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창덕궁)] ---- ||<-3> [[파일:정부상징.svg|width=22]] '''[[대한민국의 사적#s-2|{{{#f39100 창덕궁}}}]]''' || ||<-3> {{{#ffd700 {{{+1 '''창덕궁 경훈각'''}}}[br]{{{-1 昌德宮 景薰閣}}}}}}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include(틀:지도,장소=경훈각, 너비=100%, 높이=100%)]}}} || ||<-2> {{{#ffd700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서울)|율곡로]] 99 ([[와룡동(종로구)|와룡동]] 2-71) || ||<-2> {{{#ffd700 '''건축시기'''}}} || [[1461년]] 이전 {{{-1 (창건)}}}[br][[1608년]] {{{-1 (중건)}}}[br][[1647년]] {{{-1 (중건)}}}[br][[1835년]] {{{-1 (중건)}}}[br][[1920년]] {{{-1 (중건)}}}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창덕궁 경훈각.png|width=100%]]}}} || || {{{#gold ''' 경훈각 '''}}} || [목차] [clearfix] == 개요 == [[창덕궁]]의 [[건물]]이다. 왕과 왕비의 침전인 [[창덕궁 대조전|대조전]]의 부속 침소이다. 위치는 [[창덕궁 대조전|대조전]]의 서북쪽에 있다. [[건물]] 정면 기준으로 동쪽 8번째 칸에 달린 [[복도]]로 대조전과 통한다. 현재는 1층이지만 원래는 2층 건물이었다. 여러 [[왕]]과 [[왕비]]들이 2층을 [[여름]]에 [[더위]]를 피하고 한가롭게 쉬는 장소로 많이 사용했다. == 역사 ==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다. 다만, 1461년([[세조(조선)|세조]] 7년) 12월에 1층을 광세전(光世殿), 2층을 징광루(澄光樓)[* 보통 [[한옥]]의 경우 1층보단 단층(單層), 2층보단 중층(重層)이라 표현한다.]로 정했다는 [[기사]]를 보아 그 이전에 지어진 것으로 추측되며, 1, 2층의 이름을 따로 정한 것을 보아 처음부터 2층으로 지었던 듯 하다. 초창기에는 동별실 응복정(凝福亭)과 서별실 옥화당(玉華堂)까지 둔, 나름 규모가 있던 별당이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ga_10712019_003|#]] 이후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08년([[광해군]] 원년)에 복구하였으나, [[인조반정]] 때 다시 [[화재]]를 입어 1647년([[인조]] 25년)에 [[인경궁]]의 [[정전]] 홍정전(弘政殿)을 옮겨 재건하였다. 이 때 홍정전 본채 골격이 많이 변하였다.[* 원래 보통 이렇게 전각을 옮긴 후엔 원래 용도와 비슷하게 사용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창덕궁]]엔 이미 [[창덕궁 인정전|인정전]]이 있었기 때문에 같은 용도로 사용할 수 없어 [[건물]]의 골격을 바꾼 뒤 다른 용도로 사용한 듯 하다.] [[순조]] 때 불탔고 1835년([[헌종(조선)|헌종]] 1년)에 다시 지었으나 [[일제강점기]]였던 1917년 11월에 또 화재를 입어 1920년에 복구하였다. 참고로 1920년에 다시 지을 땐 [[경복궁]] [[내전]] 일곽의 [[경복궁 만경전|만경전]] 건물을 헐어왔는데 그 때문에 [[조선시대]] 본래의 모습을 많이 잃어버렸다. == 구조 == === 조선시대 경훈각의 모습 ===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동궐도 경훈각.png|width=10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경훈각 의궤.png|width=100%]]}}} || || {{{#gold ''' 《동궐도》에서 묘사한 경훈각 '''}}} || {{{#gold ''' 《창덕궁영건도감의궤》에 실린 경훈각 '''}}} || 《[[동궐도]]》에 따르면, 정면 5칸, 측면 4칸의 1층으로 [[지붕]]은 팔작지붕에 중층이었고 [[청기와]]를 올렸다.[* 앞서 말했듯이 원래 [[인경궁]]의 [[정전]]이었기 때문.] 겹처마 [[양식]]으로 지었고, [[암석|장대석]]을 높게 쌓은 4단의 [[기단]] 위에 [[주춧돌]]을 놓은 다음 그 위에 네모난 [[기둥]]을 세운 뒤, 쇠서[* [[소]] [[혀]] 모양의 부재.] 2개에 이익공 [[공포]]를 놓고 공포 사이마다 장화반(長花盤)을 놓아 침전 건물 특유의 정갈하면서도 화려한 아름다움을 선보였다. 지붕의 합각마루와 추녀마루는 양성 바름을 하고 용두와 [[잡상]]으로 장식하였다. 5칸 중 가운데 칸은 [[건물]]을 드나들 수 있게끔 [[마루|툇마루]]를 밖으로 돌출시켰다. 마당에는 [[우물]]이 있어 언제든 마실 수 있게 하였다. 서쪽에는 부속건물인 옥화당과 영휘당을 두었는데 둘은 별도의 건물이 아니며, 한 건물을 두고 위치와 용도에 따라 구분한 것이다. * 실내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는 게 많지 않다. 다만 《동궐도형》을 보면 [[온돌|온돌방]] 하나와 [[대청]] 둘이 각각 정면 1칸, 측면 2칸의 규모로 있었고 남북으로 공간을 터서 넓게 활용할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방]]과 [[대청]]의 가장자리를 툇간이 감싸는 형태로 되어있었다. 그리고 서쪽 측면에 정면 1칸, 측면 4칸의 [[누]][[마루]]를 두었으며 누마루의 남쪽엔 정면 1칸, 측면 1칸의 창고를 3개 씩 놓았다. 누마루의 서쪽이 바로 경훈각의 부속건물인 영휘당과 옥화당인데 이 둘은 같은 건물로, 동쪽 방이 영휘당, 서쪽 방이 옥화당이다. 둘을 합쳐 볼 때 정면 6칸, 측면 2칸으로, 제일 서쪽의 정면 4칸, 측면 2칸은 [[방]]으로만 되어있고 툇간이 없으나 그 동쪽에 있는 정면 2칸의 마루와 정면 2칸의 온돌방 앞엔 툇간이 있었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조선 말기 창덕궁 경훈각.jpg|width=10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907 ~ 1917년 이전 창덕궁 경훈각과 징광루.png|width=100%]]}}} || || {{{#gold ''' 조선 말기 촬영한 경훈각과 징광루 '''}}} || {{{#gold ''' 일제강점기 순종이 살던 당시 경훈각과 징광루 '''}}} || [[조선시대]] 경훈각의 형태를 볼 수 있는 [[사진]]이 현재 두 장 남아있다. 왼쪽의 사진은 주변이 [[순종(대한제국)|순종]]이 [[창덕궁]]으로 [[이어]][* 移御. [[임금]]이 거처를 옮기는 것이다. 쉽게 말해 [[왕]]이 [[이사]]가는 것이다.]하기 전에 찍은 것이나 정확한 촬영일자는 불명이며, 오른쪽은 1912년 [[일제강점기]]에 촬영한 것이다. 두 사진이 얼핏 보기엔 비슷해 보이나 오른쪽 사진의 경훈각 내부를 보면, [[창문]]에 [[유리]]를 달았고, 내부에는 [[커튼]]까지 설치하였다. === 1920년 이후 재건 된 경훈각의 모습 === * 위에 언급했지만, [[경복궁]]의 [[경복궁 만경전|만경전]]을 옮겨 지으면서 원래 모습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우선 2층에서 1층으로 변했고, 정면이 5칸에서 9칸으로 늘어났다. 즉 층은 줄어들었으나 [[면적]] 자체는 늘어난 셈이다. [[공포]]는 이익공 [[양식]]에서 초익공으로, 그 중에서도 외부가 둥글게 처리 된 물익공 양식으로 변형되었고, [[처마|겹처마]]와 [[지붕|팔작지붕]]인 것은 그대로이나 [[기와]]의 색이 [[청기와|푸른 색]]에서 일반적인 회색 빛으로 바뀌었다. 또한 대청과 연결되는 출입문의 [[마루|툇마루]]가 돌출하였던 것을 실내로 들였는데 이는 만경전 본 모습과도 많이 다르다. 기단은 장대석을 3단 쌓았고, [[계단]]은 소맷돌 없이 그냥 돌을 4단 쌓았는데 맨 아랫단만 다른 단보다 높이가 낮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경훈각 화장실1.png|width=100%]]}}} || || {{{#gold ''' 경훈각 화장실 '''}}} || 뒤편 서쪽 4칸에 가퇴를 설치하여 공간을 최대한 넓게 활용할 수 있게 함과 동시에 바깥 [[바람]]을 좀 더 확실하게 막는 효과를 주었고 가퇴의 끝 부분엔 [[화장실]]을 설치하였다. 정확히는 [[매화틀]]을 받아내는 곳.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경훈각 대청.png|width=10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경훈각 온돌방.png|width=100%]]}}} || || {{{#gold ''' 경훈각 대청[* [[https://blog.naver.com/hanmun2014/22023015630|사진 출처.]]] '''}}} || {{{#gold ''' 경훈각 온돌방[* [[https://blog.naver.com/hanmun2014/22023015630|사진 출처.]]] '''}}} || 중앙의 정면 3칸, 측면 2칸을 [[대청]]으로, 그리고 대청을 중심으로 좌, 우에 각각 정면 2칸, 측면 2칸의 [[온돌|온돌방]]을 놓았은 뒤 대청을 [[거실]]로 삼았고 거실과 온돌의 바깥에 툇간을 달았다. 온돌방은 내부를 구분하지 않고 한 칸으로 터 보다 넓게 사용할 수 있게 했다. [[벽지]]는 [[무늬|문양]]이 그려진 능화지로 발랐고 천장엔 [[전등]] [[조명]]을 달았다. [[거실]]과 침실 사이에는 8짝의 불발기문[* 창호문의 위 아래를 [[벽지]]로 바르고, 그 한가운데에 교자창이나 완자창을 낸 [[문]].]을 달아 [[공간]]을 구분하였다. 이 밖에도 더 자세하게 보고 싶다면 [[https://blog.naver.com/hanmun2014/220230156300|이 포스팅을 참조.]] ==== 경훈각 벽화 ==== ||<-5>
[[파일:정부상징.svg|width=30&height=30]]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ffffff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 || || 243호 ||<|2> ← || '''244호''' ||<|2> → || 245호 || || [[창덕궁 대조전#s-4.2.1|창덕궁 대조전 백학도]] || '''창덕궁 경훈각 조일선관도''' || 창덕궁 경훈각 삼선관파도 || || 244호 ||<|2> ← || '''245호''' ||<|2> → || 246호 || || 창덕궁 경훈각 조일선관도 || '''창덕궁 경훈각 삼선관파도''' || [[공화춘#s-1.1|인천 선린동 공화춘]] || ---- ||<-3> [[파일:정부상징.svg|width=28]]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f39100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 }}}]]''' '''{{{#f39100 제244호}}}''' || ||<-3> {{{#fff {{{+1 '''창덕궁 경훈각 조일선관도'''}}}[br]{{{#fff {{{-1 昌德宮 景薰閣 朝日仙觀圖[br]Joil seongwando (Rising Sun) in Gyeonghungak Hall of Changdeokgung Palace}}}}}}}}} || ||<-3>{{{#!wiki style="margin: -10px"; margin-top: -5px; margin-bottom: 16px" [include(틀:지도, 장소=창덕궁, 너비=100%, 높이=100%)]}}}|| || '''{{{#fff 소재지}}}''' ||<-2>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서울)|율곡로]] 99 ([[와룡동(종로구)|와룡동]], [[창덕궁]]) || || '''{{{#fff 분류}}}''' ||<-2> 등록문화재 / 기타 / 동산(미술품) || || '''{{{#fff 수량 / 면적}}}''' ||<-2> 1점 || || '''{{{#fff 지정연도}}}''' ||<-2> [[2006년]] [[3월 2일]] || || '''{{{#fff 시대}}}''' ||<-2> [[1920년]] 경) || || '''{{{#fff 소유자[br](소유단체)}}}''' ||<-2>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창덕궁관리소 || || '''{{{#fff 관리자[br](관리단체)}}}''' ||<-2>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창덕궁관리소 || ||<-3> [[파일:정부상징.svg|width=28]]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f39100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 }}}]]''' '''{{{#f39100 제245호}}}''' || ||<-3> {{{#fff {{{+1 '''창덕궁 희정당 금강산만물초승경도'''}}}[br]{{{#fff {{{-1 昌德宮 熙政堂 金剛山萬物肖勝景圖[br]Geumgangsan manmul choseunggyeongdo (Picturesque Landscape of the Myriad Things on Geumgangsan Mountain) in Huijeongdang Hall of Changdeokgung Palace}}}}}}}}} || ||<-3>{{{#!wiki style="margin: -10px"; margin-top: -5px; margin-bottom: 16px" [include(틀:지도, 장소=창덕궁, 너비=100%, 높이=100%)]}}}|| || '''{{{#fff 소재지}}}''' ||<-2>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서울)|율곡로]] 99 ([[와룡동(종로구)|와룡동]], [[창덕궁]]) || || '''{{{#fff 분류}}}''' ||<-2> 등록문화재 / 기타 / 동산(미술품) || || '''{{{#fff 수량 / 면적}}}''' ||<-2> 1점 || || '''{{{#fff 지정연도}}}''' ||<-2> [[2006년]] [[3월 2일]] || || '''{{{#fff 시대}}}''' ||<-2> [[1920년]] 경) || || '''{{{#fff 소유자[br](소유단체)}}}''' ||<-2>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창덕궁관리소 || || '''{{{#fff 관리자[br](관리단체)}}}''' ||<-2>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창덕궁관리소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창덕궁 경훈각 조일선관도.jpg|width=1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창덕궁 경훈각 삼선관파도.jpg|width=100%]]}}} || || {{{#gold ''' 위는 《조일선관도(朝日仙觀圖)》, 아래는 《삼선관파도(三仙觀波圖)》이다.'''}}} || [clearfix] ---- 경훈각을 완공한 그 해 [[가을]]에 [[순종(대한제국)|순종]]이 [[거실]] 쪽 불발기문과 천장 사이 벽에 그림을 그리라고 명을 내렸다. 그래서 동편엔 《조일선관도(朝日仙觀圖)》가, 서편엔 《삼선관파도(三仙觀波圖)》가 각각 그려졌다. 둘 다 폭 5.26m, 높이 1.84m 크기로, 《조일선관도》는 노수현(盧壽鉉, 1899 ~ 1978)이, 그리고 《삼선관파도》는 [[이상범(화가)|이상범(李象範, 1897 ~ 1972)]]이 그렸다.[* 둘 다 [[한국]] 최초의 [[근대화|근대적]] [[미술]][[교육]][[기관]]인 경성서화미술원(京城書畵美術院) 출신이다.] 2006년 3월에 [[문화재청]]에서 《조일선관도》를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등록문화재]] 244호, 《삼선관파도》를 245호로 각각 지정했다. 원래 [[조선총독부]] 이왕직에서는 작업을 담당할 [[화가]]로 [[일본인]]을 투입하려고 했지만, [[순종(대한제국)|순종]]이 '''내전[* [[창덕궁 대조전]]과 희정당, [[창덕궁 경훈각|경훈각]].]의 그림만큼은 무조건 [[조선인]] 화가에게 맡기겠다'''며 반대했다. 그래서 [[1911년]]에 창설된 서화미술회[* 형식상이라지만 회장은 [[이완용]]이었다. 총무는 소호 김응원.]와 서화연구회 소속 조선인 화가들이 각각 대조전과 경훈각의 벽화 4폭, 희정당 벽화 2폭을 맡아 그렸다. 그런데 희정당 벽화 2폭을 맡은 서화연구회 소속 화가 김규진이 윤필료[* 제작비. 화가 한 사람당 1,500원 정도였다고 한다. 소설 [[상록수]]나 [[레디메이드 인생]]을 보면 당시 조선인을 평균 월급이 30~50원 수준이니 결코 적은 돈이 아니긴 하다.]를 챙길 속셈으로 '''희정당 벽화 작업을 독차지했다'''는 의심을 샀고, [[김은호]]는 "윤필료를 500원밖에 받지 못했다"며 '''제작을 거부하기도''' 했다. 이후에 어찌어찌 사태가 수습돼서 서화미술회에서 중진화가 강필주와 [[고희동]] 대신 강습소 출신의 당시로써는 신진 화가였던 이상범과 김은호, 노수현, 이용우, 오일영 등 5명 그리고 해강 김규진까지 총 6명에게 벽화를 맡기기로 결론이 났다. == 여담 == * [[효종(조선)|효종]]의 [[부마]]인 정재륜[* [[숙정공주]]의 남편. [[영의정]] [[정태화]]의 5남으로 작은 아버지인 정치화에게 양자로 들어갔다.]이 저술한 《공사견문록》에 나온 이야기이다. 1659년([[효종(조선)|효종]] 10년) 4월, 당시 [[세자]]였던 [[현종(조선)|현종]]이 [[말라리아|학질(말라리아)]]에 걸렸는데 아무리 [[침]]과 [[약]]을 많이 써 봐도 낫질 않았다. 이에 깜짝 놀라게 하면 학질을 뗄 수 있다는 속설을 따라 [[세자]]를 경훈각 마당에 세우고, 2층 징광루에 올라가 [[기와|질기와]]를 내던져 깨뜨린 뒤, "[[궁녀]] 아무개가 누각에서 낙사했다."고 일제히 외치게 하였다. 그러자 궁중에 난리가 났으며, 이를 본 늙은 [[궁녀]] [[김씨]]가 의미심장한 말을 하였다. >"나는 4대 [[조정]][* [[선조(조선)|선조]] 때부터 궁중 생활을 했을 것이다. [[정묘호란]]이나 [[병자호란]]은 물론 [[임진왜란]]이나 [[정유재란]] 같은 국가의 대사건도 경험하고(직접 겪지 못했어도 주변에 당사자가 많았을 것이다) 궁중에서도 이런 저런 일을 많이 겪은 잔뼈가 굵은 베테랑이었을 것이다.]을 받들었다. 궁중에 일이 있더라도 마땅히 조용히 진정시킬 것인데 이제 일도 없이 일부러 일이 일어난 것처럼 하였으니, 상서롭지 못한 징조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그런데 실제로 얼마 지나지 않아 불행한 일이 일어났다]]. 이로부터 한 달 뒤인 5월에 [[효종(조선)|효종]]이 [[죽음|세상을 떠난 것이다.]] * [[숙종(조선)|숙종]]은 《영경훈각시(詠景薰閣詩)》라는 [[시]]를 지어 경훈각을 [[노래]]했다. 징광루 아래서 [[더위]]를 피하니 [[부채|부채질]]도 필요없고 편안히 좋은 [[그림]]을 감상할 수 있다고 하였다. [각주] ----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효종(조선), version=313, title2=창덕궁 대조전, version2=75)] [[분류:창덕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