의중 등 6명의 복귀를 주청하여, 마침내 진의중 등 6명에게 성시(省試)를 면제하고 전시(殿試)를 응시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진의중은 황제가 주관하는 전시에 응시하여 2등으로 합격하였고, 소흥부 추관에서 시작하여, 몇년 뒤에는 감찰어사까지 승진하였다. 이후 [[도종(송)|도종]] 시기에 정원봉(程元鳳)이 재상의 자리에 오르는데, 가사도는 정원봉이 자신의 권력을 빼앗을까 두려워하여, 그를 제거할 계획을 꾸민다. 진의중은 정원봉을 탄핵하는 데 참여하였고, 정원봉이 파면된 뒤, 진의중은 태부경으로 제수된다. 진의중은 지방관으로의 전출을 희망하여 절서제형(浙西提刑)을 맡았고, 뒤에 숭정원 설서, 부문각 대제, 지복주(知福州)를 역임하였다. 이후 형부상서, 첨서추밀원사로 임명되고 임시로 참지정사를 맡기도 했으며 1275년에는 동지추밀원사가 되었다. 당시 남송의 정세는 시시각각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쿠빌라이 칸]]의 [[몽골 제국]]이 다시 [[남송]]을 침공하면서 1268년부터 5년에 걸친 양양 공방전은 몽골 제국이 승리하였다. 도종이 죽고 1275년, 도종의 아들인 [[공종(송)|공제]]가 즉위하였다. 가사도가 쿠빌라이의 군대와 싸웠으나 대패하여 완전히 몰락한다. 가사도에게 종군했던 옹응룡(翁應龍)이 돌아오자, 진의중은 가사도의 소재를 물었으나, 옹응룡이 대답하지 않자, 진의중은 가사도를 탄핵한다. 몽골 제국의 군대가 점점 임안으로 다가오는 가운데, 남송 조정은 충격에 빠졌고, 우승상 장감(章鑑)이 밤을 타서 도망친 상황에서, 왕약(王爚)이 좌승상이 되고, 진의중은 우승상이 되었다. 하지만 좌승상 왕약은 진의중과 의견이 맞지 않는 인물이었다. [[유몽염]]이 입조하자, 진의중은 왕약과 함께 유몽염을 승상으로 삼길 청하여, 유몽염은 우승상, 왕약은 평장군국정사, 진의중은 좌승상으로 임명된다. 이후에는 남송의 방어선들이 잇따라 몽골 제국의 군대에게 무너지자, 진의중은 태황태후에게 천도를 청하였지만 태황태후는 불가하다며 맞선다. 진의중이 눈물을 흘리면서 태황태후에게 천도를 청하자 태황태후는 결국 천도 건의를 받아들인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꼬여버리는데 진의중이 저녁이 되어도 나타나지 않자, 태황태후는 여기에 분노하여 “내가 처음에 천도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대신들이 수차례나 청하였는데, 도리어 나를 속이는 것인가?”라고 말하며 결국 천도를 포기하였다. 결국 공제와 태황태후가 원나라에게 항복했으나, 진의중은 [[육수부]], [[장세걸]] 등과 함께 온주로 달아나 공제의 아우인 [[단종(송)|익왕 조하]]를 황제로 즉위시키고 망명정부의 재상이 된다. 진의중은 [[참파]]에 힘을 빌리려고 했지만, 참파에 원군을 요청하는 것은 실패로 끝났다. 진의중은 남송의 멸망에 직면한 시기인 1278년에 참파로 달아났는데, 1282년 [[원나라]]가 [[참파]]를 정벌하러 오자, 진의중은 다시 섬국([[수코타이 왕국]])으로 달아났고, 1283년 그곳에서 영면을 하였다. == 여담 == * [[항저우]]에 그를 기리는 사당이 존재한다. [[분류:송나라/인물]][[분류:1218년 출생]][[분류:1283년 사망]][[분류:원저우시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