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창경궁)] [include(틀:조선 왕궁의 동궁)] ---- ||<-3> [[파일:정부상징.svg|width=22]] '''[[대한민국의 사적#s-2|{{{#f39100 대한민국 사적 제123호 창경궁}}}]]''' || ||<-3> {{{#ffd700 {{{+1 '''창경궁 시민당'''}}}[br]{{{-1 昌慶宮 時敏堂}}}}}}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include(틀:지도,장소=창덕궁 낙선재, 너비=100%, 높이=100%)]}}} || ||<-2> {{{#ffd700 '''위치'''}}}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서울)|율곡로]] 99 ([[와룡동(종로구)|와룡동]])[br] ~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와룡동(종로구)|와룡동]]) || ||<-2> {{{#ffd700 '''건축시기'''}}} || [[1487년]] {{{-1 (창건)}}} [br][[1611년]] 이전 {{{-1 (중수)}}}[br] [[1780년]] {{{-1 (소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시민당 터로 추정되는 곳.png|width=100%]]}}} || || {{{#gold ''' 시민당 터 추정지[* 사진 출처 - 카카오맵.] '''}}} || [목차] [clearfix] == 개요 == [[창경궁]]의 [[동궁]]이다. [[왕세자]]의 [[공부방]]이자 공식 의례를 행하던 곳이었다. [[현재]]는 남아있지 않으며 정확한 [[위치]] 역시 알 수 없다. 다만 《[[동궐도]]》에 따르면, 지금의 [[창덕궁 낙선재|낙선재]] 권역에 있는 [[창덕궁 수강재|수강재]]의 동남쪽, [[창덕궁]]과 [[창경궁]]이 만나는 영역에 있었다. [[이름]] 시민(時敏)은 --[[시민|Citizen]]이 아니고-- ‘때(時)에 민첩(敏)하기를 힘쓴다’는 뜻으로, 《서경(書經)》의 열명(說命)[* 원래 [[발음]]은 ‘설’이나 이 때는 ‘열’로 읽는 것이 맞다.] 편에서 유래했다. 즉, [[세자]]가 배울 때를 놓치지 말고, 부지런하고 민첩하게 공부하기 바라는 마음을 담은 것이다.[[http://sillok.history.go.kr/id/ksa_12001017_001|#]][[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시민당(時敏堂)|#]] == 역사 == [[창덕궁]]을 세운 것은 1405년([[태종(조선)|태종]] 5년)이지만, 처음부터 [[동궁|세자궁]]을 마련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성종(조선)|성종]] 시기 [[원자(왕족)|원자]] [[연산군|이융]]이 [[태자|세자]]를 책봉한 후 창덕궁에 세자궁이 필요하자[* 당시 [[성종(조선)|성종]]은 [[창덕궁]]에 거주했다.], 1485년([[성종(조선)|성종]] 16년) 1월에 창덕궁의 동문인 [[창덕궁 건양문|건양문]] 밖에 [[동궁]]을 지었고 시민당도 이 때 건립했다. 창덕궁의 동궁으로 지었으나, 위치 때문에[* 위에 언급했듯, [[창덕궁]] 건양문 밖에 지었는데, [[창경궁]]이 생기면서 건양문 밖은 창경궁 영역이 된다.] 창경궁 영역으로 들어갔다. 1592년([[선조(조선)|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화재|불탔다.]] 이후 언제 다시 지었는 지 알 수 없으나 1611년([[광해군]] 3년)에 [[이지#s-7.1.2|왕세자]] [[결혼|가례]] 행사의 일부를 이 곳에서 했다는 기록을 볼 때, 그 이전에 재건한 듯 하다.[[http://sillok.history.go.kr/id/koa_10310025_002|#]] 이후 [[인조반정]]과 [[이괄의 난]] 등으로 창경궁이 불탔으나 시민당은 무사했다. [[병자호란]] 직후에는 잃어버린 [[세조(조선)|세조]]의 [[영정]]을 잠시 여기에 모셨고,[[http://sillok.history.go.kr/id/kpa_11502015_004|#]] [[인조]]가 [[임경업]]을 이 곳에서 직접 친국하기도 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pa_12406017_001|#]] 1647년([[인조]] 25) 8월에 당시 [[태자|세자]][* 여기서 말하는 [[세자]]는 [[소현세자]]가 아니라 봉림대군이었던 훗날의 [[효종(조선)|효종]]이다. 소현세자는 1년 전에 [[죽음|사망]].]가 머물던 임시 처소에 [[저주|흉물]]이 묻혀있다는 [[소문]]이 돌아 [[동궁]]의 처소인 [[창경궁 저승전|저승전]](...)을 다시 지었는데, 공사 중에 저승전 뿐 아니라 시민당 처마 아래의 섬돌에서도 흉물이 발견되어 [[궁]] 안이 발칵 뒤집히는 일이 있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pa_12603028_001|#]] 그리고 이 사건을 [[민회빈 강씨|강빈]] 옥사 관련사건으로 [[조작]]하기도 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pa_12603025_003|#]][* 당시 [[민회빈 강씨|강빈]]은 멸칭 ‘역강(逆姜, 역적 강씨)’으로 불렸다.] [[숙종(조선)|숙종]] 때는 복위된 [[단종(조선)|단종]] - [[정순왕후(조선 단종)|정순왕후]]와 [[민회빈 강씨]]의 신위를 이 곳에 잠시 모셨다. 숙종 말기에 당시 [[세자]]였던 [[경종(조선)|경종]]이 [[대리청정]]을 하면서 [[정사]]를 돌보고 [[조회]]를 여는 [[정당|정당(正堂)]]으로 활용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sa_14307025_004|#]] 숙종이 죽은 후에 숙종의 혼전[* [[왕]]과 [[왕비]]의 신위를 임시로 모시던 [[전각]].]을 [[창경궁 문정전|문정전]]으로 정하면서 문정전에 있던 [[인현왕후]]의 혼전을 여기로 옮겼다. [[경종(조선)|경종]]은 [[왕]]이 된 이후에도 이 곳에서 [[국사|나랏일]]을 보았고[[http://sillok.history.go.kr/id/kta_10204027_002|#]] 영조도 마찬가지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ua_10103006_005|#]] [[사도세자]] 역시 [[대리청정]]을 할 때, 이 곳에서 정무를 보았다.[[http://sillok.history.go.kr/id/kua_13406020_001|#]][* 하지만 [[질병]]을 핑계로 일을 안할 때가 훨씬 많았던데다, 그나마도 [[영조]]가 [[사도세자]]를 세워놓기만 하고 자기 맘대로 다 했기 때문에 실제로 정무를 본 적은 별로 없다.] [[임오화변|사도세자 사후]] [[황태손|세손]]이던 [[정조(조선)|정조]]는 [[경희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즉위 후 [[창덕궁]], [[창경궁]]으로 돌아왔지만 아직 [[세자]]가 없어 시민당은 비어있었다. 그러다 1780년(정조 4년)에 불탔다.[[http://sillok.history.go.kr/id/kva_10407013_001|#]] 바로 다시 지으려 했으나, 막 흉년을 벗어난 어려운 시기였기에 공사를 취소했고[[http://sillok.history.go.kr/id/kva_10408029_001|#]] 끝내 [[조선|조선왕조]]가 [[경술국치|멸망]]할 때까지 재건하지 못했다. 시민당 이후 [[창덕궁]], [[창경궁]]의 [[동궁]] [[정당]] 역할은 [[정조(조선)|정조]]가 [[문효세자]]를 위해 새로 지은 [[창덕궁 중희당|중희당]]이 대신했다. [[순종(대한제국)|순종]] 때 제작한 《동궐도형》을 보면 시민당 터에 [[창고]]가 있었다. 이마저도 [[일본 제국|일제]]가 철거했고, 지금은 [[나무]]가 빽빽이 들어선 [[숲]]이 들어섰다. == 구조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동궐도 시민당 일대.png|width=100%]]}}} || || {{{#gold ''' 《동궐도》 시민당 일대 '''}}} || [[순조]] 때 제작한 《[[동궐도]]》에서 터만 남아있는 시민당 유구를 확인할 수 있다. [[계단]]의 위치로 보아 동향을 하고 있고, 동쪽에서 바라볼 때 기준으로 ‘ 」 ’ 자 형태를 하고 있다. [[계단]]은 3개로 나누어져 있으며 [[건물]] 앞과 남쪽엔 넓은 월대가 있었고 남쪽 월대엔 [[덩쿨]] [[담|담장]]이 있었다. 그리고 서남쪽에(그러니까 건물 좌향을 기준으로 뒷 편에) [[사각형]] 모양의 [[연못]]이 있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시민당야대지도.jpg|width=10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시민당도.jpg|width=100%]]}}} || || {{{#gold ''' 《시민당야대지도》 '''}}} |||| {{{#gold ''' 《시민당도》 '''}}} || 1658년([[효종(조선)|효종]] 9년) 당시 세자시강원 찬선[* 세자시강원은 [[왕세자]]의 [[교육]]을 맡아보던 관청이며 찬선은 그에 속한 정3품 [[벼슬]]이다.] [[송시열]] 등이 야대[* [[왕]]이 밤 중에 [[신하]]를 불러 [[공부]]하는 비정규 [[경연]]. --[[야근]]이라니--]한 것을 기념하여 1663년에 그린 《시민당야대지도》와, 1670년([[현종(조선)|현종]] 11년) [[태자|왕세자]]였던 [[숙종(조선)|숙종]]의 [[관례]]를 거행할 때의 모습을 담은 《시민당도》를 보면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정면은 3칸이었다. 그러나 이 것만 가지고 건물 전체의 모습이 어땠는 지 가늠할 수 없다. == 부속 건물 == === 진수당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동궐도 진수당.png|width=10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동궐도형 진수당.png|width=100%]]}}} || || {{{#gold ''' 《동궐도》 진수당 '''}}} || {{{#gold ''' 《동궐도형》 진수당. '房'은 온돌방, '廳'은 마루방, '退'는 툇마루이다.[* 사진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디지털 장서각.] '''}}} || {{{+1 昌慶宮 進修堂}}} 시민당 영역에 있는 [[건물]]로 남향이었다. [[시민당]], [[창경궁 저승전|저승전]]과 같이 [[성종(조선)|성종]] 연간에 지었다. [[임진왜란]] 때 불탔으나 [[광해군]] 때 재건했고, 이후 [[임금]]과 [[세자]]가 [[신하]]들을 불러서 만나 [[정사]]와 관련한 이야기를 하는 용도로 주로 사용했다. 1728년(영조 4년) 11월에는 [[영조]]의 [[장남|큰아들]] [[효장세자]]가 이 곳에서 세상을 떠났다.[[http://sillok.history.go.kr/id/kua_10411016_001|#]] 《[[동궐도]]》와 《동궐도형》을 보면 정면 7칸, 측면 3칸의 총 21칸으로, [[지붕]]은 팔작 지붕이다. 남쪽 전면에 [[마루|퇴간]]이 7칸 있고 가운데 3칸은 [[대청]]이다. 그 뒤로 동, 서 양 쪽에 [[온돌|온돌방]]이 각각 있으며 온돌방은 대청 쪽으로 큰 [[방]] 하나와 쪽방 2개이다. 시민당과 달리 [[20세기]] 초반까지 남아있었으나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 장경각 === {{{+1 昌慶宮 藏經閣}}} [[책|서책]]을 보관하던 곳이다. 진수당 동쪽에 위치해있으며 서향이었다. 《[[동궐도]]》와 《동궐도형》을 보면 정면 3칸, 측면 1칸의 총 3칸으로, [[지붕]]은 맞배 지붕이었다. 시민당과 달리, 진수당과 마찬가지로 [[20세기]] 초반까지 남아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각주] ----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창경궁 저승전, version=35)] [[분류:창경궁]][[분류:조선 시대의 없어진 건축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