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고려의 대외 전쟁)] ||<-3><#C0C0FF><:> {{{+1 '''처인성 전투[br]處仁城 戰鬪'''}}} || ||<:><#C0C0FF> '''시기''' ||<-2>1232년([[고종(고려)|고종]] 20년) 12월 16일 |||| ||<:><#C0C0FF> '''장소''' ||<-2><:>[include(틀:지도, 장소=처인성, 높이=224px, 너비=100%)][br][[고려]], 처인성 [br]현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읍]] |||| ||<:><#C0C0FF> '''원인''' ||<-2>몽골의 2차 침입 || ||<#C0C0FF> '''교전국''' ||[[파일:고려 의장기.svg|width=30]] {{{+1 고려}}} ||{{{+1 몽골 제국}}} || ||<:><#C0C0FF> '''지휘관''' ||[[김윤후]] ||[[살리타이]][[전사|†]] || ||<#C0C0FF><:> '''병력''' ||1,100여 명[* 각 고을에 피난 온 군민 1,000여 명 + [[승병]] 100여 명.] ||병력 규모 불명 || ||<#C0C0FF><:> '''피해''' ||피해 규모 불명 ||[[살리타이|최고 지휘관]] 전사 || ||<:><#C0C0FF> '''결과''' ||<-2>모든 전역(戰域)에서 몽골군 전면 철수. || ||<:><#C0C0FF> '''영향''' ||<-2>'''몽골의 2차 침입 저지.''' || [목차] [clearfix] == 개요 == [[파일:external/hawkebackpacking.com/south_korea_seoul_war_memorial_07.jpg|width=700]] ▲처인성 전투의 상상화[* [[전쟁기념관]] 소장. 그림 왼쪽에 있는 승장(僧將) [[김윤후]]의 활을 쏘는 모습이 인상적이라 그런지 [[국사]] 교과서 등에 이 사진이 올라오면 매우 높은 확률로 [[교과서 낙서]]의 희생양이 된다(...)][* 상상화라 상식적으로 저지를 이유가 없는 장면이 들어가있는데, 바로 [[몽골군]] 기병들이 [[맨땅에 헤딩|말을 타고 전속력으로 토성에 돌진하는 중]]이라는 것(...).][* 사실 몽골 기병은 상상을 초월하는 기마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추후 김윤후와 재대결하는 충주성 전투에서도 성벽 아래 나무와 풀 등으로 디딤대를 쌓아 성벽 위로 말을 탄 채 뛰어올라서 성벽을 제압하려고 시도했으나 충주성 측에서 바로 불을 던져버려서 무위로 돌아간 적이 있다. 따라서 저 그림에 묘사된 대로라면 처인성 정도의 작고 완만한 외부경사를 지닌 성 정도는 몽골 기병에게 전혀 어렵지 않다. 하지만 문제는 현실에서는 저 성벽 위에 목책 같은 것이 꽤 높이 올라가 있었을 가능성이 거의 100퍼센트라는 것.] 제2차 여몽전쟁의 전투 가운데 하나로, 처인부곡(현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에서 고려의 [[승병|승장]] 김윤후가 살리타이를 저격해 사살한 뒤 몽골군을 대파시킨 전투이다.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군인이 아니라 지역 주민들을 주축으로 몽골군을 상대하여 성공적인 방어전을 수행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여몽전쟁의 가장 주요한 승리 중 하나이다. == 배경 == 1232년 8월. [[몽골 제국]]의 대대적인 2차 침략이 시작되었다. [[살리타이]]가 이끄는 몽골군은 [[서경(고려)|서경]]을 [[홍복원]]의 도움으로 무난히 함락시킨 후 같은 해 10월, [[개경]]에 도달하게 된다. 하지만 이미 [[고종(고려)|고종]]은 정부를 [[강화도]]로 이전한 상황. [[살리타이]]는 [[강화도]]를 건너서 공격할까를 고민하다[* 이때 포로로 잡힌 태주(현재의 [[평안북도]] [[태천군]])사람이었던 변여를 고문해서 해로를 알려고 했지만, 그는 끝내 모른다고 주장하였고 결국 사망했다.] 결국 배를 모조리 불태워 버리고 [[고려]] 전체를 불태워 버려 고려 정부, 아니 고려 왕이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기 위해 남하를 시작했다. 1,000여 명의 별동대가 방화와 약탈을 일삼으며 빠른 속도로 남하를 진행하고 있었고[* 이때 [[충청도]]와 [[대구광역시]]를 지나 [[부인사]]를 불태워 버렸고 그때 [[초조대장경]]이 불타 없어지게 되었다. 이때 대구에서도 [[승려]]와 일반 백성들이 결사 항전했으나 패배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살리타이]]가 이끄는 직할군인 제4군은 수갈래로 나뉘어 남진을 진행했다. 그해 11월 한양산성을 점령하고 [[경기도]] [[광주시|광주]]에 도착한 살리타이는 광주성을 공격했지만, 목사 이세화를 필두로 결의를 다지던 광주성은 끝끝내 함락되지 않았다. 결국 살리타이는 [[귀주성 전투|귀주성에서의 안 좋은 기억 때문에]] 결국 공격을 포기하고 우회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주력 병력을 강화 쪽으로 돌리고 직접 지휘하는 일부 병력으로 도달한 곳이 바로 현재의 용인이었다. [[구성동(용인)|구성동]]에 위치했던 용구현성(龍駒縣城)을 무혈입성하여 함락시킨 후 제4군의 주력을 [[용인시|용인]] → [[수원시|수원]] → [[군포시|군포]] → 부평 → [[김포]]를 경유해서 [[강화도]]의 통진으로 진출시켜 강화도를 압박하게 하고 본인의 일부 병력으로 남하를 계속했다. 그리고 그곳에 둘레 425m[*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은 250m 가량이다.]도 안 되는 작은 [[토성(동음이의어)#s-2|토성]](土城)인 처인성(處仁城)을 마주하게 된다. 얼마나 작은지 좀처럼 감이 잡히지 않는다면 100명 정도가 물자를 가지고 들어갔을 때 꽉 차는 정도라고 보면 된다. == 처인성 == 처인성은 위에도 언급했듯이 자그마한 토성이었다. 거기다 처인성이 위치한 지역은 바로 [[천민]]들의 거주지, 처인부곡(處仁部曲)이었고 성 안에 피난해 있던 사람들은 모두 정규군이 아닌 [[용인시]] 일대 수령들이 이동시킨 약간의 병력과 백성들[* 이들 합이 총 100여 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리고 [[김윤후]]를 비롯한 [[승려]] 100여 명과 다수의 부곡민들이었다. 굳이 싸우지 않아도 될 싸움이었지만 [[살리타이]]가 공격을 감행한 이유는 그곳에 있던 군량창고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다. 사실 처인성 전투 자체가 우연에 우연을 거듭하여 벌어진 사건이었다. 원래 [[살리타이]]의 목표는 [[광주시|광주]]를 점령하여 남부 지방으로 항하려 했는데, 막상 광주에서 격렬한 저항에 부딪히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진로를 [[용인시]]로 바꾸었고, 막상 또 용인에 와 보니 주민들은 전부 피난가고 빈 성만 있었고, 그러다가 인근 처인성에 군량 창고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리로 향했는데, 막상 처인성에 소수의 천민들이 피난해 들어갔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분풀이 대상으로 삼고자 공격한 것이었다. 사실 [[용인시]]의 주 방위산성은 처인성이 아니라 보개산성[* 길이 약 750m, 봉수대까지 있었다.]이었다. 이미 귀주와 광주에서 한번 뜨끔하게 데인 [[살리타이]]는 그냥 공성전을 포기하고 지나가려는 찰나 처인성이라는 작은 토성에 군량창고, 거기다 수도 얼마 안 되는 부곡민들이 들어갔다는 정보에 싸움을 건 것이니 애초에 싸움을 매우 쉽게 보았을 것이다. [[살리타이]]가 처인성에 도달하고 본대에서 500여 기의 기병을 직접 차출해 처인성 동북쪽의 완장리, 매룡리 일대를 점령해 포위공격을 할 준비를 시작했다. == 전투의 시작 == 1232년 12월 16일. 처인성에서 동북쪽으로 50리 지점에 도착한 [[살리타이]]는 완장리, 매룡리 일대에 병력을 3개 대로 분산 배치해 완벽한 포위망을 설치하였다. 이에 대비해 처인성의 백성들은 싸우기로 결정, [[승려]] [[김윤후]]를 대장으로 추대했다. 김윤후는 백성들에게 무기를 나눠 주고 그들의 동요를 막는 모습을 보여주며 다가울 싸움에 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적들의 주요 공략지로 판단한 처인성 동문 밖 300m 지점에 [[저격수]] 수십 명을 배치시켜 유사시를 대비했다. 그리고 '''하늘이 도왔고 기적이 일어났다.''' 물론 운이라기보다는 전술이 빛을 발한 것이다. 당시 이런 저격 전술을 사용이나 했을까? [[김윤후]] 스님이 시대를 앞선 전술에 대어가 낚인 것. 처인성 공격의 지휘자이자 [[고려]]침공군의 총사령관 [[살리타이]]가 김윤후의 화살에 맞아 전사한 것이다. 특히 [[몽골군]]은 총사령관이 전사하는 경우가 [[몽골 제국]]~[[원나라]] 역사에 있어서도 한손으로 꼽을 정도로 드물었기에 진영이 순식간에 무너지고 사기가 땅으로 떨어졌다. 결국 본국으로 돌아가는 계기가 된다. == 전투의 향방 == 기록에 따라 다 다르게 나와있다. 12월 16일 [[살리타이]]의 지휘아래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다는 기록과, 살리타이가 일부 기병을 데리고 처인성 동문을 정찰왔다가 저격병의 기습에 사망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김윤후]]와 저격병들이 [[살리타이]]를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는 것[* [[원나라]]의 공식 기록인 [[원사(역사책)|원사]]에서도 유시(流矢)에 맞았다고 적혀있다. 눈먼 화살, 즉 난데없이 날라온 화살이라는 뜻.], 그리고 지휘관을 잃은 [[몽골군]]은 당황해 했고 처인성의 [[승병]]과 천민들이 성문을 열고 나와 몽골군을 모조리 대파해버렸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몽골군의 특징이 총사령관이 죽는 순간 전투를 멈추고 돌아가는 습성이 있다. 비슷한 예로 [[몽골-남송 전쟁]] 중 합주 [[조어성 전투]]에서 [[몽케 칸]]이 전사하자 다른 전선에서 남송을 공격하던 [[쿠빌라이]]와 우량카타이 등 3로군이 모두 철수했고, 머나먼 서방에서 정복전을 수행하던 서방 원정군 사령관 [[훌라구]]조차 쿠릴타이 참석을 위해 원정군 일부만 남겨두고 철수했다.] ||[youtube(HPzl49Ml9zM)]|| == 2차 여몽전쟁의 종료 == 총사령관이었던 [[살리타이]]의 사망은 [[몽골군]]으로썬 굉장한 충격이었다. 부원수였던 테케는 [[고려]] 왕이 나올 때만을 하염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속에서 다급해질 수밖에 없었고, 결국 고려와의 강화를 체결하고 철군하게 되었다. 이때 모습은 굉장히 다급한 철수라는 것이었다는 것도 기록으로 남아 있다. >"몽고 군사는 일시에 함께 돌아가지 않고, 혹은 먼저 가기도 하고 혹은 뒤에 떨어지기도 하고, 동으로 갈까 북으로 갈까 망설이면서 그 향할 곳을 알지 못하였다." - <<[[동사강목]]>> 이 전투 이후 [[고려]] 조정에선 [[김윤후]]에게 상장군의 직위를 내렸으나 김윤후는 거절하였다.[* 상장군은 고려의 장수 지위 중 가장 높은 벼슬이다.] > 저는 전시를 당해서도 무기를 잡고 일어서지 못했던 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잘 것 없는 공으로 후한 상을 받겠습니까? - [[고려사]] 권103, 김윤후열전 이러니 조정에서는 그의 거절을 받아들이면서도 고마움을 잊을 수 없어 조금 낮추어 종6품 정도의 직책을 내려주었다. 그러나 [[김윤후]]는 21년 뒤 장수가 되어 다시 활약을 하게 되니, 그것이 바로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8221|충주성 전투]]이다. 처인부곡은 처인성 전투의 공을 인정받아 처인현으로 승격되었다. == 같이보기 == * [[김윤후]] * [[살리타이]] * [[용인시]] * [[처인구]] * [[남사읍]] [[분류:고려-몽골 전쟁]][[분류:용인시의 역사]][[분류:고려/성채]]