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창덕궁)] ---- ||<-3> [[파일:정부상징.svg|width=22]] '''[[대한민국의 사적#s-2|{{{#f39100 대한민국 사적 제122호 창덕궁}}}]]''' || ||<-3> {{{#ffd700 {{{+1 '''창덕궁 폄우사'''}}}[br]{{{-1 昌德宮 砭愚榭}}}}}}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include(틀:지도,장소=창덕궁 폄우사, 너비=100%, 높이=100%)]}}} || ||<-2> {{{#ffd700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서울)|율곡로]] 99 ([[와룡동(종로구)|와룡동]] 2-71번지) || ||<-2> {{{#ffd700 '''건축시기'''}}} || [[1827년]] ~ [[1830년]] 이전 {{{-1 (창건)}}}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ddmz.co.kr/13431884374132.jpg|width=100%]]}}} || || {{{#gold ''' 폄우사 '''}}}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gJ3hp72gHa4)]}}} || || {{{#gold ''' 문화재청에서 제작한 3D 영상. 존덕정, 관람정, 승재정과 같이 소개한다. '''}}} || [목차] == 개요 == [[창덕궁#s-5.4.5|창덕궁 후원 관람지 권역]]의 [[정자]]이다. [[창덕궁 존덕정|존덕정]]의 서쪽에 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창덕궁_후원권역_관람지.jpg|width=100%]]}}} || || {{{#gold ''' 관람지 권역. 왼쪽부터 폄우사, 존덕정, 관람정, 승재정이다.[* [[https://www.heritage.go.kr/heri/cul/imgHeritage.do?ccimId=6413888&ccbaKdcd=13&ccbaAsno=01220000&ccbaCtcd=11|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 이름 == '폄우(砭愚)' 뜻은 '어리석음(愚)에 돌침을 놓아 깨우치게 한다(砭)'이다. '왕이 스스로 어리석음을 깨우쳐 마음을 다잡으라'는 뜻이다. [[http://www.cha.go.kr/newsBbz/selectNewsBbzView.do;jsessionid=JinGc946Q1nSp01RIikfH3LbQWi1olFSGe75sY1gn1t58jtD4wFoZNTl5cyzcjHy.cha-was02_servlet_engine1?newsItemId=155696064§ionId=ocp&pageIndex=11&mn=NS_01_02&strWhere=&strValue=&sdate=&edate=|#]] 특이하게 [[건물]] 이름이 일반적으로 붙는 '전(殿)', '당(堂)', '합(閤)', '각(閣)', '재(齋)', '헌(軒)', '누(樓)', '정(亭)'이 아닌 '사(榭)'로 끝난다. '사(榭)'는 '높은 터에 지은 [[정자]]'란 뜻이다. 현재 남아있는 [[궁궐]] [[전각]] 중 '사(榭)'를 사용하는 [[건물]]은 폄우사가 유일하다. 현재 [[현판]]은 1903년([[광무]] 7년)에 창덕궁 후원의 감독직을 맡았던 [[김가진|동농 김가진]]이 썼다. == 역사 == 언제 지었는지 모른다. 다만, 1828년(순조 28년) ~ 1830년(순조 30년) 사이에 그린 《[[동궐도]]》에서 보이므로, 그 이전에 지은 듯 하다. 이후 몇 번의 변형을 거쳐 오늘에 이른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옛날 폄우사.png|width=100%]]}}} || || {{{#gold ''' 왼쪽은 《동궐도》의 폄우사(붉은 원 안), 오른쪽은 《조선고적도보》의 폄우사 '''}}} || == 구조 == * 1층[* 보통 [[전통]] [[건축]]에선 단층이라고 표현한다.] [[목조]] [[건물]]로 남향(南向)이다. 정면 3칸, 측면 1칸, 총 3칸이다. * '一' 자형 건물이다. 《[[동궐도]]》를 보면, 폄우사 서남쪽으로 3칸짜리 건물이 있었고 담으로 폄우사와 붙어있어 '「' 자 형태를 이루었으나 지금은 폄우사만 남았다. [[순종(대한제국)|순종]] 때인 1908년([[융희]] 2년)에 만든 《동궐도형》에는 현재와 같은 모습인 것을 보아 그 이전에 바뀐 듯하다. * 한 단의 장대석 [[기단]] 위에 [[주춧돌]]을 올리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다. 기단의 윗에는 전돌을 깔았다. [[기둥]]과 주춧돌은 사각이다. *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양쪽 박공에 풍판을 달았다. [[처마]]는 홑처마로, 용마루와 추녀마루는 [[기와]]로 마감했다. [[공포(동음이의어)#s-2|공포]]는 초익공 양식이며 창방과 장여 사이에 소로를 얹었다. [[단청]]은 모로단청으로 칠했다. * [[현판]]은 동쪽 끝 칸 남면 도리에 걸려있다. 흰 [[바탕]]에 검은 [[글씨]]이다. * 정면(남면) 앞에는 쪽마루가 덧대어있고, 쪽마루 밑에는 나무기둥과 [[주춧돌]]이 있다. 서쪽부터 2칸은 [[온돌|온돌방]]이고, 동쪽 끝의 1칸은 [[대청]]이다. 그런데 현재는 온돌방 바닥에 [[마루]]가 깔려있다. 나중에 마루방으로 개조한 듯 하나 바뀐 시기는 알 수 없다. * 벽면의 모습은 칸마다 다르다. 제일 서쪽 끝 칸의 벽면의 형태가 특이하다. 칸 안에 샛기둥을 두고 그 양 옆의 모양을 다르게 했다. 샛기둥 서쪽 면은 전부 벽이지만, 동쪽 면은 문상방과 문선을 설치한 뒤 문선 안에 창을 두고 나머지는 [[벽]]으로 마감한 형태이다. 가운데 칸의 벽면 역시 서쪽 칸 샛기둥 동쪽 면과 같으나 벽면 전체에 대칭으로 만든 점이 다르다. 두 칸 남면 벽면의 하단부에는 머름을 두었다.[br][br][[대청]] 칸의 남면과 동면은 벽과 문이 없이 트여있으며 [[난간]]을 둘렀다. 난간은 풍혈을 뚫은 궁판 위에 하엽동자 모양의 난간기둥과 돌란대를 둔 모습이다. 단, 남면 난간의 경우는 사람이 출입할 수 있게 [[기둥]] 양 옆에 짧게 설치했다. [br][br]정면(남면)과 뒷면(북면)의 모습 역시 다르다. 가운데 칸의 경우는 정면과 뒷면의 모습이 같으나, 서쪽 끝 칸의 뒷면은 가운데에 샛기둥과 중인방을 '十' 자 모양으로 둔 뒤, 부재 사이를 전부 [[벽]]으로 마감한 형태이며 하단부에 머름도 없다. 동쪽 끝 [[대청]] 칸 뒷면은 가운데 칸 벽면과 같은 모습이다. 서쪽 측면은 중인방을 설치한 뒤 그 위에 문선과 창, 벽을 두고, 중인방 아래에는 벽과 붉은 [[나무]] [[판]][[문]]을 둔 형태이다. * 실내 [[천장]]은 구조가 다 보이는 연등천장이다. 일반적으로 온돌방에는 [[벽지]]를 바르는데 폄우사 [[온돌|온돌방]]에는 바르지 않았다. 원래부터 그런 건지 아니면 나중에 마루방으로 개조하면서 뜯어낸 건지는 알 수 없다. 온돌방과 대청 사이에는 분합문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폄우사 돌판.png|width=100%]]}}} || || {{{#gold ''' 폄우사 돌판 '''}}} || 폄우사에서 [[창덕궁 존덕정|존덕정]]으로 가는 길에 [[화강암]]으로 만든 돌판이 14개 깔려있다. 이 돌들을 밟으며 걸으면 저절로 [[팔자걸음]]을 지게 된다. * >南苑草芳眠錦雉 (남원초방면금치) >남쪽 동산에 꽃다운 풀에 아름다운 꿩이 졸고 > >夾城雲偄下霓旄 (협성운난하예모) >협성(夾城)에 구름 따뜻하니 무지개가 내려오네 > >絶壁過雲開錦繡 (절벽과운개금수) >절벽에 구름이 지나가니 수 놓은 비단이 펼쳐지고 > >踈松隔水奏笙簧 (소송격수주생황) >성긴 솔 물 건너 편에서 생황을 연주하네 > >林下水聲喧笑語(임하수성훤소어) >숲 속 아래 물 소리는 웃음 소리인 양 떠들썩하고 > >巖間樹色隱房櫳 (암간수색은방롱) >바위 사이 나무 빛깔은 방 창살을 숨기고 있네 > >畵閣條風初拂柳 (화각조풍초불류) >그림같은 누각에 한 줄기 바람은 버들을 막 스치고 > >銀塘曲水半含苔 (은당곡수반함태) >은빛 연못 물굽이에는 이끼 반쯤 머금었네 > >[[http://www.cha.go.kr/newsBbz/selectNewsBbzView.do;jsessionid=JinGc946Q1nSp01RIikfH3LbQWi1olFSGe75sY1gn1t58jtD4wFoZNTl5cyzcjHy.cha-was02_servlet_engine1?newsItemId=155696064§ionId=ocp&pageIndex=11&mn=NS_01_02&strWhere=&strValue=&sdate=&edate=|#]] >---- >폄우사 주련 시 정면과 동면, 뒷면 [[기둥]]에 주련을 걸었다. 주련에는 위에 있는 [[시]]를 적어놓았다. == 여담 == * [[정조(조선)|정조]]가 폄우사에서 사계절을 주제로 지은 [[시]] 《폄우사사영(砭愚榭 四詠)》을 지었다. 그의 손자 [[효명세자]]도 폄우사를 자주 찾아 [[독서]]하고 쉬는 공간으로 활용했다.[[https://ncms.nculture.org/pavilion/story/2458|#]] *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KoZxoTyr61k)]}}} || || {{{#gold ''' 〈창덕궁 달빛기행〉 영상 '''}}} || 〈창덕궁 달빛기행〉 코스 중 한 곳이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pv2JmEsjpE0)]}}} || || {{{#gold ''' 문화재청에서 제작한 '창덕궁 후원에서 만나는 한권의 책' 행사 홍보 영상.[br]시기는 2016년 가을이다. '''}}} || 2010년부터 [[문화재청]]에서 매년 [[봄]]과 [[가을]]에 여는 '창덕궁 후원에서 만나는 한권의 책' 행사 장소로 사용한다. 정자 내부에 책을 비치해두어 [[시민]]들이 후원의 경치를 보며 [[독서]]할 수 있게 한다.[* [[창덕궁 영화당|영화당]], [[창덕궁 존덕정|존덕정]], [[창덕궁 취규정|취규정]]도 장소로 활용한다.] 행사 기간은 일정하지 않으나 대략 4월 중순 ~ 5월 중순(봄), 10월 중순 ~ 11월 중순(가을)이다. 창덕궁 후원 입장료만 내면 별도로 들어가는 [[돈]]은 없다. 2020년에는 [[SARS-CoV-2|코로나 19]] 사태로 진행하지 않았다. [각주] ----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창덕궁 존덕정, version=5, paragraph=6)] [[분류:창덕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