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창경궁)]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72000, #bf1400 20%, #bf1400 80%, #972000)" {{{#ffd400 '''창경궁 명정전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조선 왕궁의 정전)] ---- [include(틀:대한민국의 국보)] ---- }}} || ---- ||<-2> [[파일:정부상징.svg|width=28]] '''[[대한민국의 국보|{{{#f39100 대한민국 국보 제226호}}}]]''' || ||<-2> {{{#fff {{{+1 '''창경궁 명정전'''}}}[br]{{{-1 昌慶宮 明政殿}}}}}} || ||<-2>{{{#!wiki style="margin: -10px"; margin-top: -5px; margin-bottom: 16px" [include(틀:지도, 장소=창경궁 명정전, 너비=100%, 높이=100%)]}}}|| || '''{{{#fff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와룡동, [[창경궁]]) || || '''{{{#fff 분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궁궐·관아 / 궁궐 || || '''{{{#fff 수량/시설}}}''' || 1동 || || '''{{{#fff 지정연도}}}''' || 1985년 1월 8일 || || '''{{{#fff 제작시기}}}''' || [[조선]] [[광해군]] 8년(1616)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창경궁_명정전_전경.jpg|width=100%]]}}} || || {{{#gold ''' 명정전[* [[http://www.heritage.go.kr/heri/cul/imgHeritage.do?ccimId=6405705&ccbaKdcd=11&ccbaAsno=02260000&ccbaCtcd=11|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heritage.go.kr/img_joseon_wooden_32.jpg|width=100%]]}}} || || {{{#gold ''' 비교적 근거리에서 찍은 명정전 '''}}}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Q1lNXhzncJU)]}}} || || {{{#gold ''' 문화재청에서 제작한 3D 입체 영상. 문정전과 같이 소개한다. '''}}} || [clearfix] [목차] [clearfix] == 개요 == [[창경궁]]의 [[정전#s-6]].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리거나 국가 의식을 거행하는 곳이다. [[창경궁]]의 정문 [[창경궁 홍화문|홍화문]]으로 입궐했을 때 [[창경궁 옥천교|옥천교]]를 건너 [[창경궁 명정문|명정문]]을 통해 바로 정면에 보인다. == 역사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동궐도 명정전.png|width=100%]]}}} || || {{{#gold ''' 〈동궐도〉 명정전 '''}}} || 1483년([[자을산군|성종]] 14년) 옛날 [[태종(조선)|태종]]이 머물던 수강궁 자리에 [[대비]]들을 위해 [[창경궁]]을 창건할 때 함께 지었다. 이름은 창건 당시 의정부 좌찬성[* 議政府左贊成. 의정부에 속해 3의정(영의정, 우의정, 좌의정)을 보좌하는 직책. 오늘의 국회부의장 격이다.] [[서거정]]이 지었으며 상량문[* 새로 짓거나 고친 집의 내력이나 공사 과정, 일시 등을 적어둔 글.]은 [[승정원#S-3|우부승지]] [[김종직]]이 지었다. 다른 궁궐의 정전과는 다르게 남향이 아닌 동향으로, 이는 [[풍수지리]] 및 지형 문제에 근거해 배치한 것이다.[* 이는 [[창경궁]] 전체 축이 그렇다.] 이 때문에 [[성종(조선)|성종]]은 '임금은 남쪽을 바라보고 정치를 하는데 명정전은 동쪽이니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는 정전이 아니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그런지 명정전에서 열린 행사는 크게 중요한 국가행사보다는 규모가 비교적 작은 행사나 왕실의 잔치 등이었다. 명정전에서 즉위식을 거행한 왕은 [[인종(조선)|인종]]이 유일하다. [[창경궁]]에서 왕이 승하해도 [[창덕궁]]에서 즉위식을 올리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이다. 창경궁은 창덕궁에 비해서 정치적 기능보다 생활공간으로서의 기능이 컸던 탓이다. 1592년([[선조(조선)|선조]] 25년) [[임진왜란]] 당시 [[화재]]로 불탔고 1616년([[광해군]] 8년)에 중건한 뒤 오늘에 이른다. 즉, 명정전은 '''현존하는 궁궐 정전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따라서 [[17세기]] 초 조선 중기 [[목조]] [[건축]] [[양식]]을 연구하는데에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조선 후기에 명정전을 가장 알뜰살뜰 사용한 임금은 [[영조]]이다. 영조는 [[정성왕후]] 서씨가 승하하자 66세가 되던 1759년(영조 35년)에 15세의 [[정순왕후 김씨(조선)|정순왕후 김씨]]를 이곳 명정전에서 계비로 맞아들였다. [[일제강점기]]에 창경궁이 유흥 · 여가시설 [[창경원]]이 되면서 일제가 명정전 행각을 철거하고 박석을 걷어 [[벚나무]]를 심는 등 크게 훼손했다. [[8.15 광복]] 후인 1963년에 [[문화재청|문화재관리국]]에서 보수했고, 1983년 창경원이 창경궁으로 환원되면서 관련 시설을 [[서울대공원]]으로 옮긴 이후 복원, 수리 공사를 하여 1986년에 마무리했다. == 정문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창경궁 명정문)] == 구조 ==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창경궁_명정전_후면.jpg|width=100%]]}}} || || {{{#gold '''명정전 뒤편에 붙어있는 복도. 왼쪽 복도는 빈양문 및 숭문당과, 오른쪽 복도는 문정전과 붙어있다.[* [[http://www.heritage.go.kr/heri/cul/imgHeritage.do?ccimId=1611761&ccbaKdcd=11&ccbaAsno=02260000&ccbaCtcd=11|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 다른 궁궐의 정전에 비해 굉장히 규모가 작은 편이다. 애당초 [[창경궁]]이 임금이 정식으로 머물 궁으로 지은 게 아니라 [[창덕궁]]에 딸린 대비궁으로 지은 것이라 그렇다. 층도 단층에 터 크기 자체도 [[경복궁 근정전]], [[창덕궁 인정전]]보다 훨씬 작다. 또한 독립된 월대를 가진 다른 정전과 다르게 건물 뒤편에 바로 붙어있는 복도 1쌍만 지나면 바로 [[창경궁 문정전|문정전]], [[창경궁 숭문당|숭문당]], [[창경궁 빈양문|빈양문]] 등 다른 건물 영역으로 연결될 정도이다. * 석축기단 2단 위에 정면 5칸, 측면 3칸의 1층 전각[* 보통 전통 건축의 경우 1층보다는 단층(單層)으로 말한다.]이다. 양식적인 측면에서 볼 때 공포의 짜임새가 견실하고 쇠서[* 소의 혀란 뜻으로, 한식 목구조 공포에서 보 방향으로 첨차에 직교하여 거는, 끝을 [[소]]의 혀 모양으로 장식하여 오려낸 부재를 말한다. 첨차의 뜻은 후술.]의 곡선이 힘차고 예리한 점, 첨차[* 공포를 구성하는 나무 부재.]에 풀무늬를 새긴 수법이 세련된 점, 주춧돌에서 공포까지의 지지체(支持體)와 그 위에 얹은 지붕의 균형이 잘 조화된 점 등에서 조선 전기의 건축양식을 잘 계승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몇몇 학자들이 [[임진왜란]] 때 불타지 않은 것으로 추정한 적도 있으나 《[[조선왕조실록]]》의 기사와 1963년 합각머리 안쪽에서 발견된 묵서명(墨書銘)의 내용이 일치하여, [[광해군]] 때 재건한 것을 확인했다. * 외곽을 둘러싸는 16개의 일반 기둥[* 평주(平柱).]와 내부 전면(前面)에만 배치된 [[크고 아름다운|크고 --아름다운-- 높은]] 기둥 4개[* 고주(高柱).]로 형성되어 있다. 전면과 후면 어칸에는 꽃처럼 창살을 만든 사분합문, 좌우 협칸에는 삼분합문, 그리고 툇칸에는 이분합창이 설치되어 있고, 좌 · 우 툇칸 이분합창의 하부는 회색벽돌로 12단 쌓아 화방벽(火防壁)으로 조성했다.[* 이것은 [[창덕궁 인정전]]도 마찬가지였는데 [[순종(대한제국)|순종황제]]의 이어 이후 현재와 같은 머름으로 변했다.] 좌우 측면 중앙칸에는 삼분합문이 설치되었고, 좌·우 툇칸 이분합창의 하단은 정면을 후면과 마찬가지로 회색벽돌로 12단 쌓았다. 분합문과 창 상부에는 모두 광창[* 光窓. 어두운 실내를 밝혀주기 위하여 설치하는 창.]을 설치했으며, 내부 바닥에는 전돌을 깔았고, 내부 중앙 뒤에 어좌를 설치했다.[[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62617&cid=46656&categoryId=46656|출처.]]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창경궁_명정전_내부_어좌.jpg|width=100%]]}}} || || {{{#gold '''명정전 내부[* [[http://www.heritage.go.kr/heri/cul/imgHeritage.do?ccimId=6405701&ccbaKdcd=11&ccbaAsno=02260000&ccbaCtcd=11|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창경궁_명정전의_천장과_내부공포.jpg|width=100%]]}}} || || {{{#gold '''명정전 천장에 달린 봉황 조각[* [[http://www.heritage.go.kr/heri/cul/imgHeritage.do?ccimId=6400922&ccbaKdcd=11&ccbaAsno=02250000&ccbaCtcd=11|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 실내 [[천장]] 가운데에는 금박을 입힌 [[봉황]] 두 마리가 걸려있다. 아무래도 [[제후|제후국]]의 [[궁|대비궁]]으로 지은 것이다 보니 그런 듯하다. [[답도]]에도 봉황이 새겨져 있다. * [[8.15 광복]] 이후 명정전 조정 뜰에 품계석[* 品階石. 신하들이 서열에 맞게 서있을 위치를 나타내는 돌.]을 세워두었지만, 원래는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https://blog.naver.com/minsu977/221291301662|이 포스팅]]에 따르면, 품계석은 법궁의 권위를 상징하는 물건이었기 때문에 [[경복궁]], [[창덕궁]](경복궁 중건 이전 조선 후기 사실상 법궁), [[덕수궁|경운궁]](대한제국 광무 연간 법궁) 조정에만 세웠다는 것이다. 실제로 조선시대 [[창덕궁]]과 [[창경궁]]을 그린 〈[[동궐도]]〉와 〈동궐도형〉을 보면, [[창덕궁 인정전]] 뜰에는 품계석이 있지만 명정전 뜰에는 없다. 이밖의 다른 조선시대나 구한말에 제작한 자료에도 명정전 품계석은 보이지 않는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창경궁 명정문과 명정전의 축.png|width=100%]]}}} || || {{{#gold ''' 홍화문, 옥천교, 명정문, 명정전의 축 '''}}} || 동향을 하고 있는데 앞에 이어지는 [[창경궁 명정문|명정문]], [[창경궁 홍화문|홍화문]]과 일직선상으로 맞지 않는다. == 기타 == [[파일:직접 찍은 명정전 사진.jpg]] * 확실히 오래된 정전중 하나이긴 하나 그만큼 상태가 좋다고는 못한다. 윗 사진의 세살창문에 창호지가 구멍뚫리고 찢어질데로 찢어졌있고, 건물 전체는 삭을대로 삭았다고 한다. == 대중매체에서 == [[경복궁 근정전]]과 [[창덕궁 인정전]]에 비해 존재감이 약해서 거의 안 나온다고 봐야 할 수준이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2018-04-07 15-44-21.jpg|width=100%]]}}} || || {{{#gold ''' 명정전이 나오는 KBS2 《명성황후》의 한 장면 '''}}} || [[KBS2]] 《[[명성황후(드라마)|명성황후]]》에서 그나마 많이 등장했다. 이 드라마도 원래는 근정전에서 찍을 계획이었으나 당시 보수공사로 촬영이 불가능했기에 어쩔 수 없이 명정전에서 찍은 것이다. * 그리고 생뚱맞게도 '''[[후삼국시대]]를 다룬 드라마 《[[태조 왕건]]》'''에도 등장한다. 다름 아닌 [[신라]] [[왕궁]]이 나오는 장면을 여기서 찍었다. 《태조 왕건》 초반부 회차의 엔딩에도 당당하게 장소 협조에 이름을 올렸다. [각주] ----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경희궁 숭정전, version=61, paragraph=4, table2=창덕궁 인정전, version2=107, paragraph2=5)] [[분류:창경궁]][[분류:대한민국의 국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