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창덕궁]] [include(틀:창덕궁)] ---- ||<-3> [[파일:정부상징.svg|width=22]] '''[[대한민국의 사적#s-2|{{{#f39100 대한민국 사적 제122호 창덕궁}}}]]''' || ||<-3> {{{#ffd700 {{{+1 '''창덕궁 서향각'''}}}[br]{{{-1 昌德宮 書香閣}}}}}}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include(틀:지도,장소=서향각, 너비=100%, 높이=100%)]}}} || ||<-2> {{{#ffd700 '''위치'''}}}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서울)|율곡로]] 99 ([[와룡동(종로구)|와룡동]] 2-71번지) || ||<-2> {{{#ffd700 '''건축시기'''}}} || [[1776년]] {{{-1 (창건)}}}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서향각.png|width=100%]]}}} || || {{{#gold ''' 서향각[* [[https://www.cha.go.kr/newsBbz/selectNewsBbzView.do?newsItemId=155703083§ionId=b_sec_1&mn=NS_01_02|사진 출처 - 문화재청.]]] '''}}}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D-MblA1_F10)]}}} || || {{{#gold ''' 문화재청에서 제작한 3D 입체 영상.[br]주합루, 희우정, 사정기비각, 천석정과 같이 소개한다. '''}}} || [목차] [clearfix] == 개요 == [[창덕궁 주합루]] 서쪽에 있는 건물이다. 동쪽을 향해 서 있다. 현재 일반 관람객의 출입은 막혀있다. == 이름과 현판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서향각 현판.png|width=100%]]}}} || || {{{#gold ''' 서향각 현판. 맨 위 현판 글씨가 '서향각(書香閣)'이고,[br]중간 현판의 글씨가 '친잠권민'(親蠶勸民)'이다.[* [[http://m.cha.go.kr/cop/bbs/selectBoardArticle.do;jsessionid=jEoc199UvtVuXCm6zr1aWX86cFMc2Vaso1fMuNqeciQC5ydsU7KQTElpbBlVe53s.cha-was01_servlet_engine2?nttId=3831&bbsId=BBSMSTR_1006&pageUnit=10&searchCnd=&searchWrd=&ctgryLrcls=&ctgryMdcls=&ctgrySmcls=&ntcStartDt=&ntcEndDt=&searchUseYn=&mn=|사진 출처 - 문화재청 《궁궐의 현판과 주련 - 창덕궁》: 〈주합루 권역 2〉.]]] '''}}} || 이름은 '책(書) 향기(香)가 난다'는 뜻으로 주합루와 같은 시기에 지었다. [[현판]] 글씨는 [[정조(조선)|정조]] 때 서사관(書寫官) 조윤형(曺允亨)이 썼다. 초기에는 [[신주]]나 [[영정]] 등을 옮겨 모신다는 뜻인 이안각(移安閣)으로 불리기도 했다. 후술하겠지만, [[순종(대한제국)|순종]]이 [[창덕궁]]에 살 때에는 [[순정효황후]]가 이곳을 양잠소로 사용했다. 그래서 그때 설치한 '친잠권민'(親蠶勸民, 왕실에서 친히 누에를 치는 것은 백성들에게도 권해야 한다)이라는 게판과 서향각 기둥에 붙은 '어친잠실(御親蠶室, 왕비가 친히 누에를 치는 방)'이란 주련이 같이 걸려 있다. == 역사 == 1776년(정조 즉위년)에 [[정조(조선)|정조]]가 후원에 [[창덕궁 주합루|주합루]]를 세우면서 같이 지었다. 원래는 서책, [[그림]] 등을 보관하면서 각종 [[도서]], [[어진]]과 어필 등을 말리던 포쇄소였다. 포쇄란, 좀 스는 것과 습기가 스며 망실되는 것을 막고자 햇볕에 내어놓고 말리는 것을 의미한다. 이 곳에서 [[신하]]들이 모여 [[임금]]과 [[토론]]하거나, [[어진]]을 그리고 보관하는 용도로 사용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순정효황후 친잠례.png|width=100%]]}}} || || {{{#gold ''' 서향각에서 친잠례[* 왕비가 직접 누에를 치고 고치를 거두던 의례.]를 한 후 기념촬영을 한 순정효황후 및 참석자들'''}}} || [[일제강점기]]에는 양잠소[* [[비단]]을 만들기 위해 [[누에]]를 치는 곳.]가 되면서 [[순정효황후]]가 이 곳에서 양잠[* [[누에]] 치기.]했다. 그래서 한동안 [[창덕궁]]을 안내할 때 양잠소로 언급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서향각 본래 기능으로 소개한다. == 구조 == * 정면 8칸, 측면 3칸의 총 24칸으로 [[지붕]]은 팔작지붕, [[처마]]는 겹처마, [[공포]]는 초익공 양식이다. 용마루와 추녀마루, 내림마루는 전부 [[기와]]로 마감했고 [[용두]]와 취두를 두었으나 [[잡상]]은 두지 않았다. 정면 기준 출입하는 칸을 제외하고는 창과 툇마루 앞에 전부 난간을 설치했다. 측면의 외부는 [[창문]]의 높이를 짧게 한 다음 머름을 두고 그 밑을 [[벽돌]]로 마감했으며 측면 가운데 칸의 경우, 머름 밑에 교창을 두고 그 아래를 벽돌로 마감했다. * 〈동궐도형〉을 보면 정면을 기준으로, 왼쪽부터 [[마루|누마루]] 1칸, [[온돌|온돌방]] 2칸, 대청 2칸, 온돌방 2칸, 그리고 다시 누마루 1칸으로 되어있다. 앞면과 뒷면은 툇마루로 꾸몄으며 누마루가 있는 칸의 앞면과 뒷면에는 툇마루를 두지 않고 누마루로 구성했는데 누마루의 밑은 일반적인 경우와 달리 공간을 비워두지 않고 [[벽돌]]로 마감했다. [[창호]]는, 건물 외벽의 창의 경우 정(井)자 살로, [[건물]]로 들어가는 출입문은 띠살로 만들었다. == 여담 == *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창덕궁관리소에서 2021년 4월 28일부터 5월 8일까지 〈후원에서 만나는 한 권의 책〉 행사를 개최했다. 이때 그동안 일반인들의 관람이 제한됐던 서향각, 희우정, 천석정의 실내를 한시적으로 개방해 시민들이 책을 읽을 수 있게 했다. 매주 수요일부터 토요일까지 1일 2회 운영했으며 티켓[[11번가]]에서 예매를 해야 했다. 참가비는 후원 입장료를 포함한 15000원이었다.[[http://biz.khan.co.kr/khan_art_view.html?artid=202104301516001&code=900370&utm_campaign=rss_btn_click&utm_source=khan_rss&utm_medium=rss&utm_content=total_news|#]] 2021년 11월 14일부터 17일까지는 하루에 2번 예약자들에 한해 주합루, 서향각, 희우정, 천석정을 개방했고 특히 서향각은 내부까지 공개했다. [[독서]]의 계절인 [[가을]]을 맞아 서향각 이름 뜻 그대로 책 향기를 사람들과 나눈다는 의미였다.[[https://go.seoul.co.kr/news/newsView.php?id=20211115011035&wlog_tag3=daum#csidxb2b768a7870bc45975e455ceb0c6247|#]][[https://www.news1.kr/photos/view/?5069546|#]] [각주] ----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창덕궁 주합루, version=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