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경찰공무원]][[분류:대한민국의 경찰공무원]][[분류:홍성군 출신 인물]][[분류:연안 차씨]][[분류:1920년 출생]][[분류:1958년 사망]][[분류:심장마비로 죽은 인물]][[분류:익사한 인물]][[분류:한밭대학교 출신]][[분류:보관문화훈장]][[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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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대한민국경찰참수리.svg|width=50]] [br] '''[[경찰공무원|{{{#fff 대한민국 경찰}}}]] [br]{{{+1 차일혁}}}[* 호적에는 차갑수, 족보에는 차용철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br]車一赫'''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img/img_link7/870/869501_1.jpg|width=100%]]}}} || ||<|2> '''출생''' ||<(> [[1920년]] [[8월 20일]][* 대한민국건국십년지에 의하면, 1918년 2월 17일에 출생하였다고 전한다.[[http://db.history.go.kr/item/level.do?levelId=im_110_20021|출처]]][* [[음력]] [[7월 7일]]]|| ||[[충청남도]] [[홍성군]][* 본적은 [[전라북도]] [[김제시]]] || ||<|2> '''사망''' ||<(> [[1958년]] [[8월 9일]] (향년 37세) || ||[[충청남도]] [[공주군]] 공주읍 금강 || ||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 || '''본관''' ||[[연안 차씨]]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부모''' ||아버지 [[차경석]] || || '''배우자''' ||진복희 || || '''자녀''' ||아들 차길진 || || '''서훈''' ||화랑무공훈장[br]충무무공훈장[br]대통령수장[br]종군기장[br]공비토벌기장[br]보관문화훈장 || || '''학력''' ||홍성공업전수학교[br][[황푸군관학교]] || || '''경력''' ||[[조선의용대]][br]반공유격대[br]전라북도경찰국[br]서남지구 전투경찰대[br]충주경찰서장[br]진해경찰서장[br]충청남도경찰국 경비과장[br]공주경찰서장 || || '''최종계급''' ||경무관[* 사후 추서, 생전 최종계급은 총경] || || '''주요 참전''' ||[[중일전쟁]][br][[6.25 전쟁]] ||}}}}}}}}}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독립운동가]], [[경찰공무원]]. == 생애 == 1920년 8월 20일(음력 7월 7일) [[충남]] [[홍성군]]에서 태어났다. [* [[보천교]]의 교주 월곡 [[차경석]]의 [[서자]] 내지는 [[사생아]]라는 설이 있다. 일단 족보상에는 [[차경석]]의 이름은 없고 정설은 아니다. [[차일혁]] [[경무관]]의 아들 차길진 [[법사]]는 위 설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보천교]]에 호의적인 글을 쓴 적이 있을뿐만 아니라 자기가 [[차경석]]의 [[환생]]이라고 주장하였다. 즉 몸으로는 [[차경석]]의 손자이나 영혼은 [[차경석]]본인이라는 것이다.] 본적은 [[전북]] [[김제시]].[* 아들 차길진이 쓴『[[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수기』에 의하면, 1920년에 지금의 [[전북]] [[김제]] [[금산]] 성계리에서 태어났다고 한다.[[http://www.babosarang.co.kr/product/product_detail.php?product_no=899534|출처]]] [[한밭대학교|홍성공업전수학교]][* 대전 [[한밭대학교]]의 전신으로, 1927년 5월 20일에 [[충남]] 홍성공립공업전수학교로 설립되었다. 이후 1935년에 [[대전광역시|대전]]으로 이전하면서 학교명을 대전공립공업전수학교로 고쳤다. 이때까지는 지금의 중·고등학교에 해당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1968년에 [[국립대학]]으로 이관하면서부터 대학으로 바뀐 듯하다.]에 재학 중이던 1936년에 [[조선]]인 교사를 연행하던 일본인 [[고등계]] [[형사]]를 폭행한 사건으로 처벌을 피하기 위해 17세의 나이에 [[중국]]으로 [[망명]]하여 중앙군관학교 황포분교 정치과를 졸업하였으며, 이후 [[조선의용대]]에 입대하여 1938년부터 1945년까지 '''[[팔로군]]'''과 함께 [[항일]] [[유격전]] 활동을 벌였다. 그래도 [[일제]]와 싸우기 위해서였지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는지 다른 [[팔로군]] 출신들과는 달리 [[북한]]이 아닌 [[남한]]으로 귀국한 [[차일혁]]은 [[경찰]]계에 투신하여 [[6.25 전쟁]] 당시 반공 [[유격대]]를 결성하여[* [[팔로군]] 출신으로 반공 인사가 되는 의외의 케이스가 아주 없지는 않다. 후일 법학자로 유명한 [[신상초]]의 경우도 [[학도병]] 탈영 →[[팔로군]] 활동의 길을 걸었지만 여생은 반공 인사로 살았다. 신상초는 특히 [[해방]] 후 [[팔로군]]을 탈주하여 귀국한 혐의로 [[북한]] 정권에 체포된 적도 있었다.] [[빨치산]] 토벌대장으로 반 [[공산당]]활동을 펼치다가 서남지구전투경찰대 2연대장에 보임[* 1953.05.15, [[경감]](임실경찰서장) → [[총경]]으로 진급 후 서남사 2연대장이 된다. 참고로 당시에는 [[경찰]]에 [[경정]] 계급이 없었다.]되어 [[호남]]의 [[빨치산]] 소탕 작전에 주력하였다. 그 결과 휴전 후인 1953년 9월, 당시 [[남부군]] 총사령관인 [[이현상]]을 사살하는 대공을 세웠다.[* [[국군]]에게 사살당한 [[이현상]]의 목만 잘라갔다거나, [[북한]]에서 처리한 걸 시체만 주워 왔다는 등 여러 설이 있다. [[차일혁]] 본인도 수기에서 [[이현상]]의 죽음에 대한 의문을 남기고 있다.] 그러나 [[차일혁]]은 무력으로 공격하기보다는 [[빨치산]]들을 감성적으로 설득하여 귀순시키는 방향을 택했고, 덕분에 많은 [[빨치산]]들이 [[차일혁]]의 인간적인 태도에 감화되어 순순히 전향하면서 목숨을 건졌다.[* [[6.25 전쟁]] 당시 [[빨치산]] 토벌전에서 [[경찰]]과 [[빨치산]] 간의 관계는 상호간에 인간으로 보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특히 양측의 포로 대우는 [[효수]] 내지 [[참수]]는 기본이고 인육 취식 등의 [[도시전설]]도 있을 정도였다. [[백선엽]] [[장군]]이 이끄는 정규군이 토벌에 참여하면서 [[빨치산]]에 대한 관대한 처우가 시작되었다고 할 정도였는데, [[차일혁]]은 [[경찰]]임에도 [[빨치산]]에 대해 대단히 관대한 방침을 고수했다.] 그리고 사살당한 [[이현상]]의 시신도 [[차일혁]]이 수습하여 화장한 뼈를 직접 철모에 넣고 [[M1 개런드|M1]] [[개머리판]]으로 빻은 유골을 [[하동]]의 소나무 숲에 뿌려 수목장시켜 줬다고 한다. 이 전공으로 인해 [[차일혁]]의 부대에 '''[[태극무공훈장]]'''이 세 개나 주어졌으나 정작 부대장인 [[차일혁]]은 한 개도 못받았다고 한다. 한창 교전 중인 1951년 5월, 상부에서 [[지리산]] 내의 사찰과 암자를 모두 소각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이는 녹음기 때 [[빨치산]]들이 은거할 만한 장소를 사전에 아예 없애 버리려는 작전이었다. 그러나 당시 [[구례군]]의 고찰 [[화엄사]] 일대를 작전 지역으로 맡고 있던 8사단 [[대대장]] 방득윤 [[중령]]은 천 년이 넘은 문화유산 화엄사를 불태운다는 것이 썩 내키지 않았고, 이에 같이 [[화엄사]] 지역을 방어하던 [[차일혁]]이 '''[[화엄사]] 내 [[대웅전]]을 포함한 건물의 문짝만 뜯어 불태우자'''는 묘책을 내놓았다. [[차일혁]]은 이 명령을 "[[빨치산]]들의 은신처를 없애고 관측과 사격을 용이하게 하자는 것"으로 이해하여 문짝만 뜯어내 소각해도 소기의 목적은 달성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이 의견에 방득윤 대대장도 찬성하여 [[화엄사]]는 문짝만 제외하고 전부 불타 없어지는 횡액을 피할 수 있었다. 그 외 [[화엄사]] 인근의 [[https://ko.wikipedia.org/wiki/천은사|천은사]], [[쌍계사]], [[선운사]] 등에 대한 사찰이나 문화재도 폭격이나 소각을 피하는 쪽을 택했고, 결국 차일혁은 명령 불이행으로 감봉 처분 등의 불이익을 받아야 했다.[* [[강원도]]에서 [[6.25 전쟁]]의 전화를 모면한 [[오대산]] [[상원사]]의 경우도 흡사한 [[https://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102902|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1951년 [[1.4 후퇴]] 당시 70세가 넘은 방한암 스님(1876~1951)이 홀로 절을 지키며, 절을 태우러 온 군인들에게 "당신은 [[장군]]의 부하요, 나는 [[부처님]]의 제자요. 나는 [[부처님]]을 따를 테니 당신은 장군을 따르시오."라고 했다. 이에 군인들은 그냥 법당의 문짝을 떼어 불사르고 떠났다고 하니 전국에 당시 비슷한 일화가 다수 있었던 것 같다. 방득윤은 전쟁 후 [[경찰]]로 전직하여 [[경무관]]까지 진급하고 [[경북]]와 [[강원]] 경찰국장을 지냈던 것으로 보아, [[총경]]에서 진급이 막힌 [[차일혁]]과 달리 큰 불이익은 받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 이때 친일반민족 행위를 저질렀던 [[이두황]]을 부관참시하고자 그의 묘를 파헤쳤으나, 일본식으로 화장해 뼛가루가 든 항아리만 있었기에 뼛가루를 내던져버리고 항아리는 깨부쉈다고 한다.] [[휴전]] 후 [[차일혁]]은 1954년 [[충주시|충주]] [[경찰서장]]으로 재직 중에 [[충주]] 직업 소년학교를 세워 지역의 불우한 [[청소년]]들에게 학업의 기회를 제공했고, 여러가지 지역 밀착적인 정책으로 주민들의 칭송을 받았다. 그러나 정작 [[높으신 분들]]에게 찍힐대로 찍혀 있던 [[차일혁]]은 [[일제 시대]] 그가 복무했던 [[조선의용대]]가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과 같이 활동한 부대였고, [[빨치산(조선인민유격대)|빨치산]] 토벌시 온정적인 작전을 펼쳤다는 사실을 빌미로 좌익 용공분자로 몰려 조사를 받은 적도 있었지만 이현상 사살 등 부인할 수 없는 공적을 감안하여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다. [[6.25]] 전후에 이런 혐의가 걸리면 중형을 받는 건 거의 떼놓은 당상이나 마찬가지였다. 여러 논란이 있지만 경찰 고위 간부였던 [[최능진]]이 처형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런저런 복합적인 요인으로 인하여 [[차일혁]]은 지방 [[경찰서장]] 등 한직만 떠돌게 되었고, [[공주시|공주]] [[경찰서장]]으로 재임 중이던 1958년 8월 9일에 가족과 함께 [[금강]]으로 피서를 갔다가 수영 도중 [[심장마비]]로 [[익사]]해서 불과 '''3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아들 차길진의 증언에 따르면 <볼가강의 노래>를 부르며 강으로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고, 19시간 뒤에 시체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평소 [[차일혁]]이 수영을 잘했다는 증언도 있기에 자살을 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가 토벌 작전 당시 사용하던 철모 같은 유품 일부가 경찰박물관에 있으며, [[https://www.hooam.com/ciy/|사이버 박물관]]도 있다. [[경찰인재개발원]]에는 그의 이름을 딴 '[[차일혁]]홀'이 마련되어 있다. == 사후 및 가족 == 차일혁은 [[2011년]]에 [[6.25 전쟁]] 때 공적을 인정받아 뒤늦게 [[총경]]에서 [[경무관]]으로 1계급 특진되었고, 화엄사 등 사찰과 [[문화재]]를 보존하는 데 힘쓴 공로로 [[조계종]](1958년)과 [[문화재청]](2008년)의 감사장을 받았으며, [[1998년]]에는 화엄사 경내에 그의 공적비가 세워졌다. [[2013년]] [[10월 16일]]에는 그의 유해가 [[국립대전현충원]] 경찰1묘역 502판-943호에 이장되었다. 아들 차길진[* 2019년 12월 3일에 편도암(뇌종양 전이 포함)으로 별세했다.]은 아버지 차일혁 경무관이 전쟁 중 [[불교]] 문화유산을 보호했던 인연으로 불교에 귀의한 뒤 [[법사]] 겸 생명 컨설턴트 ~~나쁘게 말하면 [[점쟁이]]~~로 일하면서 [[2014년]]까지 [[넥센 히어로즈]]의 [[구단주]] 대행을 역임하는 한편, 아버지를 기리는 일을 계속하였다. 또한 차길진의 아들, 즉 차일혁의 손자인 차현석은 연극 연출가로 할아버지의 일대기를 다룬 [[연극]]과 [[오페라]]를 만들어 무대에 올린 바 있다. 김성모 화백의 대본소 만화 [[빨치산]]이 바로 이 사람의 전기 [[만화]]라고 할 수 있다. ~~개나리 스텝으로 이현상을 개발살내는 차일혁.~~ 그저 그런 대본소 만화는 아니지만 극화된 면이 있고 어시스턴트의 솜씨가 많지만 김성모의 다른 괴작들에 비하면 나름 준수한 편인데, 그래서인지 오히려 묻힌 감이 있다. [[여명의 눈동자]]의 주인공인 장하림과도 비슷한데, 장하림이 학도병으로 끌려갔다가 탈출하여 [[OSS]]에서 복무한 부분은 [[장준하]]나 박순동[* 태백산맥에 나오는 조정래의 인척이다. 미얀마 전선 → 탈영 → OSS 복무나 지식인이라는 점에서 김범우의 모델이라 할 수 있는데, 김범우나 장하림과는 달리 해방 후 정치와 무관하게 살았다.]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2015년]] 6월에 차일혁을 비롯한 [[6.25 전쟁]]의 영웅을 기리는 [[기념우표]]가 발행되었다. [[http://stamp.epost.go.kr/board/board.jsp?id=spsg0101&site=&cate=&key=subject&search=&order=&desc=asc&syear=&smonth=&sdate=&eyear=&emonth=&edate=&deptcode=&menuID=spsg0101&pg=1&mode=view&idx=6345|우표 발행 안내 페이지]] == 여담 == * 생전 [[박정희]]와 친분이 많았다. 박정희가 육군 대학에 진학할 당시 집을 구하지 못하자 진해경찰서장이던 차일혁이 육군대학 총장 [[이종찬]]에게 도움을 청해 전세집을 잡게 해줬다고 한다. 또한 타 지역으로 전출한 이후에도 평소 친분이 있던 광복군 출신 장교인 [[박기성(독립운동가)|박기성]]에게 도움을 청해 박정희의 육군대학 생활에 도움을 줄 수 있도록 하였다. * 1991년 MBC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의 주인공 장하림([[박상원]]분)의 실제모델이다. == 서훈 내역 ==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차일혁은 [[빨치산]] 토벌전에서 세운 전공으로 '''무공훈장을 가장 많이 받은'''(6개!) 경찰관이기도 하다.[[https://www.whoim.kr/detail.php?number=59404&thread=54r03r02|#]] 비록 등급이 낮기는 하나, 숫자만 놓고 보면 심지어 [[백선엽]] 대장(5개[* 태극무공훈장(1등급) 2개, 을지무공훈장(2등급) 2개, 충무무공훈장(3등급) 1개])보다도 더 많이 받은 것이다. || 충무무공훈장(3등급) || 1회 || 1954년 6월 15일 || ||<|5> 화랑무공훈장(4등급) ||<|5> 5회 || 1952년 6월 25일 || || 1952년 8월 15일 || || 1952년 10월 20일 || || 1953년 3월 5일 || || 1953년 12월 29일 || || 대통령 수장 || 1회 || 1952년 11월 15일 || || 무공포장 || 1회 || 1952년 6월 25일 || || 6.25 종군기장 || || 1953년 6월 25일 || || 유엔종군기장 || || 1958년 8월 2일 || 이후 화엄사 등 지리산의 문화유적을 지킨 공로를 인정받아 2008년 10월 18일에는 보관[[문화훈장]](3등급)도 추서되었다. == 관련 문서 == * [[이현상]] * [[김영환(군인)|김영환]] * [[화엄사]]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