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찐씨 정권 왕)] ||<-3><#002984> {{{#FFFFFF '''정주 12대 국왕'''[br]{{{+1 '''靈王 | 영왕'''}}}}}} || ||||||<:>
[[파일:영왕 정종.jpg|width=100%]] || ||||<:><#002984>'''{{{#FFFFFF '''묘호'''}}}'''||<(> 없음 || ||||<:><#002984>'''{{{#FFFFFF '''시호'''}}}'''||<(>영왕(靈王) || ||||<:><#002984>'''{{{#FFFFFF '''작위'''}}}'''||<(> 상상태국공[br](上相太國公) || ||||<:><#002984>'''{{{#FFFFFF '''주군'''}}}'''||<(> [[현종(레 27대)|현종]][br][[민제(레)|민제]] || ||||<:><#002984>'''{{{#FFFFFF '''성씨'''}}}'''||<(>찐(Trịnh, 鄭/정) || ||||<:><#002984>'''{{{#FFFFFF '''휘'''}}}'''||<(> 똥(Tông, 棕/종)[br]카이(Khải, 楷/해) || ||||<:><#002984>'''{{{#FFFFFF '''생몰기간'''}}}'''||<(>1763년 10월 10일 ~ 1786년 7월 23일 (향년 22세) || ||||<:><#002984>'''{{{#FFFFFF '''재위기간'''}}}'''||<(>1782년 ~ 1786년 7월 23일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월]] [[후 레 왕조|여씨 왕조]]의 [[막부]]인 [[찐씨 정권|정주]]의 12대이자 사실상 마지막 국왕. 대대로 정주는 황제를 대신해 실권을 휘둘렀지만 견제세력인 [[응우옌씨 정권|완주]]도 아닌 제3의 세력 [[떠이선 왕조|서산]]의 개입으로 막부가 붕괴하고 [[꽝쭝|응우옌반후에]]의 침공에 패배하여 압송된 후 자살했다. 휘는 정종[* Trịnh Tông / 鄭棕 / 찐똥.]이라 알려져 있으나 《흠정월사통감강목》(欽定越史通鑑綱目)엔 '정해'[* Trịnh Khải / 鄭楷 / 찐카이.]로 전해진다. 사후 정권이 붕괴했지만 그의 정주 왕 지위는 5촌 숙부인 [[찐봉|정봉]]이 이었기에 사후 시호 자체는 추시[* 시호가 영왕(靈王) 혹은 영렬영왕(英烈靈王)으로 전해진다.]되었다. 생전 [[봉호]]는 단남왕[* Đoan Nam Vương / 端南王].이었다. == 생애 == 까인흥 24년 9월 초사일([[1763년]] [[10월 10일]]), [[찐섬]](정삼)의 적장자로 태어났다. 모친은 공빈(恭嬪) 즈엉티응옥호안(楊氏玉歡)이었다. 찐똥의 모친은 총애를 받지 못했고, 또한 찐똥 본인도 무(武)를 좋아하고 문(文)을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부왕 찐섬은 그를 매우 싫어했다. 찐똥의 이복동생인 [[찐깐 (11대)|찐깐]](정간)은 총명하고 영리하여 총애를 받았고, 조정에 있는 찐섬의 당우들도 찐깐의 모친 당티후에(鄧氏惠)에게 많이 붙게 되니 세자 찐똥은 고립되었다. 찐똥은 서차자인 찐깐이 향후 권력을 빼앗을까 두려워했고, [[1780년]]에 부왕 찐섬이 병을 얻은 틈을 타 정변을 일으킬 음모를 꾸몄으나 즉시 찐섬에게 발각되었다. 격노한 찐섬은 그를 폐위하여 계자(季子)로 만들고 유폐시켰으며, 어린 찐깐을 세자로 세웠다. 까인흥 43년([[1782년]]) 9월, 찐섬이 승하하고, 권신 호앙딘바오가 찐깐으로 하여금 뒤를 잇게 했다. 그해 11월, 삼부군(三府軍)이 폐세자 찐똥과 결탁하여 반란을 일으켜 호앙딘바오를 죽인 뒤 찐똥을 상주(上主)의 자리로 옹립했다. 황제 [[레현종(27대)|현종]]은 칙명으로 찐똥을 단남왕으로 봉하였다. 찐똥은 즉위한 뒤 즉시, 이전에 선왕 [[찐섬]]에 의해 유폐된 폐태자 [[레주이비]]의 자녀들을 석방했고, 현종으로 하여금 레주이비의 첫째 아들 [[레민제|레주이끼]]를 황사손(皇嗣孫)으로 삼도록 하여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 찐똥이 즉위하기 전, 삼부군은 교횡이 심하였고, 거대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찐똥이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하자 삼부군의 세력은 더욱 강해졌고, [[1784년]]에 반란을 일으켜 응우옌칸(阮侃)과 즈엉쿠옹(楊匡)의 집을 파괴했으며, 심지어는 주부(主府)의 문전에서 조정의 주요 인사를 살해하기도 했다. 응우옌칸은 산서(山西)로 달아나 찐똥이 수도를 나와 피난하는 것을 맞이하고자 했고, 연후에 각 진(鎭)의 제후들을 불러 전횡을 일삼는 삼부군을 토벌하려고 했다. 그러나 찐똥은 주부에서 삼부군에게 포위되어 곤경에 처했고, 탈출할 방법이 없었다. 각 진의 제후들은 찐똥이 해를 입을까 두려워해 철군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부이후이빅(裴輝璧)의 안무하에 비로소 반란이 평정되었다. 까인흥 47년([[1786년]]), [[떠이선 왕조]]의 [[응우옌후에]]가 부려멸정[* 扶黎滅鄭, 레씨를 돕고 찐씨를 멸함.]의 기치를 내걸고, 부반념(武文任), 응우옌흐우찐(阮有整)을 거느린채 북하(北河)의 찐 주를 향하여 진격했다. 찐씨 막하의 팜응오꺼우(范吳俅), 호앙딘테(黃廷體) 등 부(部)들이 대패하였고, 응우옌후에는 그 기세를 타고 [[하노이|탕롱]]을 공격해 들어갔다. 찐똥은 상병(象兵, 코끼리병) 100여 명을 거느리고 안화문(安華門)을 나가 산서(山西)로 도주했다. 그러나 안랑(安朗)에 이르렀을 때 농민 응우옌짱(阮莊)에게 잡혀 떠이선 군에게 보내졌다. 포로가 된 찐똥은 이를 일종의 치욕으로 여겨 마침내 까인흥 47년 6월 28일([[1786년]] [[7월 23일]])에 길에서 자살했다. 그의 시신이 탕롱으로 보내지자 응우옌후에는 시신을 어루만지며 통곡하였고, 그를 영웅이라고 일컬으며 단남왕묘(端南王墓)에 예장하도록 하였다. 찐똥이 떠이선(서산)군에게 패배하고 자살함으로써 정주는 멸망했지만 현종 황제의 뒤를 이은 [[소통제]]가 서산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찐똥(정종)의 5촌 숙부 [[찐봉]]을 정주 왕으로 봉하면서 명맥을 이었고, 자살한 찐똥을 영왕(Linh Vương / 靈王)으로 추시했다. == 관련 문서 == * [[레현종(27대)|현종(顯宗)]] * [[태조(떠이선)|완문혜]] * [[찐봉]] * [[소통제|민제]] == 둘러보기 == ||<-5><:><#002984> '''[[찐씨 정권|{{{#FFFFFF 정주의 역대 국왕}}}]]''' || ||<:>11대 충민왕 [[찐깐(11대)|정간]] || {{{+1 ←}}} ||<:><#002984> '''{{{#FFFFFF 12대 영왕 정종}}}''' || {{{+1 →}}} ||<:> 멸망 [br] [[찐레|정체]], [[찐봉|정봉]] || [각주] [[분류:베트남의 군주]][[분류:베트남의 자살한 인물]][[분류:1763년 출생]][[분류:1786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